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형, 형, 형.
형은 안 돼. 형은 도망쳐야 돼.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형은…….
몸부림을 쳐 봤지만 한마디도 닿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나타나지 말지! 목이 콱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 너무나 무기력했다. 꿈이 주는 착각 때문인지, 형은 이 이질적이고 충격적인 광경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기물을 보듯 건조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볼 뿐이다. 남자는 다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놓았다. 풀려난 작은 몸이 짐짝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남자는 큰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형이 서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안 돼.
가지 마.
가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막힌 소리가 비집어 나오는 입을 간신히 벌려 애타게 애원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질질 끌어 남자를 잡기 위해 다가갔다. 엉금엉금 기고, 기고, 기다가……. 무언가 몸에 부딪히는 감각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
그러나 돌려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눈을 돌린 자리에는, 피로 뒤덮인 채 싸늘하게 식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있었다.
* * *
“안 돼! 안 돼! 아아악!”
몸부림을 치며 자리에서 튕겨 올랐다. 발작하는 사람처럼 경련하는 몸은 좀처럼 진정될 줄 몰랐다. 꿈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얼추 느끼고 있음에도 입에서는 자꾸만 끔찍한 비명이 흘러 나왔다.
“싫어. 싫어…….”
“정원 씨.”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정원의 귀에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원은 변함없이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흐느낌처럼 들리는 중얼거림에 상대의 목소리도 점차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정원 씨? 정원 씨, 정신 차려 봐요.”
“흐으…….”
“이제 괜찮아요. 그건 그냥 꿈이었을 뿐이고…….”
비명과 중얼거림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정원은 희게 질린 얼굴로 괴로움을 억눌러 참듯 몇 차례 숨을 삼켰다. 거칠게 몰아쉬던 숨이 점차 옅은 헐떡거림으로 변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석주가 차분한 음성으로 정원을 다독였다.
간헐적으로 몸을 떨던 정원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발작하듯 날뛰던 기세는 가라앉았으나 눈은 여전히 멍하게 풀린 상태였다. 혼곤한 눈동자에 석주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그 눈을 마주 본 정원은 초점이 돌아오지 않은 눈동자를 크게 확장시켰다. 입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손……. 손 치워. 나한테서 손 치워! 저리 꺼져!”
진정하는 듯싶던 정원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다시 발악하기 시작했다. 거칠게 다리를 굴러 자신에게서 석주를 떼어낸 뒤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고, 머지않아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헛구역질을 했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진정해 봐요, 정원 씨.”
석주는 곧장 정원에게서 물러난 뒤, 침착하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건드릴 생각이 없다는 명확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대로 몇 걸음을 떨어져 난감한 기색으로 정원을 내려다보았지만, 정원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건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꺼져. 제발……. 이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발악으로 시작했던 말이 꺼질 듯한 속삭임으로 잦아들었다. 꿈에서 본, 정원이 아는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에스퍼의 것과… 너무나 비슷한 색으로 빛나고 있는 눈동자. 정원은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흘리며 한동안 얼굴을 들지 않았다.
“정원 씨.”
한참이 지난 뒤에야 정원의 숨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석주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정원은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거리를 유지한 채 가만히 서 있던 강석주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기분이었다. 조금 전 무슨 추태를 부렸는지 기억을 되살리자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정원은 마른세수를 하며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힘겹게 연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소리를 하도 질러댄 탓이리라. 얼굴을 들지 않은 채 겨우 말을 마무리했다.
“나쁜 꿈을 꿔서.”
이렇게 표현하니 보잘것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번 임무를 받기 전에는 한동안 꾼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종종 몸이 피곤할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면 꾸곤 했던 꿈이니 꾼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남에게 이런 모습을 들킨 적은 없었다.
깨운 사람이 강석주가 아니었다면 좀 나았을까. 적어도 눈을 마주쳤다고 이런 소동을 벌이지는 않았으리라. 수치심과 낭패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정원을 보며 강석주는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뭘 사과해요? 그거야 함부로 들어온 제 잘못이죠.”
“…….”
“웬만하면 자게 두려고 했는데 무슨 목소리가 들려서. 상태가 안 좋은 것 같길래 들어왔어요. 미안해요.”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사과가 당혹스러워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고 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다가 다물었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원은 한참 망설였다. 이렇게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의문을 넘기기 힘들었다.
“…혹시 말입니다.”
“네, 얘기해요.”
“제가 이런 거… 처음이 아닌가요?”
말끝이 어색하게 올라갔다.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석주는 원래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 사람 같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사람이라기에는 너무 침착했다. 아마 잘못 짚은 거라면 입을 다무는 게 아니라 무슨 소리냐고 반응했을 것이다. 슬쩍 눈을 들어 얼굴을 살피니 석주는 아리송한 무표정이었다.
맞구나.
처음이 아닌 것이다.
짚이는 구석은 하나였다. 그날 강석주의 집에서 잠들었을 때. 그때도 비슷한 꿈을 꾸고…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 모양이다. 제법 취해서 꿈은 꾸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그때 강석주가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굴었던 것도 이것 때문이리라. 무슨 일이 있기는 했던 것이다. 자지 않았을 뿐, 잔 것보다 더 난감한 일이.
왜 숨겼을까?
차라리 그냥 말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그걸 강석주의 배려라고 생각하면 고맙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껄끄러웠다. 빚지는 기분을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정원은 우선 감사 인사를 했다.
“깨워 줘서 고맙습니다. 아니었으면 지금도 악몽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듣고도 석주가 더 설명하거나 그때 일을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므로, 정원 역시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덕분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먼저 화제를 돌린 건 석주였다.
“룸서비스 시킬 건데, 같이 먹을래요?”
“괜찮습니다. 전 강석주 씨 자는 동안 기내식도 먹었으니까요.”
“그게 벌써 언젠데요. 다 꺼졌을 텐데. 밤에 고생하지 말고 뭐라도 먹어요.”
석주는 더 이상 괜찮다고 사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권유가 아니라 통보였던 모양이다. 입맛은 조금도 돌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수치심과, 지난번에도 이런 꼴을 보고도 덮어 줬다는 점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에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럼 저는 간단하게 샌드위치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석주가 알았다며 룸서비스를 시키러 간 사이, 정원은 넋이 나간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이 꿈을 꾸기 시작한 데에는 오랜만에 테프트 사장의 소식을 들은 탓도 있을 것이고, S급 에스퍼인 강석주를 보며 자꾸 그 남자를 겹쳐 보는 탓도 있을 것이다.
원래 남에게 심하게 벽을 세우는 정원이지만, 석주에게는 유난히 그 정도가 심했다.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러게 됐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룸서비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정원은 자신을 부르는 석주의 목소리에 느릿느릿 발을 끌며 응접실로 나왔다.
“내일 가겠다는 생각은 그대로예요?”
오믈렛을 먹으며 석주가 물었다. 돌 씹는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뜯어먹던 정원이 힐끗 고개를 들었다.
“허가증도 받아야 하니까요.”
“보내 달라고 하면 보내 줄 텐데?”
에스퍼나 가이드가 타 지역에서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허가증이 필요했다. 타국이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관할 지부에 따라 허가증을 요구하는 곳이 있어서, 정원도 허가증을 꽤 자주 발급받아 보았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 직접 가서 수령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게 매뉴얼이었다.
듣자 하니 석주는 지침을 무시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는데, 그래도 괜찮았던 것은 아마 그가 S급 에스퍼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국가기관 소속 S급이라고는 하지만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는 대우의 격차가 있다. 그리고 정원은 가이드 중에서도 국가기관의 노예라고 불리는 이였다. 그와 자신은 입장부터가 달랐다.
“또 지부에 들러 봤자 쓸데없는 얘기만 듣고 짜증내면서 나오게 될 텐데.”
“그래도…….”
정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지침을 어길 수는 없지만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시말서를 쓰더라도 그의 주장을 따르는 게 나을까.
“이번에도 정색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곤란한 표정을 짓고 그래요……. 같이 갈게요.”
그러나 의외로 먼저 숙이고 들어온 것은 석주 쪽이었다.
“걱정돼서 한 말이지 어깃장 놓을 생각은 없어요.”
“아…….”
“마저 먹어요. 표정 풀면 더 좋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샌드위치에 얼굴을 박았다. 분명 마음이 놓여야 할 상황인데, 어쩐지 전보다 더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체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