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정원이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움직이질 않네요.”
그 말대로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폭발음과 지진에 당황해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안내 방송이 끝나자마자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안정을 되찾은 거라고 하기에는 아예 입도 열지 않고 있어 이상했다.
석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정원은 바로 손을 가까이에 있던 노란 가면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제 말 들리시나요? 선생님?』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떠들던 노란 가면은 멍하니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의 마네킹처럼 굳어 버린 모습이었다. 몸이 느릿느릿 들썩이듯 움직이는 것을 보니 숨을 쉬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걸 제외하면 시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언가 봐서는 안 될, 또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목격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잠깐 멈춰요, 정원 씨.”
석주가 침착하게 입을 움직였다. 정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세를 굳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하지는 않아도, 남들 다 굳어 있는데 우리만 움직이는 걸 보이게 되면 좋을 게 없으니까요.”
“CCTV 천장 왼쪽 뒤편에 하나, 가운데에 하나, 오른쪽 앞편에 하나 있었습니다.”
정원이 즉각 대답했다. 석주는 원래 실내에 들어올 때마다 그걸 다 확인하냐며 픽 웃었다. 이내 와장창, 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CCTV의 잔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움직여도 된다는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정원은 노란 가면의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와 눈을 맞추어 보았다. 눈동자가 안개가 낀 것처럼 혼탁한 색이었다.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정원은 다시 홱 고개를 돌려 석주 쪽을 바라보았다. 석주 역시 어느새 주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건물의 요란스러운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기에, 정원은 비틀거리며 소리를 높였다.
“강석주 씨! 이 사람 세뇌당한 것 같은데요.”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예요. 눈이 완전히 맛이 갔어요.”
석주가 차분하게 받아쳤다. 그는 용케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정원은 아니었다. 드물게 평정이 깨졌고 초조함이 치밀었다.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멀쩡하던 사람 수십 명이 일제히 세뇌당해 굳어 있다고?
정원은 흔들리는 지반을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다. 평소처럼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렸다.
이제껏 세뇌를 능력으로 가진 정신계 에스퍼를 만나 보기는 했다. 정신계 능력은 기현상 현장에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기현상이 일어날 때 나타나는 괴물은 정신계 이능력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사람의 행동을 조종할 수도 있는 능력이므로 특수한 경우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다만 사용처가 조금 제한적이었다.
일단 인권문제로 인해 국가기관에서는 이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뜻을 펴기 어려웠다. 정원은 기관에서 세뇌 능력을 가진 에스퍼를 딱 두 명 봤는데, 그들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진상 민원인을 상대할 때. 심지어 그들은 실무부도 아닌 민원부 소속이었다. 난리를 치던 민원인도 그들을 만나면 멍하니 눈이 풀려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돌아가니 해당 부서에서는 에이스로 불렸지만, 사실 세뇌 능력씩이나 가지고 있으면서 민원인 상대 업무를 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본인보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정신 조작을 당할 여지가 있다며 꺼려하기 때문에 부러 드러내어 활동하지 않았다. 물론 테러 단체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고.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왜’ 이런 일을 벌였느냐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강한 세뇌 능력을 가졌다 해도 한 번에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세뇌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세뇌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대상에게 특정 행동을 해야 하는데, 이 행동은 ‘눈 맞추기’인 경우가 가장 많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손 잡기’라거나 ‘신체 일부 접촉하기’ 등 한 번에 여러 명을 상대로 취하기 힘든 동작이기 때문이었다.
“강석주 씨. 이런 능력 가진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이런 능력이라는 건?”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인원을 세뇌할 수 있는 에스퍼, 말입니다.”
석주의 대답은 평소처럼 바로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도 여유를 잃었다는 뜻일까.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마음이 급한 입장에서 조급해졌다.
“이렇게까지는……. 아뇨, 한 번도.”
겨우 나온 대답에 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게 에스퍼의 능력으로 설명이 가능한 범위일까요?”
“정신계 에스퍼 한 명이 이 정도 규모로 능력을 쓰는 건 솔직히 불가능하죠.”
그는 쉽게 장담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석주가 그렇다고 하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도무지 어떤 방법으로 세뇌시킨 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 누군가 비각성자 사이에 숨어 세뇌한 거라기에는 이 자리에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지금 이 방에서 느껴지는 에스퍼의 기운이라고는 석주의 것뿐이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석주의 기에 익숙해진 탓에 다른 에스퍼의 것을 분간하지 못한 것이라 해도, 수십 명 사이에서 능력을 썼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다.
정원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고 일단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흔들리는 바닥을 뛰듯이 걸어 문 쪽으로 향했다. 도주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또 필요하다면 여기서 나가 도움을 청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었다.
“…하아.”
덜컹덜컹. 혹시나 착각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고 문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대로였다. 바깥에서 잠근 것이 분명했다.
문이 잠겼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계속 그럴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역시 이건… 테러 단체의 갑작스러운 공격이 아니라, 계획된 상황인 게 거의 확실하지 않나. 대체, 왜?
“강석주 씨.”
“네, 정원 씨.”
도무지 석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나름대로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을까.
“건물이 무너질까요?”
“계속 이 상태라면, 네. 얼마 못 버티겠죠.”
“제정신인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제정신인가?
여기서 이런 사고를 내겠다고? 건물이 통째로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막 완공한 건물이.
정말로 테프트의 짓일까? 어쩌면 정말로 테러 단체의 소행이고, 문이 잠긴 것은 단순히 경보가 오작동한 탓은 아닐까? 지금 세뇌당해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다 테러 단체의 알 수 없는 초능력에 당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곳이 너무 고요했다. 안내에 따라 대피하라면서, 안내해 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상황은 그대로였다.
“생각은 끝났어요?”
석주가 물었다. 이상할 만큼 느리고 차분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불안정하게 느껴질 만큼. 정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묘안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정신계랑은 상성이 별로라서요. 이렇다 할 게 생각이 안 나네요.”
새삼스러움에 돌아보니, 그는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소리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이 영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도망칠 수는 있겠나요.”
“우리 둘만? 그건 당연히 되죠.”
“…….”
“저분들까지 다 데리고 나가는 건 솔직히 무리지만.”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나가는 것도 물론 생각은 했다. 그러나 정원은 민간인 보호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국가기관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이들을 이런 위험천만한 현장에 두고 자신들만 빠져나가는 상황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인간적인 죄책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후폭풍이 두려워서이기도 했다. 아무리 자국민이 아니라지만, 이들이 모두 죽기라도 했다가는 꼼짝없이 임무를 말아먹은 꼴이 된다. 일주일 내내 방에 틀어박혀 시말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테프트의 새 지부 건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그걸 외면하고 나간다는 말인가.
그때 석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슬슬 위험할 것 같은데.”
“…곧 무너질까요.”
“정확히는 몰라도, 아까 폭발은 기현상일 거예요.”
석주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화약을 사용한 폭발이 아니리라는 건 대강 예측하고 있었다. 기현상이 실내에서 일어난 경우를 보지 못해 단순히 폭발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하기는 했지만.
“건물 안에서 기현상을 일으켰다는 건가요?”
“그렇죠. 지금 건물 흔들리고 있는 것도 이능력으로 흔들고 있는 걸 테니까, 언제 무너뜨리겠다고 나올지 몰라요.”
“…….”
정원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이 조용해진 시점은… 안내방송이 나온 뒤.
‘그렇다는 건 혹시…….’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극적인 효과는 아니겠지만, 때마침 와르릉! 하는 굉음이 울렸다.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부슬부슬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