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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15화 (15/126)

15.

주의를 끌겠다더니, 주위를 터뜨려 버릴 생각인가? 무슨 짓을 한 거냐는 표정으로 석주를 돌아보자 그는 태연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소리만 요란했지 별거 아니에요.’

당장 확인할 길도 없으니 믿는 수밖에.

어쨌거나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에스퍼 둘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곧 석주의 예상대로 한 명만이 일어나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갔다.

정원은 석주가 고갯짓으로 보낸 신호에 맞춰 남아 있는 한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기척을 느끼고 돌아볼 줄 알았는데, 정신이 팔린 탓인지 아니면 석주가 뭔가 손을 쓴 것인지 바로 뒤까지 갔을 때에도 반응이 없었다.

손을 뻗어 목을 쥐었을 때 비로소 에스퍼가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정원의 가이딩이 훨씬 더 빨랐다. 그는 정원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잠이 들어 버렸다. 한순간에 기운을 쏟아 부었는데도 기력 소모가 심하지는 않은 걸 보니 기껏해야 C급 정도 되는 에스퍼였던 것 같았다.

그가 곯아떨어진 것을 확인한 정원과 석주는 소리를 죽인 채 줄을 넘어갔다. 다른 한 명이 돌아오기 전에 빠르게 현장을 살펴야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닥에 기하학적인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기현상이 일어난 자리에 남는 증거였다. 정원은 소리가 나지 않는 카메라 어플로 문양을 찍었다. 그사이 석주는 땅을 짚은 채 갈라진 곳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이드인 정원은 석주가 뭘 그렇게 유심히 살피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마 ‘기현상’이라고 불리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에스퍼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 기현상이라는 게 뭐냐고 물어보면 정원은 화산 폭발과 비슷한 것이라고 설명할 터였다. 특정한 조건이 만족되면 마그마가 생성되고, 그 마그마가 임계점을 넘으면 지표면을 뚫고 나와 폭발하듯 기현상의 발생 원리 역시 흡사했다.

어떤 장소에 모종의 이유로 기현상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쌓이게 되면, 어느 순간 그것이 폭발해 이상 현상을 일으킨다. 그 현상은 괴생명체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자연재해와 비슷하게 나타날 때도 있다.

다만 일반적인 자연재해와 달리 기현상이 일어난 곳에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문양’이 나타나므로 이를 에스퍼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했던 자연 현상과 분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현상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알려진 것 중 가장 인상적인 사실은 기현상의 원인이 되는 에너지가 에스퍼가 가지고 태어나는 기운과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퍼 중에는 기현상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이들이 있었고, 이를 악용해 테러를 일으키고 다니는 집단도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 판국이니 에스퍼만이 알 수 있는 게 있을 터다. 그렇기에 석주를 잠자코 기다렸지만, 시간이 길어지니 재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살펴볼 게 남았나요?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 돌아오는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미적거리던 석주가 곧 몸을 일으키더니 정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큼 다가와 정원을 붙들고 뛰기 시작했다. 무슨 삼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미로 같은 골목을 요리조리 누비다가 겨우 발을 멈췄다. 손목을 단단히 잡힌 채로 달리던 정원은 그제야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이렇게까지 멀리 도망칠 필요가 있었나요…….”

“이 근처에 둘러볼 만한 가게가 꽤 있어요.”

“네?”

“관광 명소가 있거든요. 근처에 볼 만한 가게가 많아요.”

헉헉거리며 뱉은 말에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황당해서 다시 물은 것이었는데, 석주는 친절하게도 했던 말을 구체적으로 풀어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어쩌자고?

관광 명소를 구경하러 가자고?

그리고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한 이 의문은 사실이었다.

석주가 정원을 데려간 곳은 오래된 분위기의 기념품점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기념품들은 기념품보다는 골동품에 가깝지 않나 싶을 만큼 앤틱한 멋이 있었다.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을 것이다.

물론 정원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가게에 들어와서도 기념품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석주의 뒷모습을 황당한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일이 빠르게 풀릴 것 같지 않으니 관광을 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겠다는 건가. 혹시나 뭔가 일과 관련해 생각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인가 싶었지만, 주인과 하등 쓸데없어 보이는 대화를 나누며 하하 호호 웃는 모습을 보면 숨은 저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 같았다.

“이거 어때요?”

그때 석주가 이상한 도자기 인형을 손에 들고 정원에게 물었다. 말 그대로 이상하게 생긴 인형이었다. 무슨 동물을 본뜬 것인지 알아볼 수도 없는 찌그러진 얼굴에 짧은 몸통과 꼬리가 기묘하고 하찮았다.

설마 저게 정말 좋다고 생각해서 보여주는 건가. 그렇다고 하면 본인은 미적인 기준에 제대로 부합하는 얼굴을 가졌으면서, 미술품을 보는 안목은 부족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장난을 치려는 생각이거나. 정원은 진심이라고는 1g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호응했다.

“아주 멋지네요. 특히 꼬리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그래요?”

밝은 목소리로 대답한 석주는 가게 주인과 다시 몇 마디 대화하더니, 정말로 그 기묘한 인형을 샀다. 그 모습을 당황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정원의 품에 곧 못생긴 인형이 안겨졌다.

“…저보고 들라는 건가요?”

“선물인데요? 정원 씨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역시 장난하자는 뜻이었나. 사람을 놀리기 위해 이런 쓸데없는 지출을 감수하다니. 아무리 돈 많은 S급 에스퍼라도 낭비를 일삼지는 말라는 잔소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데 석주의 표정은 좋은 선물을 줄 수 있어서 기쁘다는 듯 뿌듯해 보였다. 연기 같지는 않고… 진심인 건가. 결국 정원은 떨떠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고맙다 대답한 뒤 기묘한 인형을 품에 안았다.

이 사람… 정말로 관광을 하려고 온 건가.

신뢰받는 S급 에스퍼가 그렇게 생각 없이 움직이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저항 없이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였다.

그러나 아무 설명도 없이 계속해서 쇼핑만 하는 모습을 보니 긴가민가했다. 네 번째 가게에 들어갔을 때쯤, 결국 참다못한 정원이 물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겁니까? 여기 가게들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정원 씨가 생각하기에, 이 상가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황당한 동문서답이었다. 정원은 잠시 멈칫했다. 그는 여기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고 물을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답은 짧은 고민 끝에 신중하게 나왔다.

“무슨 방법을 쓰냐에 따라 다르겠죠.”

“그럼 제일 빠른 방법이 뭐라고 생각해요?”

“음……. 겁을 주는 게 아닐까요. 안내 방송 같은 걸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시간이 오래 걸릴 테고. 불이야, 같은 말이 나오면 다들 나가려고 난리가 날 테니까 그게 제일 빠르겠죠.”

먼저 대답부터 내놓은 뒤, 뒤늦게 질문했다.

“무슨 수수께끼 같은 건가요? 지금 그게 중요한 이유라도 있나요.”

혹시나 싶어 열심히 대답했던 건데, 만약 실없는 이유로 물었던 거라면 더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석주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통보했다.

“그럼 불을 낼 테니까 ‘불이야’ 하고 소리치는 건 정원 씨가 해 주세요.”

“예?”

문제는 그 내용이 아주 위험한 방향이었다는 것. 말릴 겨를도 없었다. 석주는 몸을 쭉 펴더니 발을 세게 한 번 굴렀다. 능력을 쓴 건가 싶어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바로 눈에 보이는 변화는 보이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정원이 ‘불이야!’ 하는 말을 외칠 필요는 없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불이야!”

“폭발이야!”

“꺼지질 않아! 도망쳐!”

무슨 짓을 한 건지 알 만 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일어난 화재와 폭발에 놀라 불을 끄려 하는 듯했다. 그러나 에스퍼가 능력을 이용해 낸 불은 같은 에스퍼의 능력이 아니면 꺼지지 않는다. 결국 모든 사람이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것을 보던 정원이 질책하듯 석주를 돌아보았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해명했다.

“사람 다치게 하는 불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그건 압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설마 여기서 살상력이 있는 불을 내지는 않았을 테고, 당연히 위협용이어야 했다. 당연한 소리를 해명이랍시고 하는 석주를 노려보았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설명은 해 줬어야죠!”

답지 않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래도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사람들은 거의 다 상가를 빠져나갔다. 사람들로 붐비던 광장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

석주는 슬쩍 정원에게서 눈을 돌리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시간에 맞췄네요.”

“뭘 맞췄다는…….”

그 순간 땅이 갈라졌다.

의아하게 중얼거리던 정원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강석주가 한 짓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긴장된 심정으로 갈라지는 땅을 주시했다. 땅속에서 검은 형상이 꿈틀꿈틀 솟아올랐다. 용처럼 길고 기괴한 모습의 괴생명체. 괴물이라면 이제껏 수없이 보아 왔는데, 그런데도 지금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정원은 질린 얼굴로 석주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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