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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8화 (8/126)

8.

스킨십의 강도가 강할수록 가이딩 효과가 확실하다. 그럴수록 에스퍼는 강한 안정감을 느낀다. 정원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쾌락까지 동반하니, 에스퍼 입장에서 가이딩을 받을 때 더 강한 스킨십을 요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선호하는 것을 넘어 지난 현장에서 만났던 에스퍼처럼 대뜸 옷을 벗으라며 윽박지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강석주는 특이했다. 특히 그처럼 본인 입으로 먼저 선을 긋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원은 얼굴을 찌푸린 채 석주의 표정을 살폈다. 그냥 하는 말인가. 그런 것치고는 표정에 구김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유가 궁금했다. 개인적인 이유로 성적인 접촉을 꺼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실 숨겨 둔 애인이 있어서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건가. 에스퍼들 중에는 극히 드문 케이스였지만, 그래도 정조 관념이 투철한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정원의 눈에 강석주는 어쩐지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더더욱 의아해지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그런 사적인 부분을 파헤칠 마음은 없었다. 그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였다.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질문은요?”

정원의 물음에 석주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질문은 별로 망설이는 기색 없이 나왔다.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이번에는 정말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런 질문에 정말 의미가 있나. 쓸데없으면서도 사적이라서 대답하기가 묘하게 껄끄러웠다. 계속 이런 식이면, 다음번에는 정말로 이런 쓸모없고 개인적인 질문은 그만해 달라고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원이 그 말을 하기까지는…….

* * *

“대체 언제까지… 이런 걸… 물어보실 건가요?”

짜증스럽게 뱉은 자신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정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긴 시간이 지난 기분이었다. 중간 부분이 끊긴 듯한 느낌. 어두운 조명. 맞은편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아 있는 강석주의 모습. 이곳은 술집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순간 생각하던 정원이 머리를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취기가 올라 순간적으로 필름이 나갔다 돌아온 모양이었다.

“…방금 질문이 뭐였죠.”

조금 전까지도 계속 질문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느릿느릿 물었다. 취기 오른 정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석주가 대꾸했다.

“아, 별건 아니었어요. 술버릇이 어떻게 되냐고 물으려던 겁니다.”

마찬가지로 느린 말투였다. 그러나 정원에게 속도를 맞추었을 뿐, 그는 전혀 취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흐릿한 시야를 통해 보이는 얼굴이 평온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

“술버릇…….”

작게 중얼거리자 강석주가 곤란한 듯 웃었다.

“말씀 안 하셔도 알 것 같긴 한데.”

“안 취했어요.”

정원이 즉각 대답했다. 이렇게 말할수록 더 취한 사람 같아 보인다는 건 안다. 그래도 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요?”

믿기 힘든 반박에도 석주는 담백하게 되물을 뿐 더 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에이, 취했으면서.’ 같은 말이 나오기 마련인데. 다른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묘하게 안정감을 줬다. 정원이 느리게 중얼거렸다.

“좀 어지러울 뿐입니다…….”

그러면서 정신을 다잡았다. 우선은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주사는 딱히 없고, 그냥… 잠을 자죠. 애초에 취할 만큼 많이 마시는 일이… 잘 없어요.”

말이 드문드문 끊겼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애초에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뒤늦게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기억나는 것은 정원은 일에 대한, 강석주는 시시콜콜한 개인사에 대한 질문을 계속 늘어놓다가 식사가 끝났다는 거였다. 그리고 아직 이야기가 덜 끝났다는 이유로 자리를 옮겼다. 그 자리를 칵테일 바로 정한 강석주도, 그걸 따라온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그렇게 돼 버렸다.

아무래도 시작부터 분위기를 잘못 탄 것 같았다. 무리하게 페이스를 올리는 바람에 답지 않게 취기가 올랐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멍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아 있게 된 것이었다.

“이제 정원 씨 차례예요.”

강석주가 말했다. 이 와중에도 그 질문 놀이를 계속할 생각인가. 일에 관한 내용은 벌써 다 물어보았다. 이대로 당장 출국해도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자신만 대답한 상태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질문이라도 하기 위해 정원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왜… 여기서 일하나요?”

느릿느릿 벌린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질문이 나왔다. 궁금하기는 해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다는 걱정이 잠시 고개를 들었지만, 머리가 멈춘 탓인지 후회는 되지 않았다.

석주는 잠시 침묵했다.

“이걸 제가 대답하면 정원 씨도 같은 질문에 대답해 주실 건가요?”

모든 질문에 어렵지 않게 대답을 내놓더니, 이번에는 되물어 왔다. 되묻는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해 저절로 싸늘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직 제 차례가 안 끝났는데.”

“민감한 부분이잖아요. 정원 씨도 이해할 텐데요…….”

강석주의 말끝이 달래는 것처럼 흐려졌다. 정원은 포기가 빨랐다. 처음부터 강석주가 왜 국가기관에서 일하고 있는지, 그 이유 자체가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혹시 그도 자신과 비슷한 입장인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여전히 남은 궁금증과 동나 버린 질문거리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정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렵네요. 사적인 질문은…….”

“왜 갑자기 사적인 걸 물어볼 마음이 들었어요?”

대답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작게 웃음 섞인 물음이 다시 돌아왔다. 벌써 두 번째 질문이었다. 이미 질문을 주고받는다는 본래 제안은 의미가 흐려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정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순서가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머리가 무거워서 바 위로 양손 깍지를 꼈다. 그 위에 턱을 괴고 올려다보자 강석주가 곤란한 듯 제 입가를 쓸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시간은 얼마 흐르지도 않았고, 순서 역시 여전히 돌아가지 않았지만, 문득 입이 열고 싶어졌다.

“달리 더… 궁금한 게 없으니까요.”

그러나 정말로 그게 다인가. 그냥 술이 들어가서 이성이 마비된 건 아닐까. 이런 사람은 처음 본다는 생각이 술기운에 극대화되는 바람에, 호기심을 참을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정원은 이성을 찾아야 한다고 되뇌며 고개를 돌렸다.

“또, 같은 질문에 대답할 거냐고 하셨는데…….”

“네.”

“제가 왜 여기서 일하냐면요.”

“네.”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술술 하고 있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일 아침이면 자신이 멍청했다고 후회할 게 뻔한데, 석주의 담백한 대답을 듣고 있으니 좀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이번 임무도…….”

말하다 말고 겨우 입을 다물었다. 그마저도 이성을 찾아서가 아니라 피곤해서였다. 피로함에 바 테이블로 얼굴을 박으려는 정원을 석주가 막았다. 차가운 대리석 바와 뺨 사이에 석주의 손이 끼어들었다. 뺨을 받쳐 준 손을 정원이 건조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일어나세요, 정원 씨. 저도 대답할게요.”

술기운을 깨워 주려는 것인지, 결국에는 석주도 입을 열었다. 정원은 아주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전…….”

대답을 들어야 하는데.

목소리는 점점 흐려졌다.

* * *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에서 깨어난 정원이 찌푸린 얼굴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분명 긴 꿈을 꾼 것 같은데, 내용이 통 기억나지 않았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크림색이 아니라, 낯설 만큼 새하얀 색의 천장.

그 사실을 깨닫자 멍하던 정신이 한순간에 맑아졌다. 놀란 정원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에서 깬 직후라 순간 착각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옆을 두리번거려보니 착각이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정말로 생전 처음 보는 장소였다.

흘러내린 이불 밑으로 낯선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러니까,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겨서…….

설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정원은 설마, 설마 하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침착하게 이불을 걷어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옆으로 눈을 돌렸다.

남자 둘이 눕기에는 살짝 좁은 감이 있는 침대 위, 자신의 것이 아닌 벗은 등판 하나가 엎드려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

“…….”

크게 뜨인 눈을 숨기기도 전에, 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황급히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지만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부스스 눈을 뜬 강석주가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아, 일어났어요?”

정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침착하게 짚어 보려 했지만 도무지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다.

애석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이 남자와……. 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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