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기절했을 테지만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정원이 쓰러진 소매치기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석주 역시 떨떠름해하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정원은 우선 바닥에 널브러진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짐이 흐르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동안 석주는 가만히 소매치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았단 것을 확인하고 정원도 눈을 돌렸다. 스쳐 지나갈 때부터 체구가 작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확실히 앳된 얼굴이었다. 열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가이딩인가요?”
“네.”
알아볼 줄은 몰랐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은 몸이 닿은 찰나의 순간에 이 어린 소매치기 에스퍼를 상대로 가이딩 능력을 사용했다.
가이딩이란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의 에스퍼를 정상 상태로 안정시키는 행위이다. 그렇다는 건 이미 정상인 상태의 에스퍼에게는 가이딩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안정적인 상태에서 가이딩을 받으면 일차적으로 몸이 노곤해지고 기운이 빠진다. 능력을 잘만 사용하면 에스퍼를 아예 잠에 빠뜨리거나 행동 불능 상태로 빠뜨리는 것도 가능했다. 일반적으론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지.
석주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가이딩을 이런 식으로 써먹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네. 저도 저 말고는 본 적 없습니다.”
애초에 정원처럼 강하고 숙련된 가이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일 테고. 남이 하면 그냥 조금 기운이 빠지는 게 전부일 것이다. 담담한 말에 석주가 짧게 웃었다.
“대단하긴 하지만… 그냥 나한테 맡겼어도 될 텐데. 능력 낭비 아니에요?”
“낭비라고 할 만큼 심한 정도도 아니었으니까요.”
실제로 기운은 별로 빠지지도 않았다. 정원은 쓰러진 소매치기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석주는 소년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 이 친구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냥 두고 갈 생각이었는데요.”
“신고 같은 건?”
잡았으니 된 것 아닌가. 가뜩이나 외국에 나왔다는 사실이 불편한데, 신고까지 해서 사람들이 몰리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피곤했다.
“결과적으로 도둑맞은 건 없으니까요.”
“관대하네요.”
석주가 작게 웃었다. 그냥 웃는 것뿐인데도 묘한 눈빛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다. 정원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적당히 대꾸했다.
“네. 제가 원래 마음이 좀 넓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그냥 가는 걸로.”
길 한복판에 엎어져 있는 꼴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어차피 잠깐 재워 놓은 것뿐이니 잠시 후면 깨어날 터였다. 택시를 잡는 석주에게 다가가 물었다.
“바로 호텔로 가나요?”
“아니면요? 관광이라도 하고 싶어요? 일단 짐은 풀어야죠.”
정원은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관광이라니,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이미 정원을 관광객으로 단정했는지 짐부터 풀자고 설득하는 듯한 말투가 황당했다.
“놀러 온 것도 아니고 관광은 무슨 관광인가요. 지부에 들러서 보고부터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물어봤어요.”
“아, 보고……. 그걸 꼭 가야 되나요? 전화 남기면 되지.”
“전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진행해 본 적이 없는데요.”
외국까지 가는 게 아니더라도 관할 지부가 있으면 꼭 직접 들러 보고한 뒤 현장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게 기관의 매뉴얼이었다. 번거롭고 쓸모없는 절차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키지 않았다가 귀찮아지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국내에서는 특히 동해 지부가 그런 방면의 어깃장이 심했다. 도착하자마자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으면 사소한 부분까지 트집을 잡아 본부에 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징계를 받기 딱 좋았다. 지부장의 성격이 워낙 유별난 탓이었다.
그런 경험을 적잖이 해 본 탓에, 정원은 그냥 매뉴얼을 지키는 데에 익숙해졌다.
“직접 들러서 현장 설명을 듣는 게 편합니다. 정보가 한정된 상황인데 하나라도 더 들어야죠.”
“정원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하죠, 뭐. 일단 지금은 체크인부터 하고요.”
정원이라고 당장 이 짐을 들고 보고하러 가는 강행군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잠자코 석주의 뒤를 따랐다.
공항 근처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번 임무 장소는 노른. 지중해에 자리한 섬나라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 덕에 관광 명소로 유명한 국가였다. 사람이 많은 건 그 탓이리라.
택시를 잡는 석주의 옆에서, 정원은 활기를 띠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별생각 없이 돌아보았다. 그러던 정원의 시선이 문득 바닥에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는 노인에게서 멈췄다. 그는 특이하게 생긴 모양의 과일 사탕을 팔고 있었다.
“먹고 싶어요?”
정신이 없어 보이기에 이쪽은 보지도 못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석주가 귀신같이 질문을 던져 왔다. 놀란 정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뇨. 단 건 안 먹습니다.”
“싫어하는 거예요, 안 먹는 거예요?”
“둘이 많이 다른가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 먹지 않는 것이었다. 그 부분을 정확하게 찔린 탓에 당혹스러웠지만 대충 질문으로 얼버무렸다. 석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의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선 탓이었다.
정원은 석주가 영어가 아닌 노른어로 택시 기사와 대화하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독특하게도 이 나라는 높은 빌딩 숲과 목가적인 분위기의 주택들이 겨우 몇 블록 거리를 두고 섞여 있었다. 여행을 온 것이 아니었기에 감상에 빠지지 않으려 했지만, 처음 보는 외국의 길거리는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호텔까지 오는 길에도 신기한 것은 많았지만, 정원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방의 크기였다.
“방이 너무 넓네요.”
“방이 넓은데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요. 침대 좁은 게 편해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요.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럴 리가요. 잘못된 거라고 해도 줬다 뺏기야 하겠어요?”
석주는 정원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다. 뭔가 오차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출장이 있을 때 정원은 항상 혼자 숙소를 썼고, 그럴 때 방은 더블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크기가 고작이었다. 딱히 그 사실에 불만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남과 같은 공간을 쓰는 게 싫었기에 혼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것이다. 지금도 객실 하나를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워낙 넓어 공간 분리가 될 테니 그 점은 좀 나았다.
석주의 반응을 보면 그는 이런 일이 낯설지 않은 모양이었다. 관장이 어쩐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일 때부터 알아봤지만, 역시 S급 에스퍼는 대우부터 다르다는 건가.
“어디 쓸래요? 편한 방으로 골라요.”
정원은 떨떠름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와 보는 호텔 스위트룸은 거실과 다이닝룸 등의 공용 공간과 별개로 침실만 두 개가 더 있고, 침실마다 킹사이즈는 족히 됨직한 침대가 하나씩 있는 지나치게 호화로운 구조였다. 어차피 임무 때문에 종일 나다녀야 할 텐데, 거의 잘 때만 쓸 방이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나.
“저는……. 제가 바깥쪽 방 쓰겠습니다.”
고민 끝에 결정했다. 가이드에게는 담당 에스퍼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보호할 의무가 있었기에, 그 사실을 의식하고 한 말이었다. 석주도 그 속내를 알아차린 건지 정원을 놀리듯 짧게 웃었다.
“신경 써 주는 거예요? 고맙게.”
“…저도 강석주 씨가 웬만해서는 공격당할 일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냥 그게 제 일이니까 그런 것뿐이에요.”
“네, 알아요. 굳이 그렇게 방어적으로 나오지 않으셔도.”
본인이 먼저 놀리듯 굴어 놓고 점잖은 척하긴. 흘겨보자 그는 더욱 얄밉게 웃고 덧붙였다.
“그럼 전 안전한 안쪽 방으로 들어갈게요.”
사소하지만 감당하기 힘든 농담이었다. 상대가 에스퍼만 아니었더라면 있지도 않은 장난꾸러기 조카를 떠올리며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에스퍼 중에서도 S급 에스퍼인 탓에 귀엽다거나 난감한 게 아니라 경계심이 들었다.
안쪽 방으로 쏙 들어가는 석주의 뒷모습을 잠시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구와 조금 더 가까운 바깥쪽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금세 깔끔하게 정리한 짐과 침대를 내려다보며 정원은 생각에 잠겼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이 들었다.
그러나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본부 측에서는 ‘강석주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된다.’라며 이번 일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고, 강석주는 지부에 들러 도착했음을 보고하고 임무 내용을 전달받는 간단한 절차에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장 정원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금 정원은 너무 피곤했다. 홀린 듯 침대 위에 걸터앉자 간신히 참고 있던 피로가 머리를 녹이는 기분이었다. 정원은 마지 못하는 척 몸을 뉘었다.
순식간에 수마가 밀려왔다.
* * *
이 꿈은 항상 같은 장면으로 시작한다.
좁고 어둡고 먼지 냄새가 나는 방. 소란스러운 느낌 때문에 잠에서 깨지만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에 문을 열고 나와 보면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항상 같은 전개다. 부모님을 부르고, 형을 부르고,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 남자’와 마주친다.
다음으로는 자신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웃는 그에게 목이 졸리고…….
오늘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허공으로 몸이 들어 올려졌다. 억센 아귀힘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쳐도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풀려났더라? 풀려났던 것은 맞나?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꿈이 아니라면? 이대로 목이 졸려 죽게 된다면? 부모님은 어디로 갔지? 형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리던 때 낭랑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안 돼, 형!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정해진 결말을 다시 제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