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21화 (21/126)

21.

“왜요?”

“네?”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기는 했지만, 사실 질문이 나올 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테프트의 사장을 극도로 싫어하는 티를 내는 것보다는 그냥 아무 일 아니라며 넘어가는 편이 나았을 텐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까, 정원 씨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이렇게 명확하게 얘기한 건 처음 같기도 하고……. 특히 사람은요.”

그런 주제로는 석주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 잠자코 입을 다물었더니 석주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서 이유가 궁금한데. 이번 일에 이렇게 열심인 거랑도 관련 있어요?”

이걸 그에게 밝힐 이유가 있을까. 지나치게 사적인 부분이었고, 남에게 밝혀서는 안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충 뭉뚱그려 설명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마저도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 문제일 뿐이지.

그러나 만약 그가 신뢰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압박을 주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정원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꼭 얘기해야 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요.”

석주는 즉각 부정했다.

“모른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냥 정원 씨 개인적인 부분이 궁금했던 거죠.”

적극적으로 캐물었다면 더 반감이 들었을 텐데, 아니라서 침착하게 답할 수 있었다.

“싫어하는 사람 얘기를 같이 하는 게 친밀해지는 방법이라고들 하더라고요.”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석주가 언젠가 ‘이러면 친밀해질 수 있다던데요?’ 같은 말을 했던 것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에. 석주도 그 말을 연상했는지 묘한 눈으로 정원을 돌아보았다. 정원은 살짝 머쓱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꼭 그 방법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이걸 밝히지 않는 게 꼭 너랑 친해지기 싫어서는 아니다’라는 심정으로 한 말인데, 과연 이걸 석주가 곧이곧대로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그 말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웃는 얼굴로 몸을 바로 세우기는 했으니 다행이라고 보아야 할까.

남의 회사 설명회장에서 이런 대화를 하고 있으려니 묘하게 민망했다. 헛기침을 하며 정원 역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 * *

설명회는 끝날 때까지도 특별한 내용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사장에 대한 이야기는 자꾸만 나와 정원을 거슬리게 했다.

강연이 모두 끝난 뒤에는 마침내 에스퍼와 가이드, 그리고 비각성자를 각기 다른 방에 나누어 놓았다. 입사 시험 방식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라고. 괜히 같은 곳에 몰아 놓아 봤자 아까 같은 상황이 일어날 테니 그보다는 나을 것 같았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묘하게 찝찝했다.

여전히 비각성자 행세를 하고 있는 석주와 정원은 비각성자들이 모인 대기실로 배정을 받았다. 인원은 4~50명 정도. 강연 도중 듣기로는 오늘 참석 인원의 절반가량이 비각성자라는데, 총 인원이 백여 명쯤 되는 모양이었다.

대기실은 꼭 파티장 같은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장내에서는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가면을 쓰고 정장을 갖춘 사람들이 모여 서먹하게 떠드는 모습이 은근히 우스우면서도 낯선 느낌이었다.

아무 때나 집어먹어도 될 것 같은 핑거푸드가 놓여 있었지만 정원은 손도 대지 않았다. 석주 역시 그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이 광경이 꽤 재미있는 듯 흥미롭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때 정원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엇! 아까 봤던 분 아니에요?』

아까 에스퍼와 시비가 붙은 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 지나왔던, 노란 가면이었다. 그때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비능력자 일행과는 벌써 갈라진 모양이었다.

『아깐 갑자기 사라지셔서 당황했잖아요~』

혼자 사라졌다고 눈치를 주는 건가. 그런 말을 들을 만큼 가까운 사이긴커녕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를 무시하고 지나온 것은 사실이니 적당히 반응하기로 했다.

솔직히 피하고 싶었지만, 그가 어쩐지 계속 물어봐 달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하는 수 없이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아, 말도 마세요. 그 자식 그거 완전 또라이더라니까요.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다 자기들 덕분이니까 감사한 줄 알아야 된다나? 에스퍼들은 원래 다 생각하는 게 그 모양인 걸까요?』

『그러게요.』

노란 가면은 아까 그 에스퍼의 말에 적잖이 열받았는지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정원은 가이드인지라 비각성자만큼은 아니었지만, 에스퍼 중에는 가이드 알기도 우습게 아는 이들이 널렸기 때문에 그 심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솔직히 자기가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에스퍼였으면 이런 설명회 같은 데 와 있었겠어요? 진작에 테프트든 다른 유명한 기관이든 들어가서 활동했겠지.』

『정말 그러네요.』

동의하는 것과는 별개로 열심히 대답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대충 대꾸하는데도 계속 말을 걸 생각이 든다니.

『다들 테프트 사장을 좀 본받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건성으로 대꾸하던 정원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 설명회가 끝나 사장을 향한 칭송으로부터도 벗어났나 했더니, 여기에서까지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사실 다른 회사였으면 지원해 보겠다는 생각도 안 했을 거예요. 근데 테프트는 워낙 비각성자한테 잘해 주는 걸로 유명하기도 하고, 사장도 개인적으로 좀 호감이라 한번 지원해 봤던 거거든요. 정말 될 줄은 몰랐지만.』

『…….』

『근데 아무리 윗물이 맑아도 아랫물이 저 모양이면~ 설마 그 자식이 합격하지는 않겠죠? 그럼 진짜 짜증 날 것 같은데.』

노란 가면이 쯧쯧 혀를 찼다.

이번에도 그냥 ‘그러게요.’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정원은 아까부터 들은 ‘그’의 이야기에 적잖이 기분이 나빠진 상태였다. 괜히 한마디를 붙이게 된 데에는 그 탓이 클 터였다.

『글쎄요. 그 사람이라고 딱히 뭐가 다를까 싶네요.』

『그래도 오늘 그 설명회에서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꽤 괜찮은 사람 같던데요? 아까 그 자식 같은 타입이었으면 애초에 비각성자를 모집한다고 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모집한다고 말만 했을 뿐 아직 단 한 명의 비각성자도 고용하지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평판이 제법 후했다.

『사업가로서는 뛰어나도 실제로 인격적인 면에서 어떨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흠,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네요.』

정원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노란 가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덧붙였다.

『애초에 그 사람, 공식 석상에는 나오지도 않죠? 소문에는 뭐 어디 틀어박혀서 수련을 하고 있다는 것 같던데. 원래 에스퍼들은 그런 일도 흔한 걸까요? 무슨 소설에 나오는 얘기 같고 신기하더라고요.』

『그런가요.』

이쯤 되면 정원의 대답이 지독하게 성의 없다고 느낄 만도 한데, 노란 가면은 변함없이 꿋꿋했다. 그 뒤로는 취업에 대한 이야기가 몇 마디 오갔다. 정확히 말해 오갔다기보다는 노란 가면 쪽이 일방적으로 늘어놓은 것이었지만.

그리고 정원이 슬슬 이 대화에서 빠져나갈 타이밍을 잴 때쯤.

『근데……. 기분 탓인가요?』

실컷 떠들던 노란 가면이 문득 심각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전부터 뭔가, 왠지… 바닥이 좀 흔들리는 것 같은데.』

『…….』

정원은 무슨 소리냐거나, 잘 모르겠다거나 하는 대답을 차마 꺼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원 역시 그런 흔들림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쾅!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곧 건물을 통째로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순간 머리가 멍해질 정도였다. 얼굴을 확 찌푸리고 울리는 머리를 감싼 정원이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폭발음을 기점으로 건물은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주위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정원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 높여 외쳤다.

“강석… 데이비드!”

그러나 소리를 높인다 해도 이런 난리 통에 목소리가 쉽게 닿을 리 없었다. 낭패감에 얼굴을 찌푸린 정원이 입술을 잘게 씹었다.

“네, 정원 씨.”

그때 석주의 대답이 돌아왔다. 정원은 폭발음이 들렸을 때만큼이나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바로 옆에 선 그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음… 난리도 아니네요.”

이 광경을 보고 저렇게 단조로운 평가가 끝이라니. 그래도 그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현장에서는 도움이 되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안내 방송 드립니다. 현재 건물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테러 단체의 소행인 것으로 추측되며, 충격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니 참가자 여러분께서는 모두 이에 대비하여 안내를 따라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현재 건물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갑자기 흘러나오기 시작한 안내 방송을 주의 깊게 들은 정원이 석주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테러 단체라고 하는데요. 저 말이 진짜일지…….”

석주가 검지를 제 입가로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의아해서 입을 다문 정원은 곧 그가 다른 손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 눈을 돌렸다.

석주는 같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쭉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이상하지 않아요?”

의아한 듯 굴러가던 정원의 눈이 곧 커다랗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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