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강석주 씨. 잠시만 여기서 버티고 계세요.”
“얼마나 버티면 될까요?”
석주는 갑작스러운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버텨 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셨죠.”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 확인차 질문을 던졌을 때, 다시 한번 천장이 불안불안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석주는 위로 손을 뻗으며 대꾸했다.
“받치고 있으라는 뜻 아닌가요?”
그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정말로 천장이 잠잠해졌다. 다른 에스퍼의 능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임에도 석주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걸 감탄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문 쪽으로 달려가던 정원이 멈칫하며 다시 말했다.
“문 좀 부숴 주세요.”
곧장 문이 부서졌다. 순순히 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조금 어이없어하는 듯한 표정이라 살짝 머쓱해졌다. 강석주를 너무 만능 공구처럼 사용하고 있나.
그러나 머쓱한 죄책감은 잠시였다. 정원은 열린 문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강석주가 사람들을 모두 피신시키기 어렵다면, 사람들이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정원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달렸다. 이렇게 달려 보는 것은 오랜만이지만, 정원이 직접 몸을 쓰는 실전 경험이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체력이 모자라 헉헉거릴 일은 없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건물이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대피하는 사람 한 명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용한 것은 아니었는데, 복도를 울리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신경을 집중하면 저 아래쪽에서 에스퍼의 기운이 떼거지로 느껴지기는 했다.
정말로 다들 대피하고 있는 모양이다. 마네킹처럼 굳어 있는 저 방의 비각성자들만 빼고.
내려가서 도움을 청할 가능성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모두 빠져나간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비각성자를 개미 목숨처럼 아는 에스퍼들도 잔뜩 섞여 있을 텐데, 이 정신없는 상황에서 비각성자를 돕기 위해 올라올 이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비각성자 대기실은 다른 층에 배치해 놓고 에스퍼와 가이드는 그보다 낮은 다른 층에서 대기하도록 했었지. 그마저도 왠지 이런 상황을 미리 예견한 것 같고, 의심스럽게만 느껴졌다.
정원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막 세워진 건물이라서인지 안내도가 아주 친절하게도 붙어 있었다. 방송실은 3층 위라고 되어 있기에 계단을 통해 달려 올라갔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방송/전산실이라고 적힌 문패를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정원은 망설이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고개를 드니, 방송 장치 앞에 앉아 있는 가면 쓴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본 적이 있는, 익숙한 모양의 화려한 가면.
설명회 진행자와 완전히 같은 모양의 가면이었다.
역시나.
남자는 갑작스럽게 뛰어 들어온 정원의 모습에 놀란 듯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정원이 빨랐다.
평소의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곧장 그에게 덤벼들었다. 남자는 맨바닥에 패대기쳐져 당혹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허, 허억……!”
사정을 봐 줄 필요는 없었다. 정원은 남자의 위에 깔고 앉듯 올라타 단단히 목을 틀어쥐었다. 그가 버둥거리며 정원의 팔을 잡고 늘어졌지만 손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누, 누, 누구십니까?』
“…….”
『저기, 말로, 말로 하시죠… 커헉!』
아까 들었던 것과 볼륨만 다를 뿐이지 정확히 같은 목소리. 목이 눌려 꽉 막혀 있다고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한시가 바쁜 와중에 그의 말에 대답하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계속해서 가이딩을 퍼붓는데도 바로 기절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제법 등급이 높은 에스퍼인 듯했다.
『갑, 갑자기 왜 이러시는… 컥!』
『걱정 마세요.』
『예? 무, 윽, 무슨 걱정을… 그보다 빨리 대피, 하셔야……!』
『죽일 생각은 아니니까요.』
짐짓 걱정스러운 척 대피를 운운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가면 너머에서 계산하는 듯한 눈빛을 마주친 탓이었다.
남자가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고 그 통에 가면이 벗겨졌다.
“헉…!”
정원이 아까 예상했던 것처럼, 박규혁의 얼굴이었다.
얼굴이 공개되자 그는 목을 졸리고 있을 때보다 더 당황한 듯 숨을 삼켰다. 왜 이렇게 놀라지? 설마 그렇게 대놓고 능력을 사용해 놓고 자신이 박규혁이라는 사실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예상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고 좋아할 겨를은 없었다. 정원은 멈추지 않고 가이딩을 계속했다. 결국 박규혁은 저항하던 끝에 노곤한 표정을 지으며 쓰러졌다.
이게 효과가 있을까…….
있어야 할 텐데.
정원이 주목한 것은 ‘방송이 나온 직후’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해졌다는 점이었다. 세뇌를 발동시킨 원인이 방송이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그렇기에 방송을 진행한 목소리가 설명회 사회자, 즉 박규혁의 것이었으므로 그의 목소리로 일종의 세뇌 버튼이 켜진 것이 아닐까 추측했던 것이다.
목소리로 사람을 세뇌할 수 있는 에스퍼.
극히 드물었지만… 아예 없는 케이스는 아니었다. 정원이 알기로도, 딱 한 명. 목소리를 매개로 세뇌 능력을 발동한다고 알려진 이가 있었으니까.
“…….”
불쾌하게 일그러졌던 표정을 금세 갈무리했다. 박규혁은 소리 증폭 능력을 가졌다고 밝혀졌을 뿐 구체적인 활동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실적을 쌓은 것이 단순히 그 능력 덕분이 아니라, 사실 목소리로 사람을 세뇌하는 능력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는 게 정원의 추측이었다.
세뇌는 시전한 능력자가 정신을 잃는 순간 풀린다. 가이딩을 통해 박규혁을 기절시키면 세뇌가 풀리지 않을까 생각한 이유였다.
정원은 기절한 박규혁을 내버려 두고 방송 장치 앞으로 갔다. 침착하게 장치를 조정하다 보니 어렵지 않게 화면에 비각성자 대기실이 있는 층의 CCTV 장면을 띄울 수 있었다. 건물이 흔들리고 있는 탓에 화면도 흔들리고 있었고, 꺼질 듯 말 듯 불안정하게 깜빡이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직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기실의 CCTV 카메라는 깨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내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깨어났다면 복도 CCTV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당장 대피를 시작했을 테니까.
그러나 복도를 비추는 카메라 화면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
정원이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 생각한 건가?
이 남자의 목소리 때문에 세뇌가 걸렸던 게 아닌가?
사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 방송과 세뇌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고? 그럴 리는 없는데.
정원은 장치가 있는 곳을 두 팔로 짚은 채 잠시 낭패감을 다스렸다.
드득, 드드득, 그 와중에도 천장이 흔들리는 소리는 그대로였다. 멈춰 있을 겨를이 없었다.
정원은 성큼성큼 걸어 쓰러진 박규혁에게로 향했다. 그리곤 다시 그의 위에 깔고 앉듯 올라타 손을 치켜들었다.
철썩.
우선 왼뺨을 후려쳤다.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박규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철썩.
이번에는 오른뺨. 박규혁의 얼굴이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찌푸려졌다.
정원은 원래 함부로 남에게 손을 올리는 성향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서는 예외였다.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체술도 충분히 익혀 두었다. 몇 대 얻어맞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플 터였다.
『일어나시죠.』
『으윽…….』
『일어나.』
『어음… 으아악!』
본인이 억지로 재워 놓고 본인이 억지로 깨우는 극악무도한 상황. 찌뿌듯한 신음을 내뱉던 박규혁은, 꾸물꾸물 눈을 뜨다 말고 정원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자 곧장 비명을 내질렀다. 한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막은 정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뇌 어떻게 풀죠?』
『잘, 잘못했습니다! 우선 이 손 놓고…!』
몽롱한 얼굴을 채 감추지 못한 박규혁이 손발을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세뇌 어떻게 풀죠?』
정원은 고장난 테이프처럼 건조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박규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다시 철썩.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 자꾸만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천장 무너지고 있는 거 안 보이나요?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세뇌 어떻게 풀죠?』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지금 여기서 죽일 수도 있어요.』
정원이 차분하게 경고했다. 박규혁이 눈을 피하며 침을 삼켰다.
지금 이 건물을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는 것은… 순전히 강석주의 능력이다.
낮은 건물도 아니었다. ‘그’ 테프트에서 새 지부로 쓰겠다는 명분으로 심혈을 기울여 지은 고층 건물이었다. 하물며 자연적인 지진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건물 내에서 일으킨 기현상 때문에 건물이 흔들려 무너지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겉보기에는 같은 상황이라도, 자연적인 현상을 상대할 때와 다른 에스퍼의 능력 때문에 일어난 상황을 상대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정원 자신이 여기서 시간을 끌수록 강석주는.
『아니면 이 길로 여길 나가서 비각성자를 생매장한 테프트를 고발할 수도 있겠죠.』
『…….』
아마 조금 더 냉정한, 이를테면 테프트의 사장 같은 사람이었다면 이런 협박에는 넘어가지 않았을 테지만……. 다행히 박규혁은 그 말에 동요하는 듯했다.
‘중요 인력은 아닌 것 같고… 흔들리는 걸 보니 말단인가.’
생각하던 정원은 쐐기를 박기 위해 덧붙였다.
『다섯까지만 세겠습니다. 하나…….』
『말, 말하겠습니다!』
박규혁이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입에서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동어가 있습니다, 정신 조종을 시작하고 끝내는 데 필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