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4화 (4/126)

4.

좁은 틈으로 빛이 새어들어 온다.

불길한 냄새가 났다. 분명 소란한 느낌 때문에 깬 것 같은데, 방 밖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본래 새벽녘에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절대로 이 안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린이의 키에 맞게 난 작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은 한 치 앞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기에 발을 움직이는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그런데… 발밑이 축축했다.

천천히 몸을 숙여 쪼그리고 앉았다. 젖은 발 근처를 손으로 더듬자 손에 끈적한 것이 묻어났다. 오싹한 감각에 치를 떨며, 무엇이 묻은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바쁘게 눈을 깜박였다.

어둠 속에 거뭇하게 보이는 손.

비릿한 냄새.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광경에, 불길함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등골이 시려 왔다.

“…아버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불렀다. 다 잠겨 작게 떨리는 목소리는 너무나 하찮고 미약하게 들렸다.

“어머니……?”

소리가 작아서 듣지 못한 것뿐이리라. 그렇게 믿으려 애쓰며, 용기를 내어 조금 더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아버지! 어머니! 형!”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집안이 두렵고 낯설어서, 살면서 낸 것 중 가장 큰 목소리를 냈다. 비명 같은 부름에는 메아리조차 없었다. 소리도 기척도 잡아먹혀 버린 것 같은 집. 익숙한 공간을 가득 채운 낯선… 피 냄새.

극한의 공포에 뇌가 얼어붙었을 때, 생전 처음 듣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끔벅이면, 마침내 어둠에 적응한 눈앞에 반들거리는 구두를 신은 두 발이 보인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마주한 것은…….

어둠 속에서 야광별처럼 빛나는,

뱀보다 음산한 눈동자.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남자는 손을 뻗는다.

그 길로 억센 두 손이 여린 목을 틀어쥐었다.

* * *

“헉……!”

정원은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 동안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신이 든 뒤에도 내려다본 손은 파들파들 떨리는 중이었다.

멍청한 꿈을 꿔 버렸다.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이다.

강석주와 함께 국외로 떠나야 하는 것은 일주일 뒤라고 했다. 바로 출발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막 일이 끝난 사람을 불러낸 이유가 단순히 관장의 악취미인가 생각했는데, 이유를 물으니 관장은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정원에게 바로 임무를 안내한 것은 강석주에게서 곧 연락이 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불쾌해하는 정원에게 관장이 열심히 해명했다.

‘벌써 네 번호를 줘 버렸는데, 설명을 미리 안 해 두면 스팸이라고 무시할 거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상황이 곤란해졌을 것이다.

에스퍼들 중에는 인격 파탄자가 상당히 많았다. 특히 고등급 에스퍼는 백이면 구십구 성격이 나빴다. 주위에서 워낙 떠받들어 주는 탓에 기고만장해지는 것도 있겠지만, 고등급 에스퍼일수록 본인의 능력을 몸이 감당하지 못해 부작용으로 만성적인 신경쇠약에 시달리거나 잔병치레가 잦은 탓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성질이 더러워지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원은 이제껏 만나본 S급 에스퍼를 차례로 떠올렸다. 하나같이 놀라울 정도로 성격이 나쁘고 예민해서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강석주라고 뭐 다르겠는가. 정말로 그의 전화를 스팸 취급을 하며 무시했다면 단단히 심사가 뒤틀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먼저 연락이 올 것이라는 말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모든 걸 떠먹여 줬을 S급 에스퍼가 먼저 연락을 해 자기소개를 하는 장면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로 출국 날에나 처음 얼굴을 보게 되었다 해도 ‘그럴 줄 알았어.’라고 반응했을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S급 에스퍼와 마주치는 시간을 되도록 줄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정원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안녕하세요^^

정원 씨^^

강석주라고 합니다^^

이야기 들으셨겠지만^^

출국 전에 서로 조율^^

을 하려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서요^^

언제쯤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바로 다음날, ‘그’ 강석주로부터 어이없는 문자가 도착한 것이었다.

사실 잘 읽어 보면 내용에는 문제가 없었다. 장기 임무가 된다면 계속해서 일대일로 가이딩을 하게 될 테니, 닥치기 전에 미리 조율을 하자는 건 상식적인 발언이었다. 문제는 말투였다.

차라리 아주 딱딱하고 사무적이고 예의 바른 말투였다면 남이 대신 보내줬구나, 하는 생각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말 그대로 정체불명이었다. 말끝마다 들어가 있는 웃음 이모티콘의 존재 자체가 거슬리는데 심지어 어떤 기준으로 엔터를 쳤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더 신경이 쓰였다.

대체 ‘조율’ 뒤에 웃음을 넣고 끊어 간 이유가 뭘까?

정원은 남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정원에게도 이 문자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문자가 도착한 것은 약 1시간 전. 임무 현장에 나와 있어서 바로 확인하지 못한 것이지만 자신을 무시했다며 화를 낼 가능성도 있었다. 한시가 급했다.

[임무 중이라 답장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다음 일이 있어서 힘들고요.

내일 오후 괜찮으실까요?

괜찮으시면 본부에 미리 보고해 놓겠습니다.]

정원의 뒤늦은 답장과 달리 그의 답은 즉각 도착했다.

[네^^

좋아요^^]

할 일이 없나? 국가 소속 S급 에스퍼를 기관이 굴리지 않을 리가 없는데.

[장소는 어떻게 하는 편이 편하실까요.]

[편한 시간 말씀해주세요^^

내일^^

모시러 가겠습니다^^]

매서운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정원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오겠다니? 집으로 오겠다는 뜻인가? 집이 어딘지 알아내기라도 한 걸까?

정원에게는 이런 경험 또한 처음이 아니었다. 소속 가이드 알기를 물로 아는 국가기관이 마음대로 한 에스퍼에게 정원의 집 주소를 알려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매일같이 스토커처럼 집 앞에 찾아와 ‘자신만의 가이드가 되어 달라’ 요구하던 그 얼굴을 떠올리니 새삼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때는 상대가 허접한 에스퍼라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만약… S급 에스퍼가 그런 짓을 한다면.

순간 꿈에서 본 눈동자가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그건 과한 걱정이다. S급 에스퍼라고 해도 ‘그 남자’만큼의 위압감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S급 에스퍼라는 말만 듣고도 그 눈동자를 연상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건 과민반응이었다.

고개를 흔들어 마음을 진정시키고, 비교적 침착하게 답장을 보냈다.

[제 자택 위치를 아시나요.]

설마 또 이사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날 선 기분으로 보낸 문자에 강석주는 또 즉시 답장했다.

[아뇨^^]

뭐지…?

그렇다는 대답을 예상하고, 당장 ‘이 이상 제 사적인 개인정보를 캐내려는 행위는 삼가 주십시오.’라고 보내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정원의 손이 순간 멈췄다. 그사이 다음 문자가 도착했다.

[편한 장소 알려주세요^^]

데리러 오겠다기에 당연히 집을 떠올린 것이 과민 반응이었나. 살짝 머쓱해진 정원이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이야기하는 곳으로 데리러 오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 그럴 바에 약속 장소를 정해서 만나는 게 낫지 않나 궁금했다.

하지만 픽업하러 오겠다는 걸 ‘아, 괜찮습니다.’ 하고 거절했다가는 갑자기 발광을 하며 날뛸지도 모른다. 에스퍼는 보통의 사람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얌체공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정원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집 주소에 관한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는 듯, 알겠다는 말과 함께 내일 오전 임무가 있는 곳 근처의 백화점 위치를 찍어 보냈다. 강석주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문자를 읽기는 읽었나 싶을 만큼 빠르게 대답하더니, 이번엔 왜 답이 없지? 딱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답장이 왔다.

[내일 봬요^^]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타이밍이 찝찝했지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왜 지금 답장하시죠?’ 하고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어쨌든… 이걸로 약속이 잡힌 거겠지.’

조금 얼떨떨했다. 이제껏 만나 본 에스퍼 중 이렇게 엉뚱하게 반응하는 타입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원은 문자 몇 통으로 경계를 놓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과한 긴장은 내려놓되 비위를 거스를 만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그것만 지켜도 갈등은 피할 수 있을 터였다.

* * *

다음날 아침은 시작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잠을 잘못 잔 것인지 어깨가 아주 뻐근했고, 오래 잘 쓰던 전자레인지가 고장 나는 바람에 씨름하다 아침 식사를 할 타이밍도 놓쳤다. 겨우 일을 나서려던 참에 전화를 받았다.

- 오늘 현장에 나가기로 했던 에스퍼 김주혁 씨 말이야, 조모 상으로 빠지게 됐대. 급하게 다른 인원을 찾았는데 다행히 소희 씨 일정이 맞더라고, 소희 씨가 가게 됐으니까 참고해.

“일단 확인했어요. 그런데 김주혁 씨 할머님께서는 몇 개월 전에도 돌아가시지 않으셨나요?”

- 어머, 정말? 이번에는 외할머님 쪽이신 거 아닐까?

외할머니는 작년 여름에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조모를 파는 괘씸한 거짓말이지만 토를 달아 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다른 인원이 오기로 결정되었다고 하니 일정에 문제는 없을 테고.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때 핸드폰이 징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강석주의 문자일까? 긴장된 마음으로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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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무슨 거지같은 문자일까. 스팸 문자야 흔한 것이었지만, 이번 것은 묘하게 들어맞는 구석이 있는 듯해 더 불쾌한 내용이었다. 정원은 찝찝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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