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머리만 내밀었을 뿐인데 벌써 정원의 허리까지 오는 크기였다. 며칠 전 봤던 진돗개 괴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통 이 정도 크기의 괴물을 처리하려면 B급 이상의 에스퍼가 최소한 열 명은 달라붙어야 했다. 그마저도 B급만으로는 안 되고 A급이 몇 명이나마 섞여 있을 때의 얘기였다.
그러나 돌아본 석주는 기이할 만큼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S급 중에서도 격이 다른 이라서, 저것을 보고도 위압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 것일까. 이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태연한 석주를 보니 마음이 한결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역시 용 머리 괴물의 음산한 기운 때문에 안심은 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소리를 낮춰 물었다.
“괜찮은 겁니까?”
“뭐가요?”
석주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정원에게 여기 가만히 있으라며 당부하고는 갈라지는 땅 쪽으로 다가섰다. 정원은 얼음처럼 굳은 채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건, 그리고 지금도 저렇게 평온하다는 건 역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어떻게? 예지 능력이 있는 에스퍼가 아니고서야 기현상을 미리 감지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던가. 최소한 정원이 아는 한은 그랬다. 여러 가지 이능력을 가졌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석주에게 예지 능력까지 있는 것일까?
당장은 그것보다 석주가 저 괴물을 어떻게 상대할지가 문제였다. 싸움에 꽤나 긴장감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정원의 예상은 순식간에 엇나갔다.
싱거울 정도였다. 한 걸음 한 걸음에 힘을 싣고 있는 것인지, 석주가 발을 옮길 때마다 벌어졌던 땅이 입을 다물었다. 주위 공기가 스산해졌다. 그 감각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려니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평상시보다 훨씬 노골적인 에스퍼의 기운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석주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고개를 내밀었던 괴물이 점점 작아지고 있는 듯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석주는 마침내 용은커녕 해마만큼 작아진 괴물을 발로 꾹 밟아 없앴다. 그러더니 바닥을 살펴 문양이 새겨진 곳을 찾곤, 그 앞에 무릎을 접어 쭈그리듯 앉았다.
“정원 씨. 이리 와 봐요.”
그 말에 순순히 따르려니 여러 가지로 마음이 거북했지만, 이번에도 그 말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석주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어딘가 익숙한 문양이었다.
“아까 거기서 본 거랑 비슷하죠?”
“맞네요.”
같은 에스퍼가 일으킨 기현상일 경우 남는 문양의 형태도 유사했다. 이것만 보고도 같은 집단이 고의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테프트는 정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며 사건을 덮어 두었던 것이다.
“일단 현장에서 본 적 없는 에스퍼인 것 같긴 해요.”
“신입 테러리스트인가 보네요. 무늬가 비슷하다는 건 한 명이라는 뜻일까요?”
이렇게 규모 있는 사건을 한 명이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석주 역시 정원의 생각대로 고개를 저었다.
“여러 명이 같이 움직이는 건 확실해요. 여기 개입한 것만도 한둘이 아니고.”
“혼자 했다기에는 기현상 규모가 꽤 컸죠.”
“여기 땅 가른 사람은 대지 쪽일 테고, A급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대지 관련 에스퍼 중에 A급으로 등록된 사람을 찾아볼까요.”
“그래요. 등록돼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테러리스트의 경우 국가에 등록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그런 방식으로는 찾아내기 힘들었다.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우선 대답하기는 했지만,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정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여기서 기현상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 오신 거죠.”
“뭐……. 예측은 했죠.”
“어떻게 아신 겁니까?”
“음, 이게 어떻게냐고 하면 설명하기 어려운데요.
석주는 그러더니 말을 흐리듯 빙긋 웃기만 했다. 대체 뭘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 거지. 당장 더 구체적인 부분을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걸 궁금해 할 때는 아니었다.
정원은 우선 석주의 얼굴을 살폈다. 힘을 쓴 직후임에도 석주의 표정은 평소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고, 먼저 가이딩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기력 소모가 없을 리는 없는데. 결국 잠시 고민하던 정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보이지 않아요?”
이렇게 대답하니 다음 말을 꺼내기가 머쓱했다. 하지만 정원은 가이드의 본분을 되새기며 민망함을 참아 냈다. 그러기 위해서 함께 파견된 것이 아닌가.
“가이딩이 필요할 것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아하.”
담담하게 대답한 석주가 소매를 걷으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럼 해 줄래요?”
손목을 통해 가이딩을 하는 것은 노골적인 신체 접촉 없이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식이었다. 다만 방금 전 석주가 혼자 힘으로 현장을 처리하는 모습을 본 뒤라 과연 이걸로 충분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능력 소모가 컸다면 조금 더 심도 있는 가이딩이 필요할 텐데.
하지만 석주는 가이딩을 해 달라 말하는 지금도 전혀 지치거나 힘든 기색이 없었다. 정원은 우선 평소 하던 것처럼 그의 손목을 쥐고 가이딩을 시도했다.
순간 영혼이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가이딩을 시작하자마자 기력이 쭉 빠지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그동안 상대했던 다른 에스퍼들과 비교하면 마치 블랙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정원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그의 기운이 안정된 것을 느꼈다. 그 말은 이 일을 해결하는 데 그가 힘을 거의 쏟아 붓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에스퍼이지만 기현상을 해결하는 데에는 일반적인 상식 이상의 힘이 필요했다. 예컨대, 강한 에스퍼는 아무렇지 않게 지진을 일으킬 수 있지만 기현상으로 인해 발생한 지진을 막으려면 상당한 기력을 소모해야 했다. 같은 에스퍼를 상대로 싸워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조그마한 괴물 상대로 여러 명의 에스퍼가 달라붙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초능력을 사용하고 능력의 종류도 한 가지가 아니며 이 현상을 해결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강석주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여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석주는 자신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모든 일을 해결하려 했다. 덕분에 정원은 영문도 모르고 이상한 기념품점에 끌려 다니다가 사건을 맞닥뜨리게 됐다.
그러나 석주는 그 혼자만의 힘으로도 너끈히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리라.
사실 현장에서 정원이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에스퍼를 보조하는 것이었으므로, 강석주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 방식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화를 내는 대신 약간의 짜증으로 물들었던 표정을 완벽하게 갈무리했다.
그런데 먼저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석주였다.
“왜 화가 났어요?”
“아닙니다. 상태는 좀 괜찮으신가요? 불편하신 부분은 없고요?”
“화난 거 맞잖아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제 표정이 어떻다는 건가요?”
“왜 화가 난 거예요?”
석주는 앵무새같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질리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는 무언의 추궁에 결국 대답하고 말았다.
“그걸 몰라서 물으시나요?”
“몰라서 물어보는 거예요. 화난 이유가 있다면 가르쳐 줬으면 좋겠는데요.”
놀리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을 제멋대로 끌고 다녀놓고, 저렇게 심각한 얼굴로 화난 이유를 물어보다니.
“정원 씨가 날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정말 모르겠거든요.”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석주가 덧붙인 말에 대한 대답은 바로 나왔다. 그를 싫어한다는 생각을 심어줘 봤자 좋을 게 하등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로 지금 이 시점에서 정원은 강석주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금 화내고 있잖아요.”
석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정원은 고민에 빠졌다. 평소의 그라면 이 시점에서 분란을 피하기 위해 ‘예민했다, 죄송하다’ 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민 끝에 결국 솔직히 대답하는 쪽을 선택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죠. 얘기는 해 주셔야 할 것 아니냐고요. 팀이지 않나요? 아무리 해결하는 쪽이 강석주 씨라고 해도 제가 상황을 알고 있어야 그에 맞는 대비를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뜬금없이 민간인을 모조리 쫓아내고 갑자기 능력을 사용하시면 곤란합니다. 물론 저도 제가 화낼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고, 강석주 씨가 제 도움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느끼신다 해도 이해하지만…….”
“그런 건 아니에요.”
빠르게 이어지는 정원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석주가 한순간 말을 끊었다.
“이해했어요, 무슨 말인지.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화낼 자격이 없다거나 도움이 필요 없다거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
“나 이런 쪽에 좀 서투르거든요. 일대일로 팀을 짜 본 것도 처음이고요. 다른 사람들은 말해 봤자 알아듣질 못하니까 작전 설명 같은 건 미리 안 하는 편이었어요. 브리핑을 잘하는 편도 아니고. 그리고 정원 씨 같은 경우에는… 말 안 해도 따라올 것 같았고, 설명보다 직접 보이는 게 빠를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어요.”
신중하게 대답하는 석주를 보고 있으면 이 말이 진심인지, 어디까지가 그의 진실한 모습인 건지 알 수가 없어진다. 정말로 정원을 배려하고자 하는 걸까. 하지만 정원은 여전히 종종 석주를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S급 에스퍼와 겹쳐 보고, 평소에도 그를 볼 때면 미약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그 말을 듣는 심정이 묘하게 당혹스러웠다. 정원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