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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9화 (9/126)

9.

얼추 정신을 차린 정원은 극도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최대한 석주와 거리를 벌렸다. 이불로 제 몸을 가리며 침대 끄트머리의 끄트머리까지 몸을 물렸다는 뜻이다.

좁은 침대에서 할 수 있는 한 멀찌감치 물러난 정원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강석주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막 일어난 것 같았지만 머리가 조금 헝클어진 것 말고는 잠들기 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정말 지금 깬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말끔한 얼굴. 조금도 푸석푸석해지지 않은 피부. 그 모습을 노려보고 있는데 석주가 작게 하품을 했다. 하품을 좀 한다고 꼴이 우스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려하게 일그러지는 얼굴마저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제아무리 번듯한 모습이라고 해도 정원의 경계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정원은 간밤의 일을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면서도 강석주 쪽을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제 손으로 대충 머리를 정리한 강석주가 몸을 일으켜 앉더니 정원 쪽을 웃으며 돌아보았다. 통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여서, 결국 정원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제가 혹시 실례를 했나요?”

말이 그렇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는 말을 완곡하게 돌려 표현했을 뿐이었다. 잔뜩 곤두선 목소리 때문에 석주도 그 사실을 충분히 눈치챘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로 정원을 마주 보며 말했다.

“기억 안 나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원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술집에서 의미 없는 문답을 이어 가다가, 제법 중요한 타이밍에 잠들었다는 게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정원은 다시 한번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몸에 입혀진 실내복은 자신의 사이즈보다 약간 커 보였다. 직접 입은 기억이 전혀 없으니 아마 남이 갈아입힌 것일 터였다. 상의를 탈의한 채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 자신의 옷을 갈아입힌 것도 강석주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어쩐지 허리도 욱신거리는 것이…….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정원은 눈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석주를 노려보았다.

뭐? 육체적인 관계는 피하는 게 좋겠어? 취한 사람을 냉큼 본인 집으로 데려올 거면 그럴듯한 말이나 하지 말 것이지.

하지만 곧 한숨을 쉬며 시선을 거뒀다. 정원은 원체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술에 취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고를 쳤다 해도 석주만을 원망할 성격이 못됐다. 애초에 잘못이 있다면 에스퍼라는 게 원래 다 겉과 속이 다른 족속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경계를 풀어 버린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강석주를 향한 어이없는 감정과 약간의 원망을 접어놓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돼 버렸지만 그와는 앞으로 한동안 같이 일해야 할 사이였다. 이대로 분위기가 서먹하거나 험악해져서는 곤란했다. 그래서 정원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네. 민망한 말이지만 취한 이후부터는 필름이 끊긴 것 같네요.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든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자, 나도 그렇게 해 주겠다. 대략 그런 뜻을 담은 말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뻔뻔하거나 태연하게 굴 줄 알았던 석주가 집요하게 나왔다.

“정말로 기억이 전혀 안 나요? 하나도?”

조금 전까지는 여유가 철철 넘치는 모습으로 “일어났어요?”라며 안부도 묻더니, 그 질문을 던지는 얼굴은 심각했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정원이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석주가 짐짓 가련하게 이불을 끌어다 덮는 시늉을 했다.

이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그 모습을 보니 절로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석주는 보통 성인 남성들 사이에 서 있어도 단연 돋보일 만큼 키가 컸고, 골격 자체가 좋은 데다 어깨도 넓었다. 우락부락하다기보다는 적당히 날렵해 보였으나 그럼에도 체격이 남다르다는 인상이었다.

그런 피지컬로 저런 자세를 취해 봤자 불쌍하기는커녕 우스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장난을 치는 거라고 단정하기에도 애매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왜 강석주 쪽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설마 자신이 술에 취해 뭔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해 버린 걸까.

“저…, 그……. 일단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과음하는 바람에 필름이 완전히 끊긴 모양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씀을 해 주시면.”

정확히 뭘 했든 간에, 일단 사과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 말에 석주는 표정을 굳히더니 짐짓 심란하다는 듯 물어 왔다.

“날 거칠게 침대로 밀어붙였던 거랑 옷을 찢어버리려고 했던 것도 다 정말 기억이 안 나요? 난 정원 씨가 밤새 놔 주질 않아서 고생했는데…….”

“잠, 잠시만요. 뭐라고요?”

너무 터무니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정원은 답지 않게 입을 벌린 채 멈춰 있다가, 당황스럽게 입가를 매만지며 물었다.

“제가… 제가요?”

솔직히 전혀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한 번도 남을 ‘거칠게 침대로 밀어붙인’다거나, ‘옷을 찢는’다거나, ‘밤새 놔주지 않는’ 짓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기억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석주가 진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제가 그랬다고요?”

“내 말이 거짓말 같아요?”

망연하게 재차 묻자, 석주가 이번에는 표정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본인의 말을 의심하는 거냐며 화를 내면 상황이 곤란해졌기에, 정원은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극구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렇다는 게 아니라…….”

순간 섬광처럼 어떤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떠오른 것은 침대 위로 강석주를 우악스럽게 밀어붙이는 자신의 모습. 생생한 것을 보니 끊긴 필름 속 한 장면이 분명했다. 완전히 하얗게 질린 정원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럼 저희가 잔 게… 정말로 저 때문에… 그렇게 된 건가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사과를 해야 하는 건가. 대체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분명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장면을 떠올렸음에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술이 원수라지만. 정원이 할 말을 고르며 한참 입술을 달싹였다.

진지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석주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표정 너무 심각한 거 아니에요? 한숨 그만 쉬어요, 땅 꺼지겠어요.”

“…네?”

방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게 누구였더라? 순식간에 풀린 표정을 보며 정원이 눈을 깜빡였다. 석주가 웃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즐거울 때 나오는 버릇인 걸까. 석주는 아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미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속아 넘어간 느낌이었다.

“장난 좀 쳐 봤어요. 화난 것 같길래.”

“…화가 났던 건.”

깨어난 직후에는 아주 잠시 화가 났지만, 금세 갈무리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화가 나는 건 지금이었다. 농담이었다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럼 문득 떠올랐던 그 기억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다 거짓말은 아니고……. 침대에 눕힌 것도 맞고 옷 버린 것도 맞고 안고 주무신 것도 맞는데, 어쨌든 자지는 않았거든요.”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석주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그게 뭔가요. 제가 강석주 씨를 덮치긴 덮쳤지만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이건가요?”

“어떨 것 같아요? 대충 비슷해요.”

정원의 날 선 질문에 대강 대답한 석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걱정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안심하시고.”

“…….”

“식사하고 가세요.”

그 말을 한 석주는 정원이 거절하기도 전에 방 밖으로 나갔다.

어처구니없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혼자 두고 가버리면 지난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되는 것은 자신뿐인데.

기억을 돌이켜 봐도 그 장면 외에는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분명 강석주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캐물었다가 긁어 부스럼이 될까 봐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본인이 안 잤다지 않나. 석연찮은 구석이 넘쳤지만 덮고 넘어가는 것이 나을 듯해 생각을 털어냈다.

주인 없는 방에 혼자 남으니 불편한 정적이 정원을 괴롭혔다. 할 일 없이 시간을 때우는 것은 정원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낯선 집에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정원은 곧 석주의 방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삭막하지는 않았고, 적당히 사람 사는 느낌이 났다. 창가에는 두어 개의 화분이 놓여 있었다.

화분을 키운다고? 생화일까? 아니면 장식을 위해 둔 조화? 어느 쪽이라고 해도 의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오세요, 정원 씨.”

강석주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정원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화분을 자세히 살피려 할 때였다. 언뜻 보기에는 생화처럼 느껴졌는데.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살짝 소리를 높여 대답한 뒤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앞에 그릇을 내려놓던 강석주가 눈짓으로 새삼스러운 인사를 했다.

정원은 말없이 식탁 위를 둘러보았다. 밑반찬 두어 개와 콩나물국. 해장을 위한 식단으로 더할 나위 없다. 부엌에서 불을 켜고 요리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이 남자가 한 요리가 맞을 텐데, 정원은 여전히 그 사실을 믿기 힘든 기분이었다.

“식기 전에 앉아요.”

차분히 권한 강석주는 정원의 몫으로 놓아둔 식기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먼저 숟가락을 드는 시늉을 하더니 고개를 까딱였다. 앉으라는 의미였다.

정원은 기묘한 심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말없이 식사를 시작하는 석주를 보고 국을 한 술 떴다. 살짝 싱거운 듯한 간이 입에 착 붙었다.

그러는 동안 석주는 정원 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맛에 대한 평가를 바라는 건가. 속으로 생각한 정원이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맛있네요.”

석주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이 이상의 칭찬을 바라는 건가. 가뜩이나 껄끄러운데. 정원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아주 맛있습니다. 요리를 잘하시나 봐요. 원래 짜게 먹는 편이 아닌데 제 입에 간이 딱 맞네요.”

“혼자 사니까요. 요리가 늘 수밖에 없죠.”

애써 극찬의 말을 짜냈더니, 석주는 덤덤한 표정으로 밋밋하게 대답했다. 김이 새는 기분에 은은한 못마땅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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