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뇨,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어요. 흥분했던 거 사과드리겠습니다. 반영해 주신다면 감사하기야 하겠지만 편하신 대로 움직이셔도 괜찮습니다.”
빠르고 기계적인 말투였다. 각 잡힌 말을 한 귀로 흘리는 건지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석주가 갑자기 질문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도 돼요?”
“네? 네. 말씀하세요.”
“그럼 여태 나 경계했던 것도 같은 이유예요? 제멋대로 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정원이 살짝 흠칫했다. 자신이 그를 경계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기는 했지만 석주가 감이 나쁜 사람도 아니고, 알아차렸을 만도 했다. 그러나 직접 언급할 줄은 몰랐다.
불쾌했다는 건가?
그러나 오래 생각할수록 역효과였다. 정원은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만 너무 길지는 않게.
“그런 이유도 있죠.”
“그렇구나.”
석주는 그대로 납득한 것 같았다.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경직된 듯해 문제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석주가 갑자기 짐짓 딴전을 피우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더니 정원을 불렀다.
“정원 씨.”
“네?”
“힘썼더니 배고파요.”
“네?”
두 번의 ‘네?’은 어감이 완전히 달랐다. 첫 번째는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두 번째는 황당함이었다. 그러나 슬쩍 웃는 석주를 보니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부러 말을 돌려 준 건가, 싶어 납득이 갔다. 석주가 제안했다.
“여기서 밥 먹는 건 무리일 것 같고, 좀 떨어진 데 가서 식사하고 들어갈래요? 궁금한 거 다 대답해 줄게요. 다음 계획도 얘기하고.”
“다음 계획이요.”
“이러면 되는 거 맞죠.”
착각이겠지만… 그 순간에는 강석주가 신비로운 분위기의 속모를 에스퍼가 아니라, 착한 일을 하고 칭찬을 바라는 어린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 일은 정말 팀플레이가 서툴렀던 것뿐이고, 앞으로는 자신의 의견을 반영해 주려 하는 걸까.
그 의문에 대답하듯 석주가 한마디 덧붙였다.
“말했던 것 같은데. 정원 씨랑 잘 지내고 싶다고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특이한 에스퍼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정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 * *
“오늘따라 좀 사적인 감정이 섞인 것 같은데요.”
괴물을 자근자근 밟고 있는 석주를 보며 정원이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잖아요? 밥 먹다 나오는 바람에 기분이 좀 별로네요.”
기분이 별로라고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 담백한 표정이지 않나. 하지만 정원은 트집을 잡는 대신 픽 웃어 넘겼다.
그날 이후 정원은 석주에 관해 몰랐던 사실을 꽤나 많이 알게 되었다.
강석주는 예지 능력이 있어 기현상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른 에스퍼의 능력에 극도로 민감한 것이라고 했다. 단순히 상대를 보고 에스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능력이 대충 어떤 계열인지도 읽어낼 수 있고, 한 번 상대의 능력을 겪어 보면 그의 능력이 남기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이코메트리 같은 초능력의 일종인지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단순히 동물적인 직감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설명을 듣고도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한 건가’ 싶었다. 예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직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덕분에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전 그 징조를 눈치 채고 때맞춰 현장을 찾아갈 수 있었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강석주의 말대로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일이 일어나고 난 뒤 뒤늦게 현장에 개입해야 했다면 절차가 복잡했을 것이다. 테프트의 영향력 하에 있는 사기업들이 선수를 쳐 현장을 점거한 뒤였을 테니까.
그러나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전에 선수를 치면 그럴 염려가 없었다. 막 튀어나오기 시작한 괴물을 뚝딱 해치우고 문양을 처리한 뒤 자리를 뜨면 그만이었으니까.
그 후로 두 번의 기현상이 더 일어났다. 두 번 모두 미리 예측하는 데 성공한 덕분에 인명 피해 없이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만, 석주의 감은 항상 난데없는 타이밍에 발동했다. 갑자기 ‘이 근처 어디’라며 정원을 데리고 나와서 헤매다가 다시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이제 정확한 위치를 알 것 같다며 자리를 옮기는 식이었다.
남는 시간에는 항상 쓸데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근처에 있는 분수대를 구경한다거나, 유명 디저트 가게에 들러 디저트를 먹는다거나, 기념품점이 보이는 족족 들어가 그때 그 도자기 인형처럼 이상한 것을 사들인다거나.
이게 일하는 건지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싶으면서도…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두 사람 사이에도 점점 친밀감이 생기고 있었다. 에스퍼와 가까이 할 생각이 없는 정원으로서는 희한하면서도 난감한 일이었다.
“아, 힘들었다. 움직이다 체할 뻔했어요.”
“그런 표정이 아니신데요.”
석주의 너스레에 심드렁하게 반응해 주었다. 오늘은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밥을 먹던 도중 갑자기 뛰쳐나와야 했다. 비싼 밥을 포기한 덕분에 간신히 늦기 전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김없이 손쉽게 수습을 마친 석주에게 다가가 그의 소매를 걷어 주며, 정원이 조금 걱정스럽게 물었다.
“점점 현장을 찾아내기까지 타이밍이 느려지는 것 같지 않나요?”
수월한 와중 가지게 된 딱 하나의 걱정거리였다. 석주 역시 공감하는 듯 수긍했다.
“사실이에요. 빨리 들키지 않으려고 트랩을 복잡하게 까는 것 같아요. 전에 쓴 적 없던 에스퍼를 쓴다거나 하는 식으로?”
같은 에스퍼의 능력으로 기현상을 일으키면 나타나는 형상 역시 매번 비슷하다. 예컨대 지난번에 괴물이 나오는 기현상을 일으켰던 에스퍼가 다른 곳에서 다시 자신의 기운을 쏟아 부으면 그 자리에서도 비슷한 모습의 괴물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해 겪은 기현상은 매번 그 양상이 달랐다. 처음 본 현장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용 형상의 괴물이 튀어나왔는데, 그때와 달리 다른 곳에서는 지진이 일어나기도 했고 무지막지한 폭우가 쏟아진 적도 있었다.
오늘은 전에 본 것과 전혀 다른, 머리가 세 개 달린 사자같이 생긴 괴물을 빠르게 처리한 참이었다. 그럼에도 현장에 찍혀 있는 문양의 모양은 매번 비슷했다. 꼭 같은 집단이라는 걸 일부러 과시하는 것처럼.
“어째 일이… 빨리 풀릴 것 같지가 않네요?”
목적이 뭘까? 정원이 혼잣말처럼 심란하게 중얼거렸다. 석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더니 정원 쪽으로 손을 뻗어 미간을 꾹 눌러 주었다.
“벌써부터 사서 걱정하지는 말고요.”
바로 손을 치워냈어야 하는데, 그럴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그의 손을 끌어와 다시 손목을 붙들었다. 그 상태로 말없이 가이딩을 시작하자 그가 간지럼을 타는 사람처럼 웃었다. 평소에는 딱히 그런 내색이 없더니. 오늘따라 불편한가 싶어 손을 떼고 바라보았다.
석주는 재미있다는 듯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강하게 붙들린 탓에 붉은 손자국이 조금 난 손목을 정원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매번 이렇게 손목을 잡히니까 기분이 좀 이상해요. 봐요, 여기 이렇게 자국도 남는데. 수갑 같은 거 찼던 자국 같지 않아요?”
“그냥 손자국 같은데요. 어차피 금방 사라지지 않나요. 피부가 튼튼하셔서?”
수갑은 무슨. 누가 들어도 장난치듯 은근한 목소리였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대답을 하기는 했다. 석주는 장난일지 모르겠지만, 정원에게는 그러잖아도 신경이 쓰이던 부분이었다. 최근 일의 강도가 조금씩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가이딩 방식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다.
동맥이 지나는 자리라서인지 목이나 손목을 통해 가이딩을 하면 다른 부위에 비해 효과가 좋았다. 그러나 포옹이나 입맞춤이나 섹스 같은 스킨십과 비교하면 미미한 게 당연했다. 아무리 석주가 겉으로 태연해 보인다지만, 그가 요새 하고 있는 일은 일반적인 S급 에스퍼에게도 힘들 만 한 강도였다.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싫어서 하는 소리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까요. 안 그래도 점점 임무 강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서 고민하던 참입니다.”
“그냥 재밌어서 한 소리긴 한데. 그럼 다음부터는 안아줄래요?”
눈을 가늘게 뜬 석주가 농담인지 아닌지 모를 가벼운 투로 말했다. 정원은 그의 표정을 탐색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선선히 수긍하는 정원을 보며 석주가 낯설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황하는 반응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원은 정말로 그 말대로 할 의향이 있었다. 오히려 석주 본인 쪽에서 꺼릴 줄 알았더니 의외의 발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농담이에요.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죠?”
“음… 날 불편해하니까?”
또 저 소리. 그걸 대놓고 말하는 점이 불편한 거라는 생각은 못 하나. 정원은 원래 껄끄러운 감정과 일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임무를 함께하는 동안 그를 향한 경계가 많이 누그러지기도 했다. 예컨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칠 수 있을 만큼.
“알면 그럴 게 아니라 더 노력하셔야죠.”
표정 없는 얼굴로 던진 말에 석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짧은 가이딩을 받은 뒤 그는 소매를 내리고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서있었다.
가이딩이 부족한 건가 싶어 괜히 다시 강석주의 기색을 살폈지만, 그는 신기할 만큼 혈색이 좋았다. 능력을 사용할 때에도 이 정도 현장은 버겁지 않다는 듯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말이다. 이런 규모의 현장을 연달아 처리하고 다니다 보면 기운이 빠질 만도 한데.
“먹다가 끊긴 게 신경 쓰이네. 배고프지 않아요?”
“아까 충분히 먹었습니다. 왜 자꾸 뭘 먹이려고 하세요?”
또 밥 얘기다. 중간에 나오기는 했지만 아까 식당에서 아예 먹지 못한 것도 아니고,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그 본인이 식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할 만큼 밥에 집착한다. 어이없다는 듯 묻자 석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한국인의 정이라고 어디서 들었거든요.”
농담인 건지 아니면 주워듣고 온 말을 진심으로 실천하는 건지. 가늘게 뜬 눈으로 석주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친해지고 싶어서라고 하실 생각인가요.”
석주는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그렇다는 뜻으로 들려서, 정원은 슬쩍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