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1화 (11/126)

11.

정원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또 질문 주고받는 시간인가요?”

“음……. 어떡할까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셔도.”

잠시 뜸을 들이던 석주가 웃으며 되물었고, 정원의 입에서는 저절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석주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날이 섰네, 정원 씨.”

“…….”

필요 이상으로 날이 서 있다는 건 인정했다. 정원은 일그러졌던 표정을 풀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나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그렇다고 하면 정원 씨 질문 먼저 대답할게요.”

“그때 하다 만 얘기가 있긴 했었죠.”

아무것도 없다고 하려다 말고 술자리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왜 국가기관에서 일하느냐는 질문에 결국 대답을 듣지 못했다. 석주도 바로 그때의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술 마시다 얘기했던 거?”

“네. 결국엔 대답을 못 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건 정원 씨가 잠들었던 거잖아요. 무효로 쳐야 할 것 같은데. 다른 질문은 없어요?”

장난스러운 어투에 정원 역시 웃음을 머금었다. 다만 꽤나 냉소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석주처럼 대화를 이을 자신은 없었다.

“저도 강석주 씨처럼 신변잡기적인 질문을 해야 하나요. 나이나 혈액형, 좋아하는 노래 취향이나 휴일에 하는 일 같은 것들?”

“다 대답해 줄 수는 있는데. 하나도 안 궁금해 보이는 표정이네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말이 비꼬는 것처럼 나갔다. 그럼에도 돌아보니 석주는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 눈동자를 다시 보니 또 체한 것처럼 속이 무거워졌다. 차라리 기분이 상해보였다면 덜 껄끄러웠을까.

“…솔직하게 대답할까요.”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에는 다 솔직하게 대답하세요.”

석주의 말은 담백한 명령조였다. 본인이 저렇게 선언했으니 곧이곧대로 대답한다고 화를 내지는 않겠지.

“네. 솔직히 대답하자면 별로 궁금하진 않아요.”

“전 궁금하니까 대답해 주세요.”

즉각 답이 돌아왔다. 살짝 인상을 찡그려도 그의 웃음에 금이 가는 일은 없었다.

그의 눈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니 그래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자신이 왜 외국에 나가지 않았는지가 그렇게 궁금한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싫어서 피했던 거.”

“비행기가 무서워요?”

외국에 나가기 싫었다고 고백하는 것 자체는 상관없었다. 이유에 대한 질문을 피하고 싶을 뿐.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대답하면 귀찮아질 것 같았다.

“아니면, 비행기도 무서워요?”

가벼운 듯하지만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정원은 즉각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했다.

“제가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그러나 곧 덤덤하게 되물었다. 석주는 의외로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솔직히 대답하자면 좀 겁먹은 것 같아 보여요.”

“왜 제 말을 따라하시나요.”

“상대의 말을 따라하면 친밀해지는 데 도움을 준다고 어디서 들었던 것 같아서요.”

“말은 잘하십니다.”

친밀해진다, 라.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애초에 강석주야말로 그럴 생각이 있기는 한 걸까. 여전히 그를 향한 미심쩍은 감정은 그대로였다.

때마침 이륙 준비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곤란한 질문은 피할 수 있게 됐지만, 긴장감으로 정원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석주가 손을 뻗었다.

“손 이리 주세요.”

“제 손은 왜 가져가려고 하시죠?”

“긴장 풀어 드리려고요.”

이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정원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강석주 씨가 손을 잡아 준다고 제 긴장이 풀리지는 않아요. 더 마음이 불편하면 불편하지.”

“나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면 비행기 때문에 무서운 건 덜해지겠죠. 자꾸 날 세우는 거, 긴장이 돼서잖아요?”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강석주의 손을 잡는 것보다는 비행의 공포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게 덜 부담스러웠다.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면서도 정원은 결국 그에게 손을 내주었다.

가이딩을 할 때가 아닌 이상 에스퍼와 신체 접촉은 하지 않는다. 에스퍼 특유의 기운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물며 상대가 존재만으로 위압감을 주는 강석주이기에 더더욱.

손끝이 찌릿했다. 비행기가 떠오르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으스러질 듯 쥐었다. 잡힌 손이 새하얗게 질렸는데도 석주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거북한 마음은 잠시였다. 그보다는 뭐라도 잡을 게 있다는 데에서 오는 안정감이 더 컸다.

문득 강석주의 손이 오늘은 그다지 차갑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걸 깨달은 것은 비행기가 무사히 이륙해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은 다음이었다. 정원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제 좀 괜찮아요?”

“…네, 실례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자꾸만 실례했단 소리를 하세요.”

“저한테는 별거예요.”

일일이 실례했다, 죄송하다 사과하지 않으면 트집 잡히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 석주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정원 씨가 일터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 왔는지 뻔하네요.”

“…….”

“에스퍼 중에 쓰레기가 많긴 하죠? 나도 그래서 팀 활동은 싫더라고요.”

본인은 다르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정원의 눈에는 그 수많은 쓰레기 같은 에스퍼보다 강석주가 훨씬 더 대하기 불편한 상대라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름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주려고 하는 말인데 어깃장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정원은 그냥 말을 돌리기로 했다.

“강석주 씨는 외국에 자주 나가 보셨죠. 도착하는 데까지 13시간 걸린다는데, 보통 이 시간 동안에는 뭘 하면 되는 건가요?”

“영화를 보거나, 업무를 보거나, 자거나?”

“일할 거리를 가져왔어야 했네요.”

“눈이라도 붙여 보지 그래요. 나도 보통 자는 편이거든요.”

그래 보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도무지 비행기에서 잠을 잘 자신이 없었다. 반면 석주는 잘 자라는 말을 하더니 더 이상 말을 거는 대신 정말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금세 고른 숨을 내뱉는 걸 보니 빠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자리를 안 가리나. 잠시 그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정원이 그를 거북하게 느끼는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고 하면 분위기나 위압감보다도 그 눈이었다. 호박을 박아 놓은 것 같은 노란 눈동자.

그래서인지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은 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사람을 짓누르는 것 같은 S급 에스퍼의 기운도 가라앉은 상태였고.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검은 곱슬머리가 오늘따라 눈에 띄었다. 그 밑으로 정교하게 조형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이게 정말 사람은 맞나 싶은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을 뻔했다. 제자리에서 몇 센티미터 정도 뜬 손을 급히 치우며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먼저 손을 대 보려고 하다니, 아무리 자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고 해도 그렇지. 죄라도 지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원은 생각을 돌리기 위해 관심도 없는 영화를 틀었다. 재미없는 내용 때문에 피로함은 더해지는데, 그 와중에도 전혀 잠이 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정원은 그렇게 재미도 없는 영화 따위를 보며 13시간을 보냈다.

* * *

한손에는 수하물 가방을, 다른 손에는 기내에 가지고 탔던 가방을 들고 있는 정원의 모습을 보고 강석주가 한마디 했다.

“짐이 좀 무거워 보이는데.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괜찮습니다. 제가 들 수 있을 정도로 챙긴 거라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정원은 이미 진이 빠진 상태였다. 잠은 한숨도 자지 못했고, 열 시간 넘게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챙길 때에는 적당하게 느껴졌던 가방이 지금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남는 손도 없어서 자세를 고치는 것도 힘들었다.

정원이 내심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정원의 뒤에서 달려 나오더니 강하게 어깨를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신음하며 팔 쪽을 내려다본 정원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이 잡아채지는 과정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그 짧은 순간 정원은 두 가지를 알아챘다. 하나는 이 새끼가 가방을 훔치기 위해 일부러 어깨를 친 소매치기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에스퍼라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석주는 정원의 가방을 들고 도망치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소매치기네요?”

“태연하시네요. 남의 짐이라 이건가요?”

“그러는 정원 씨도 태연하신데요. 본인 짐이면서? 중요한 건 안 들어 있어요?”

하늘이 맑네요? 같은 말을 하듯 태연한 목소리. 거기 대꾸한 정원 역시 그의 말대로 덤덤한 태도였다. 중요한 거라면… 들어 있었다. 아주 많이.

“꼭 필요한 건 다 저기 들어 있죠.”

석주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느긋하냐는 뜻이겠지. 정원은 그를 힐끗 돌아본 뒤 다시 눈을 돌려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소매치기의 뒷모습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석주가 물었다.

“잡아 드릴까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정원이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달려가던 소매치기가 제자리에 풀썩 엎어졌다. 그 모습을 본 강석주가 얼굴을 찌푸렸다. 추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렇게 될 걸 알고 계셨던 모양인데요?”

본래 이런 일로 즐거워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약간이지만 당황한 듯한 석주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썩 괜찮았다. 강석주가 태연하게 반응했던 것은 소매치기가 도망쳐도 잡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다만 그것은 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원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놓치기 전에 잡으러 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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