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음식은 입에 맞아요?”
정원은 공중에서 움직이는 나이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칼로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며 강석주가 물었다.
“…네. 맛있네요.”
입안에 든 파스타가 무슨 맛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봤다. 강석주는 만족한 듯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차 안에서 다행이라고 했던 것과 지금 꺼낸 말이 겹쳐 들렸다. 정원은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러네요.’ 하고 대꾸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는 당황한 상태였다. 레스토랑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릴 때, 강석주는 차를 세운 뒤 잠시만 기다리라 하더니 정원을 위해 친히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건물에 들어올 때에는 문을 잡아 주었고, 자리에 와서는 정원이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믿기지 않는 매너였다. 그게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러웠다는 사실은 더 믿기 힘들었다.
A급 에스퍼만 해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이능력을 가졌다. 조금 부실하기는 했지만 국가기관 소속 A급 에스퍼도 마찬가지였다. 마른하늘에 폭우를 내리고 맨땅에 지진을 일으켰다.
그런데 S급은 그들과도 차원이 달랐다. 물 관련 이능력을 가진 한 S급 에스퍼와의 인터뷰 중 ‘하룻밤에 슈페리어 호를 말라붙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이냐’는 과장 섞인 농담을 던지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사흘은 필요하다’고 대답한 건 유명한 일화다.
인터뷰이니만큼 과장이 섞였을 수는 있지만, 어쨌거나 면적이 팔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호수를 말려 버릴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만큼 능력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F급 에스퍼가 콩알탄이라면 S급 에스퍼는 원자폭탄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사기업 직원들은 물론이고 대중까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굽실거리고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다 있었다.
S급 에스퍼는 검사 결과가 나오는 순간부터 그런 대접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능력이 큰 만큼 부작용도 커서, 만성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성격이 시궁창 같아진 경우가 많았다. 아니, 여태까지는 100%였다. 하나같이 자기 손으로는 물조차 따르지 않으려 할 만큼 오만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대체 뭘까.
아무리 사람 나름이라지만, S급 에스퍼이면서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매너를 보이는 게 가능하다고? 스스로 필요 이상으로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S급 에스퍼라는 걸 빼고 보더라도, 어지간히 매너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맞선에 나와서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맞선이라니…….’
이제까지 정원의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단어였다. 상대가 강석주라고 가벼운 가정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정원은 속으로 괜한 생각을 털어내곤 고개를 들어 강석주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강석주가 나이프를 살살 움직이며 태연하게 물었다.
“맛있는 것치고 아까부터 표정이 별로신데요. 셰프를 부를까요?”
놀라운 매너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역시 에스퍼는 에스퍼라는 건지, 사람을 부리는 것이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셰프를 불러내서 눈치를 주겠다고? 누굴 말려 죽일 일 있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좀 피곤할 뿐이에요.”
“하긴. 계속 일이 바쁘신 것 같던데.”
강석주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혹시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었다. 정원이 바빠서 오늘로 약속을 잡은 것이었고, 정원이 바빠서 약속 시간을 늦췄기 때문이다. 다행히 강석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담백한 미소를 띤 얼굴을 보며 정원이 물었다.
“강석주 님은 아니신가요.”
어떤 호칭이 적당할지 고민하기보다는 그냥 극도로 조심스러운 호칭을 선택했다. 석주가 대답했다.
“저는 정원 씨라고 불렀는데요.”
그래서 어쩌란 거냐.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본 강석주는 눈을 약간 크게 뜨며 웃었다.
“몇 달 동안 계속 그렇게 부를 생각이세요?”
“알겠습니다. 강석주 씨.”
대놓고 표정을 구기지는 않았지만 묻는 모습을 보니 못마땅해 보였다. 호칭을 바꾸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정원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봤자 딱딱한 말투 때문에 거리감이 크게 좁혀지지는 않았다. 강석주는 그 이상 꼬투리를 잡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바쁘기야 합니다. 이번에도 귀국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래서 짬이 좀 나네요.”
이번에도, 라는 건 평소에도 외국에 나가는 일이 잦다는 뜻인가. 그렇다고 하면 그의 존재를 정원이 모르는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국외 임무였나요.”
“네, 멕시코에서.”
확인차 물었다. 모든 국외 임무를 거절하는 정원이었기에 외국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일부러라도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다. 그의 사정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당연했다. 무슨 일을 했는지를 묻는 게 평범하겠지만, 정원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피곤하셨겠네요.”
“시차 적응 정도야, 이제 익숙해서요.”
강석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원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강석주를 실제로 만난 뒤 처음으로 뭔가 대화다운 말이 오간 것 같았다. 슬슬 압도당하는 듯한 기분에서도 벗어나던 참이었다. 탐색하듯 그의 얼굴을 빤히 살피자 석주가 물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요리에 시선을 고정하고도 바로 눈치를 채는 걸 보면 시선에 예민한 듯했다. 정원은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궁금하신가요.”
일반적으로 나올 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강석주도 당황했는지 잠시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나 대답은 빨리 나왔다.
“네, 궁금하네요.”
“마침 저도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하나씩 주고받는 걸로 할까요.”
순순히 나온 대답을 듣고 정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강석주의 표정이 다시 묘해졌다. 정원은 그 모습을 가감 없이 담담한 눈으로 마주 보았다.
잠시 말없이 정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하하……. 그럼 질문은 바꿔도 되겠죠? 제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가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라서.”
되나요, 가 아니라 되겠죠, 인 점에서 그가 어떤 성격인지가 조금은 드러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정원은 그에게 대답을 듣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에게 돌아올 질문이 어떤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석주가 빙긋 웃었다.
“먼저 말씀하시죠.”
정원은 선심 쓰듯 선수를 내주었다.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이 사람은 먼저 질문한 뒤라면 정원의 말에 순순히 대답해 줄 타입처럼 보였다.
“음……. 몇 살이에요?”
잠시 고민하던 강석주가 물었다. 극도로 한국적인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이라면 차라리 자신의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가 더 궁금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대답은 했다.
“28살이에요.”
“한 살 형이시네요.”
대답을 듣자마자 강석주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이 역시 극도로 한국적인 발언이다. 정원은 다시 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이 S급 에스퍼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자꾸 의아했다.
“그건 제가 물어본 내용이 아닌데요.”
짐짓 냉랭하게 받아치자 석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그냥 혼자 말한 거죠.”
“…….”
“질문하세요.”
쓸모없는 질문에 손해 볼 것 없는 대답을 한 것뿐인데 왠지 그에게 말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불쾌하지는 않았다. 강석주와 달리 정원은 생각해둔 대로 탐색에 가까운 질문을 던졌다.
“이전에도 이런 임무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런 임무라는 건 좀 광범위한데요.”
운을 뗀 강석주는 정원이 설명을 덧붙이기 전 먼저 말을 이었다.
“국외 장기 임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있습니다. 당장 이번에 멕시코 다녀온 것만 해도 그런 케이스였으니까요.”
그것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가이드 한 명만 달고 임무에 나가 본 적이 있는지가 더 묻고 싶었다.
“그것보다는 인원의-.”
“질문 하나는 끝난 것 같은데.”
강석주가 정원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정원이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하게 받아넘기기에 계속 그럴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선을 그었다. 강석주의 심리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실수이기는 했다.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원은 쉽게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질문하시죠.”
“혈액형이 어떻게 되세요?”
석주는 별 망설임 없이 물었다. 뭔가 중요한 질문이 있어서 말까지 끊은 줄 알았는데. 오히려 머뭇거리며 대답한 것은 정원 쪽이었다.
“…B형인데요.”
과거에는 혈액형으로 성격을 구분하는 방법 따위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에스퍼나 가이드라는 유전적 특질이 부각되는 시대다. 정원은 살면서 혈액형을 묻는 사람을 오늘 처음 봤다. 검사를 했으니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내 피를 노리는 건가……. 하지만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서는 수혈도 불가능한데.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이 들 정도로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떫은 감을 씹은 것 같은 얼굴로 앉아 있는 정원을 보고 석주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다시, 정원 씨 질문해요.”
이렇게 되니 자신도 뭔가 허를 찌르는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정원은 침착하게 평정을 유지하며 계획했던 것 그대로 질문을 던졌다.
“이런 식으로 가이드 한 명과 장기 임무를 나가 본 적도 있으신가요.”
별것 아닌 질문이었지만, 의외로 석주는 그 말에 조금 방어적인 눈빛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