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7화 (7/126)

7.

“이번처럼 길었던 적은 없죠.”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 탓에 긴장을 감추기 힘들었다. 석주는 짧지 않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대부분 여러 명이 필요해서요.”

방금 전에 비해 끝을 뭉뚱그리는 듯한 말투였다. 가이드 여러 명이 필요했다는 건 이상할 것 없는 말이었다. 낮은 등급 에스퍼 여러 명을 높은 등급 가이드 한 명이 가이딩할 수 있듯, 높은 등급 에스퍼를 가이딩하려면 여러 명의 가이드가 달라붙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나 강석주는 S급 에스퍼인 데다, 관장에게 듣기로는 가이드와의 동조율도 낮은 편이었다고 했다.

정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석주가 다시 자연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그 질문에 대해 추가적인 답을 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제 차례네요. 무슨 영화 좋아하세요?”

“…….”

질문이 다 좀 이상하지 않나. 이런 게 왜 궁금하지? 하지만 민감한 질문도 아니고, 먼저 질문을 주고받자고 한 것은 정원 자신이었다. 생각하기 귀찮았지만 발을 뺄 수는 없었다.

“영화는 잘 안 봅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래도 굳이 본다면 시끄럽지 않은 영화를 선호해요.”

“멜로 같은 거?”

정원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그를 보다 느리게 대답했다.

“그건 다음 질문인가요?”

방금 전 말을 끊었다고 복수심이 든 것은 아니고, 사실 농담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정색하고 물은 탓에 그다지 장난기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석주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게 그렇게 되네요. 먼저 또 물어보세요.”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같이 활동하려면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능력 종류가 어떻게 되시죠?”

에스퍼란 원래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묶어 부르는 말이었다. 개인에 따라 능력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에는 차이가 있었다. 염동력이나 순간이동 등 흔하고 유용한 능력이 있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지금 무슨 음식을 먹고 싶은지 알아맞히는 능력 등 전투적으로 전혀 쓸모가 없는 능력도 있었다. 그런 능력으로는 아무리 초능력의 총량이 커도 높은 등급을 판정받기 힘드니, S급인 강석주는 그런 경우는 아니겠지만.

“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강석주가 곧 싱긋 웃었다. 그리곤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기며 말했다.

“이런 거?”

그러자 정원의 앞에 놓여 있던 포크가 저절로 허공으로 떠올라 파스타를 돌돌 감았다. 입가로 다가오는 포크를 내려다보며 정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동력인가.

흔한 능력이지만, 그만큼 쓸모가 많은 능력이기도 했다. 염동력이라면 비전투 계열의 능력도 아니니 현장에서 문제가 없을 것임은 자명했다.

신기했던 것은 그가 작은 물건을 띄우는 컨트롤이 상당히 섬세하다는 것이었다. 손으로 직접 만 것보다 더 깔끔하게 말린 파스타 포크가 정원의 입 앞에서 규칙적으로 까딱이고 있었다.

보통 S급 에스퍼 정도 되면 힘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자신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서 능력을 섬세하게 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고등급 에스퍼의 염동력이라고 했을 때 보통 떠올리는 것은 대단히 역동적인 이미지였다.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린다거나, 100m 반경 내에 있는 모든 물건을 띄워 버린다거나, 조금 더 과장되게 말하자면 건물을 통째로 들어 올린다거나 하는.

그와 달리 작은 물건을 섬세하게 조정하는 것은 B급 이하의, 강도는 대단하지 않아도 컨트롤이 좋은 에스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특기였다.

S급을 괜히 받은 것은 아닐 테니, 능력의 강도는 사실 볼 것도 없었다. 지금은 실내이니 강도를 조절했을 뿐 현장에서 그 위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섬세한 컨트롤까지 가능하니, 일단 그것만 보고도 높은 점수를 쳐 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봤어요.”

포크는 빨리 받아먹으라는 것처럼 계속해서 정원의 입 앞에 떠 있었지만, 정원은 끝내 말하는 것 이상으로 입을 벌리지 않았다. 석주가 살짝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눈짓했다. 그러자 포크가 정원의 그릇 위로 살포시 안착했다. 석주는 고민스런 눈빛으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본인이 능력을 선보였는데 멋지다며 띄워 주지 않아서 화가 나기라도 한 걸까.

보통의 S급 에스퍼와 달리 저 정도로 능력을 컨트롤하는 것은 물론 대단했지만 새삼스럽게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 에스퍼는 때때로 장기자랑을 하는 다섯 살배기처럼 짜증나게 섬세할 때도 있는 족속이기에, 비위를 맞춰 주지 않으면 곤란할지도 몰랐다. 정말 적성에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으나 싫으나 같이 다녀야 할 사이니까. 이제라도 눈을 튀어나올 듯 크게 뜨고 ‘정말 대단하시네요!’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을 때였다.

“아니면 이런 거라든가?”

선수를 친 석주가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다른 물건을 띄우려는 건가? 그러나 테이블 위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뭘 한 건지 물어보려 했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창밖에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곧이어 와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번개가 쳤던 모양이었다. 곧이어 갑작스럽게 쏟아지기 시작한 소나기를 내다보며, 정원이 당혹스러움에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이것도 강석주가 한 일인가?

정황상 그 외의 다른 사람이라면 더 이상한 분위기였지만, 그럼에도 반신반의하게 됐다.

“…지금 하신 겁니까?”

“네, 지금 했죠?”

석주가 똑같이 말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정원을 따라갔다. 바닥을 거세게 때리는 빗줄기. 난데없는 소나기에 당황한 사람들이 가방이나 겉옷 등을 머리에 쓰고 뛰는 광경. 정원은 창밖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웃기는커녕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저 약간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다 젖겠네요.”

분석하는 정원과 달리 석주는 그저 태연했다.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마자 무섭게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젖은 사람들만 없었다면 소나기가 내렸다는 게 착각 같았을 것이다. 정원이 석주의 표정을 슬쩍 살피며 떠보듯 말했다.

“능력이……. 한 가지가 아니셨네요.”

염동력이든 비를 다루는 능력이든, 쓸모가 많아 높이 평가받는 초능력이었다. 둘 중 한 가지만 있어도 충분할 능력 같은데.

두 가지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대부분 능력의 강도가 그다지 강하지 않거나, 그리 쓸모가 많지 않은 능력을 중첩해 가진 경우였다. 게다가 원체 능력의 강도 자체가 강한 S급 에스퍼 중에는 딱 한 가지의 능력만을 가진 이들이 절대다수였다.

그렇다면… 둘 중 한 가지 정도는 강도가 약한 걸까. 염동력은 컨트롤만 좋고 강도는 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원은 그렇게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정작 석주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네, 몇 개 돼요. 특출한 건 딱히 없고 발만 조금씩 걸쳐 놓은 정도죠.”

몇 개 된다고? 이 두 가지로 끝이 아니라? 그렇다면 혹시 하나하나 놓고 보면 별게 아니지만 능력의 종류가 많은 건가? 그런 케이스가 S급 판정을 받을 수 있을 리 없는데.

무엇보다 이미 보여준 것만 해도 ‘발만 걸쳤다’고 표현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이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라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지금쯤 벌써 놀람을 숨기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을 터였다.

“아, 그래도 이번 일 처리 못 할 정도는 아니니까요.”

석주는 그렇게 덧붙였지만, 아무도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러 과도하게 겸손을 떠는 척하는 건지, 진심인 건지 모르겠다. 정원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눈을 돌렸다.

아무리 본인이 알려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런 에스퍼가 여태 존재를 감추고 있었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대체 정체가 뭐지?

당황한 나머지 몇 가지 더 있다는 능력에 대해서는 물을 기회도 놓쳤다. 그래도 현장에 가 보면 그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네. 다음 질문……. 해 주시죠.”

“아까 하던 말 이어갈게요. 영화는, 멜로 같은 거?”

본인은 능력을 잔뜩 공개해 놓고 질문은 이게 다인가. 역시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본인이 굳이 이걸 묻겠다는데 달리 이유를 묻거나 거절할 수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본인 영화 취향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정원에게는 꽤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보다는 잔잔한 드라마 장르가 나은 것 같네요. 멜로는 지루해서요.”

“그렇구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궁금하긴 했던 건가. 아무래도 좋았다. 강석주는 어쩌면 정말 저따위 것들이 궁금한 게 아니라, 상대 가이드가 어떤 사람이든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 되는 에스퍼는 상대 가이드가 누군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걸까. S급 가이드든 뭐든 간에.

어찌됐든 정원은 정원 자신의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고민하듯 살짝 고개를 숙였던 정원이 곧 입을 열었다.

“선호하는 가이딩 방식이 있으신가요.”

“딱히요. 해결만 되면 그만입니다. 아, 되도록 육체적인 관계는 피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강석주가 망설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었고 정원은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완전히 예상 밖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석주가 정원의 표정을 힐끗 돌아보더니 빙긋 웃었다.

“제 쪽에서도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그 부분은 안심하세요.”

말이야 좋은 말이지만……. 솔직히 믿을 수는 없었다. 냉큼 믿기에는 너무 감언이설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정원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불신의 눈으로 석주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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