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5화 (5/126)

5.

강석주와 만나기로 한 백화점 앞.

정원은 초조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찝찝한 예감이 현실이 된 것인지 오전 임무는 엉망으로 끝났다. 갑자기 배정된 새 에스퍼는 현장에 적응하지 못해 실수를 연발했고, 그 모습에 다른 에스퍼가 짜증을 부리며 협력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일이 너무 늦게 끝나고 말았다.

강석주에게 늦는다고 양해를 구하는 문자를 남겨 두기는 했다. 답장도 바로 받았다.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것은 본래 에스퍼가 이런 일을 참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늘 아침에 받았던 기묘한 ‘오늘의 운세’ 문자가 한 말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하기에 따라 귀인이 될 수도 있고 거지같은 인연이 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럼 자신은 후자로 가는 지름길을 타 버린 것일까.

석주에게 받은 답장 내용은 이랬다.

[네^^

GATE3 앞에 계세요^^]

이 답장만으로는 화가 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문자 상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 열 길 사람 속은 알아도 한 길 에스퍼 속은 모르는 법. 극단적으로 말하면, 문자는 저렇게 보내놓고 만나자마자 주먹을 날릴지도 모르는 게 에스퍼였다.

강석주가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니 더욱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어젯밤 나름대로 그를 조사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정원이 원체 주위와 벽을 쌓고 살아서 물어볼 사람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강석주에 관한 이야기는 신기할 만큼 알려져 있지 않았다. 소문이 파다해서 당연히 알 줄 알았다는 관장의 말과는 반대로 말이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스타 산업의 주체가 된 뒤로, 특히 고등급 에스퍼들을 향한 대중의 관심은 열광적이었다. 사기업 소속 에스퍼는 CF를 찍기도 했고 그들의 얼굴이 박힌 상품을 팔기도 했다. 미디어 노출이 적은 에스퍼라 해도 팬 층이 있어서, 인터넷 백과사전에 이름을 치면 한 줄 정도라도 정보가 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심지어는 국가기관 소속의 허술한 A급 에스퍼 세 명조차 나름대로 팬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강석주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본명과 얼굴을 숨기고 활동하는 에스퍼도 있기는 하지만, 강석주는 그런 케이스인 것 같지도 않으니 참 신기한 상황이었다.

강석주라는 S급 에스퍼가 정말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석주의 말대로 게이트 3이라고 적힌 문 앞에 서서 그에 관한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시간은 금세 갔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저 멀리에서부터 눈에 띄는 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차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알 법한 외제차 로고가 박혀 있었다.

관리도 잘 되어 있다. 정원이 차를 관찰하는 사이, 잘 달리던 차가 정원의 앞에 급정차했다. 정원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며 생각했다.

‘혹시.’

난데없이 차를 자랑하려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이 차의 주인이 강석주 아닐까?

그때 차창이 내려갔다. 천천히 드러나는 얼굴보다 먼저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 씨 맞죠?”

역시 강석주였던 모양이다. 정원은 그의 얼굴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우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강…….”

그의 이름을 확인하려던 차였으나, 정원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그대로 멈췄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강석주는 내려간 차창 틀에 팔을 걸친 채 인사하듯 한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검은색 곱슬머리였다. 연예인이 헤어숍에서 긴 시간을 들여 일부러 세팅한다 해도 저런 분위기가 나올 수 있을까. 머리카락 밑으로는 공들여 빚어낸 듯한 이목구비가 자리 잡고 있었고,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은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정원을 굳게 만든 건 강석주의 수려한 외모 따위가 아니었다.

짙은 눈썹 밑으로 보이는…….

잘 세공된 유리 조각 같은 노란 눈동자.

사람의 것 같지 않은 눈이다. 꼭… 지난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정원 씨.”

“…….”

“정원 씨?”

뒤쪽에서 다른 차들이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통행을 방해해 버린 것이었다. 강석주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 같은 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고 의아한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원은 뻣뻣한 두 다리를 옮겨 겨우 그의 차에 올라탔다.

강석주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연하게 벨트를 매라 말한 뒤, 차를 출발시켰다. 뒤에서 다른 차들이 눈치를 주건 말건 다급해하지 않는 듯했다.

“좀 늦었죠. 주차하기 애매해서 정원 씨 도착하기 전까지 건물 한 바퀴만 돌 생각이었는데, 뒤쪽에 사고가 났더라고요.”

“아……. 아닙니다. 제가 늦은 건데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붙여 오는 그에게 정원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는 운전에 집중하는 것인지 정원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저희 일이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인가요.”

그러니 늦은 것도 이해한다는 뜻일까……. 여러모로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오늘 현장에 있었던 에스퍼들은 자신들의 문제로 사건 수습이 늦어진 것인데도 적반하장으로 가이딩을 서두르라며 화를 냈는데 말이다. 정원은 어물어물 ‘그렇죠’ 하고 대답한 뒤 입을 다물었다. 강석주도 그 이상 말이 없었다.

어찌어찌 대답은 했지만, 답지 않게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하필 이틀 전에 그런 꿈을 꿔 버린 탓일까. 순간 강석주의 눈동자가 꿈속에서 본 ‘그 눈’과 겹쳐 보여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원이 가장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눈동자.

조금 비슷한 색과 비슷하게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을 가진 눈동자가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옆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느껴지는 기묘한 위압감도 마찬가지였다. 강석주 본인은 억누른다고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원체 에스퍼가 가진 기운에 예민한 편인 정원에게는 석주의 기운이 피부에 곧장 달라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껏 일터에서 만나 본 다른 S급 에스퍼와 비교해 봐도, 적어도 이 위압감 면에서는 따를 이가 없을 듯했다.

룸미러를 통해 석주의 얼굴을 살폈다. 본래 정원은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상상은 일부러라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강석주의 문자를 받고도 그의 능력에 관해 궁금해 했을 뿐, 그의 생김새에 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자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머릿속에 흐릿하고 막연하게나마 대화 상대에 대한 이미지가 생기기 마련이다. 강석주 같은 경우에는 그가 말끝마다 붙이는 ‘^^’ 이모티콘이 그의 이미지가 되었다. 흐릿한 얼굴에 웃음 이모티콘이 박혀 있는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사람의 외모에 관심이 없고 미의식이라고 할 만한 게 발달하지 않은 정원의 눈에조차 그의 외모는 수려했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의 눈을 보고 굳어 버리는 바람에 자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다시 찬찬히 뜯어 봐도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헝클어진 것 같으면서도 결이 좋은 머리카락. 자칫 냉랭하게만 보일 수 있는 인상이지만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탓에 타고난 외모에 비해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다만 그럼에도 S급 에스퍼가 가진 묘한 기운 덕분에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헐렁한 이모티콘이 달린 이상한 문자를 보내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사적인 감정 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그의 분위기는 유별나게 사람을 긴장시켰고, 다시 눈을 마주칠 것을 상상하면 머리가 아찔할 정도였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침묵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이런 남자와 장기 임무 파트너가 되다니.

“양식 좋아해요?”

기껏해야 근처 식당에 멈출 줄 알았던 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긴 시간을 이동하고 있었다. 슬슬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 궁금해졌을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표정을 보니 정원과 달리 그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원 역시 겉으로는 껄끄러움을 티 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먹는 즐거움에 관심이 없었기에 가리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었다.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강석주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전 한식 쪽을 더 좋아해요.”

어쩌라는 거지? 그 질문을 입안으로 삼켰다. 그래서 한식을 먹겠다는 건지, 그럴 거면 양식은 뭐 하러 물어봤는지. 점잖은 척했지만 실제로는 역시 성격에 문제가 있는 에스퍼였던 걸까. 방금 전까지는 단순히 변덕이었나. 상대가 S급 에스퍼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자꾸만 생각이 나쁜 쪽으로 튀었다.

이렇게 생각해서 좋을 게 없었다. 정원은 진정하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때마침 석주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 미션이 유럽 쪽이라길래 미리 마음의 준비도 좀 할 겸 오늘은 양식을 예약해 뒀거든요. 다행이네요.”

곱지 않은 눈으로 봤던 것에 비해 상당히 상식적인 말이었다. 정원은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상상을 접어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양식이든 한식이든, 이 남자를 앞에 두고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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