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8화 (18/126)

18.

노트북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정원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사건 자체는 무사히 처리했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루빨리 테러 집단이 테프트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또 테프트의 사장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내고 싶은 정원으로서는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테프트가 워낙 접근하기 힘든 기업이라 더 문제였다. 물증이 없는 상황이지만, 조금만 접근이 쉬웠다면 심증만으로 어떻게든 파고들었을 텐데.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표정이 가관이네요, 정원 씨. 주름 생기겠어요.”

어느새 들어온 것인지 기척 없이 나타난 석주가 정원의 미간을 꾹 누르며 말을 걸었다. 그의 손길 탓에 찡그려져 있던 이마가 우스꽝스럽게 펴졌다.

“생겨도 상관없습니다. 손 치워 주세요.”

정원의 불퉁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석주가 노트북 쪽을 들여다봤다.

“봐도 돼요?”

“네. 벌써 보고 계시지 않나요.”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석주의 손을 떼어내려 했으나 그는 쉽게 밀려나 주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손길을 받아들이자, 석주는 그제야 떨어져 나갔다. 무슨 심보인지.

노트북 화면 마지막 줄에는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을 드러내듯 의미 없는 자음과 모음들이 쭉 늘어져 있었다. 그걸 본 석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짜증났어요? 나름 잘 해결하고 돌아와서 이러고 있을 줄 몰랐는데.”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일에 진전이 없네요.”

새삼스럽게 부정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임무를 해결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이 정도 성과에 충분히 만족했겠지만, 정원이 바라는 건 따로 있었으니까.

“원래 이런 임무는 시간을 오래 두고 파야 돼요. 조급하게 나서면 일이 더 어려워져요. 우리가 이 일에 너무 관심이 많다는 티를 내면 저쪽에서도 머리를 숨기거든요.”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느긋해 보이는 석주를 보고도 불만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좀 덜 조급해져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게 뜻대로 안 돼서요. 마음이 급하네요.”

차분하게 달래는 말에 한숨으로 대꾸하자, 석주는 낮게 웃으며 정원의 옆에 앉았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그가 주머니에서 제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정원 쪽으로 내밀었다.

“그런 정원 씨한테 좋은 소식이 있어요.”

이건 꼭 기다렸다는 듯한 타이밍이었다. 정원은 핸드폰 화면에 적힌 글씨를 입으로 소리 내어 읽었다.

“테프트 주관… 신입사원 공개모집 설명회?”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건 확실히 좋은 소식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만한 이야기였다. 일단 ‘테프트 주관’이라는 부분만 봐도. 순식간에 집중해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유독 눈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모든 참가자가 의무로 가면을 써야 된다는 건 무슨 소린가요?”

‘가면 지참 필수’. 테프트가 공개 설명회를 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기한데, 생전 처음 보는 조건이 붙어 있어서 더 의아했다.

“정확히는 설명회 겸 파티라고 하더라고요. 가면무도회 같은 형식이 될 거라던데.”

“설명회면 설명회고 파티면 파티지… 알 수가 없네요. 애초에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요.”

“이상하죠? 또 특이한 게, 일반인한테도 개방을 하려나 봐요.”

에스퍼와 가이드를 전문으로 키우는 사기업 중에는 소속이 없거나 이직을 생각하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여는 곳이 제법 많았다. 새 직원을 맞아들일 목적이기도 했고, 기업의 건재한 이미지를 과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테프트는 달랐다. 원래 직원을 공개적으로 모집하지 않기로 유명한 기업이었다. 회사 소속 스카우터 -유튜버 에스퍼레소 같은- 가 장래가 유망한 에스퍼와 가이드에게 비밀리에 스카웃 제의를 하는 식으로 모든 채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국 본사에서도 하지 않던 설명회를 타지에서 하는 걸로도 모자라,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비능력자 일반인도 참석이 가능하게끔 독특한 형식을 취하다니.

“그 회사 사람들이 일반인 신입사원을 쌍수 들고 반기지는 않을 텐데.”

에스퍼 중에는 가이드를 자신들보다 하등하게 여기는 이도 적지 않았는데, 하물며 비능력자를 대하는 태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테프트는 자사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강한 편이라 비능력자를 배척하는 경향이 더 심했다. 일반인에게도 설명회를 개방하겠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테프트가 이 근처에 건물 짓고 있었던 거 알아요?”

“들어봤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완공됐는데, 그 기념인 모양이에요.”

생각에 잠긴 정원에게 석주가 설명해 주었다. 완공을 자랑하기 위해 설명회와 파티를 연다는 것 자체는 납득이 가는 이유였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정원이 단언했다.

“이상하네요.”

“타이밍이 너무 좋죠?”

석주도 동의하는 듯했다. 테프트의 덜미를 잡을 기회라고 생각하면 잘된 일이었지만, 타이밍이 너무나 적절해서 왠지 찝찝하기도 했다.

물론 찝찝하다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정원이 물었다.

“아무나 참석이 가능한 건가요? 그러면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릴 텐데요.”

“초대장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문제는 벌써 배부가 끝났다는 점?”

순간 황당했지만 잠시뿐이었다. 강석주가 자신을 우습게 만들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정말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구해 오세요.”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석주는 정원의 태연한 말에 당혹스러워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 네. 어떻게든 구해 오겠습니다.”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얼굴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배부가 끝난 상황이라니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뭔가 방법이 있으니까 한 말이겠지.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 *

얼마 안 가, 석주는 정말로 초대장을 구해 왔다.

“이거 보세요. 비능력자 표시.”

능력 보유자인지 아닌지를 초대장에까지 적어 놓은 것을 보니 역시 테프트답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석주가 내민 초대장 두 장에는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David와 John. 이걸 가명으로 써야 하나.

“일부러 비능력자용으로 구해 오신 건가요. 아니면 이것밖에 없었나요.”

“일부러죠.”

“하긴, 굳이 일반인에게도 입장을 허락한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신중하게 대답했다. 비능력자인 척하며 들어가면 테프트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과 석주가 그만큼 기운을 잘 숨기고 연기를 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5일 뒤인데, 그전까지 미리 준비해 둬야 할 게 있어요.”

“뭔가요.”

석주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예리하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를 보며 정원도 덩달아 몸을 굳혔다.

“무슨 가면을 쓸지 결정해야죠.”

“…….”

장난하자는 건가?

하지만 석주는 정말로 진지한 표정이었다.

물론 저런 얼굴로 장난을 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그냥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석주는 그 길로 정말 인터넷 쇼핑 삼매경에 빠졌다.

“이건 어때요?”

“공작새를 테마로 만들었다는데, 정원 씨랑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이건 강아지 모양인데 나름대로 귀엽네요. 아주 격식 있는 자리는 아니니까 이 정도도 괜찮을 것 같아요.”

자꾸만 이어지는 질문 공세는 황당하다 못해 난감할 지경이었다. 몇 번은 그냥 무시했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니 슬슬 걱정이 됐다. 강석주가 정말로 공작새 테마의 가면이나 강아지 모양 가면을 쓰고 나타날까 봐.

“일단 저는 눈에 띄는 것만 아니면 다 괜찮습니다. 이왕이면 수수할수록 좋겠죠. 특히 강석주 씨는 더.”

결국 침묵을 깨고 의견을 밝혔다. 석주는 모처럼 돌아온 대답에 특별히 반가워하는 기색 없이 묻기만 했다.

“나? 내가 왜요?”

“눈에 띄니까요. 최대한 가릴 생각을 해야지 공작새 같은 걸 보고 있으면 어떡해요?”

순진한 표정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덕분에 무심코 짜증 섞인 잔소리를 해 놓고 아차 싶어 석주를 돌아보았다. 새삼스럽게 이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몸에 밴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석주는 정원을 보며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저런 표정은 또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당혹스러웠다.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정원을 보며 석주는 거리낌 없이 거리를 좁혀 왔다. 가까운 거리에서 예의 그 웃음을 유지한 채, 석주가 손가락을 뻗었다. 미간을 꾹 누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잔소리는.”

“…….”

“내 얼굴이 그렇게 눈에 띄어요? 이 얼굴이 정원 씨 취향일 줄은 몰랐는데…….”

장난스럽게 풀어진 말투였다. 말끝이 필요 이상으로 녹진했다. 진심으로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너무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 본 탓인지 대놓고 단호하게 대꾸하거나 비웃을 수가 없었다.

“…헛소리 마시고 얼굴 좀 치워 주시죠?”

겨우 나온 대답에 석주의 얼굴은 더 진한 장난기로 물들었다. 완전히 본인의 말이 맞았다고 결론을 내려 버린 표정이었다. 의식하는 것처럼 대답해 버린 게 문제였을까……. 정원은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제가 보기엔 이 회색 가면이 제일 무난한 것 같네요.”

“재미없게 생겼네.”

“지금 저희가 놀러…….”

“놀러 가는 게 아니지 않느냐고요. 네, 네. 알겠어요, 아빠.”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원래 이렇게 농담을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가.

석주는 정원을 보고 눈을 접어 웃기만 했다. 목이 턱 막히는 기분에 시선을 돌렸다.

“무난한 걸로 고르기나 하세요. 아니면 당일에는 모르는 사람인 척하겠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잘 숨어들어가야 일이 풀릴 테니까요.”

싸늘한 말에 석주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모쪼록 그가 자신의 말을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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