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데이비드!”
전에 없이 큰 소리로 외친 정원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석주는 바닥에 양반다리를 한 채 앉아 있었다. 속이야 어찌 됐든 겉보기로는 일단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정원을 보며 석주가 조금 당황한 듯 물었다.
“다녀왔어요? 그런데…….”
“괜찮나요? 견딜 만해요? 폭주할 것 같지는 않고요?”
“이 정도로 폭주는 안 해요. 그런데…….”
“다행이네요. 그래도 안색이 나쁜 걸 보니 서두르는 게 좋겠어요. 벌써 다른 사람들은 다 대피한 모양입니다.”
“알겠어요, 정… 아니, 존. 그런데 뒤에 달고 온 건 뭐예요?”
여유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말을 모조리 끊어 버렸는데, 나름대로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듣던 석주도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그 질문을 들은 정원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아, 이거요.”
뒷덜미를 붙들린 채 질질 끌려온 것은 박규혁이었다.
정원이 그를 내팽개치듯 바닥에 던져 놓았다. 방송실 한구석에서 찾아낸 밧줄로 꽁꽁 묶어 놓은 상태였다.
시동어가 뭔지 몰라도, 그 자리에서 말하게 하는 걸로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CCTV는 고장이 났으니 세뇌가 풀리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도 없었고, 또 그를 방송실에 그대로 놓고 가면 남아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직접 데려와 눈앞에서 세뇌를 풀게 하는 게 나았다.
묶인 채 내던져져 꿈틀거리는 그를 보며 정원이 냉정하게 말했다.
『세뇌 해제하시죠.』
『그…….』
박규혁이 눈을 굴렸다. 또다시 빠져나갈 길을 찾는 걸까.
정원은 무심코 석주 쪽을 돌아보았다. 협박을 한다면 자신보다도 그가 더 효과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강석주의 위압감은 엄청났으니까. 같은 에스퍼라면 더욱 압도당하는 면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문득, 지금 붕괴를 감당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 상대에게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시키려 하는 게 너무 나쁜 짓처럼 느껴졌다.
아까부터 너무 많은 걸 시키려 하고 있나. 정원은 그에게 아무런 눈짓도 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러기 전 이미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석주는 정원을 향해 피로한 얼굴로 빙긋 웃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정원은 살짝 황당한 심정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박규혁을 내려다보며 다시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시간이 없는데, 했던 말을 두 번씩 해야 할까요?』
그 말에 박규혁도 정원의 협박 내용을 다시 떠올린 듯했다. 결국 그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을 열었다.
『대피……. 대피하세요.』
대피하라는 게 키워드였나?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정원은 발로 박규혁을 툭 건드렸다.
『잘 안 들리는데요. 능력은 뒀다 국 끓여 드실 건가요.』
『아까 제 기운을 다 빼 놓으셨으면서요!』
박규혁이 울상으로 외쳤다. 아직 가이딩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태일 테니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할 만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간단한 한마디를, 이 방 하나에 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력을 아껴 두려는 거겠지. 정원은 냉랭한 얼굴로 압박하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대피하세요!』
결국 박규혁은 울며 겨자 먹는 표정으로 다시 말을 꺼내야 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자신의 목소리에 증폭을 건 채로.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정신을 차렸다. 마네킹같이 굳어 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생명을 찾은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던 사람들은 건물이 자잘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 웅성거리더니, 다행히 알아서들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도망쳐 나갔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정원이 급히 석주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손목을 걷어쥐며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몸상태는?”
“이 정도로는 폭주 안 한다니까요.”
순순히 손목을 내준 석주가 덤덤하게 안심시켰다. 가이딩을 하고는 있었지만 조금씩 기운을 불어넣는 정도로는 석주의 상태가 그리 안정되지 않았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정원 자신의 기운만 쭉쭉 빠져나가고 있었다. 티가 확 나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 비해 확실히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정원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색이 최악인데요.”
이렇게 얘기해 봤자 딱히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평소보다 창백해진 얼굴을 보니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에 석주는 가볍게 픽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 나름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으면서 대놓고 걱정하는 듯한 말을 한 게 우스웠던 걸까.
“무너지는 걸 억지로 막아둔 거라 슬슬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들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할 것 같은데. 얼굴은 가렸지만 현장에서 잡히면 곤란하니까.”
석주가 침착하게 설명하더니, ‘물론 우리가 죄지은 건 없지만.’ 하고 농담처럼 덧붙였다. 씩 웃어 보이는 석주를 보며 정원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람들 알아서 대피하는 것 같으니까 조용히 빠져나가죠.”
“미안한 얘기긴 한데, 지금 저 틈에 섞여서 나가면 들킬 것 같네요. 기운 컨트롤 할 자신이 없어서요.”
“뭐가 미안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손잡고 일어나세요.”
이 상황에서 미안해해야 할 쪽을 고르라면 그보다는 자신 아닐까. 차분한 태도의 석주에게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인 정원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묘한 눈으로 보던 석주는 장난을 치는 대신 그냥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석주를 지탱하며 일으켜 세운 정원이 쓰러진 박규혁 쪽을 턱짓했다. 데려온 것은 자신이었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처리할지는 사실 정원 혼자서 결정할 사항은 아닌 듯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글쎄요. 죽여야 하나?”
“진심이신가요.”
자신들이 여길 휘젓고 갔다는 사실을 숨기려면 아예 그를 없애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죽이겠다는 말이 나오는 건 당황스러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착하게 묻고 고개를 돌리자 회색 가면 너머 노란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져 있었다.
“농담이죠. 죽이면 뒤탈이 클 테니까.”
장난이었구나. 뒤탈이 커서, 라는 이유가 살짝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지금 찝찝하다는 이유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물을 겨를은 없었다.
“능력 못 쓰게 만들어 놓고 여기 두면 되겠네요.”
정원이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박규혁은 두 사람이 이쪽에서 뭘 속닥거리는지가 상당히 걱정되는지 긴장한 얼굴로 힐끗힐끗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말로 알려줄 수는 없지만 행동으로 친절하게 보여줄 수는 있었다. 정원은 박규혁에게로 다가가 손목 언저리를 발로 꾹 눌렀다.
“아, 아야야! 또 뭘 하시는 건가요!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
“저기, 한국인이신가요? 한국어로 말씀하시는 것 같던데? 맞으시면 동포끼리 돕고 살아야죠. 이러지 마시고 말로… 으악!”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네요.』
천연덕스럽게 영어로 대꾸했다. 내내 억울한 듯 쫑알거리던 박규혁이 빠르게 기절했다. 이미 한 차례 가이딩을 당했던지라 두 번째에는 그리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죽일 생각은 없는데, 여기 두고 가도 괜찮으려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박규혁은 꽤 쓸모 있고 인지도도 있는 에스퍼이니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 테프트 쪽에서 알아서 구하러 올 터였다. 정말로 테프트와 조금도 연관이 없는 무자비한 테러 단체의 소행이라면 힘들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으니까.
혹시라도 그러지 못해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것까지는……. 뭐 어쩔 수 없나. 정원과 석주가 책임질 부분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박규혁을 바닥에 내버려 둔 채, 정원이 강석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멀쩡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 상태는 또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그를 부축하기 위해 자세를 낮추자 석주가 난감한 듯 웃으며 만류했다.
“부축 같은 건 안 해 줘도 돼요, 정원 씨.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오기 부리는 건 아니죠?”
“사람을 거의 병자 취급하는데? 괜찮다니까요.”
석주는 그 말을 증명하듯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걸어 정원보다도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서 자칫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방금 그를 가이딩했던 정원의 판단으로 그는 확실히 평소에 비해 위태로운 상태였다.
서둘러야겠다. 그의 뒤를 따르던 정원은 점차 뛰듯이 속도를 올렸다. 멀어지는 중 방금 전까지 있던 방에서 박규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으아아악! 사람 살려!”
그새 깨어났나? 석주를 가이딩해야 하기에 기력을 남겨 놓느라 가볍게만 건드려 주었더니, 효과가 빨리 떨어진 듯했다. 예상 못 한 상황은 아니었다. 당장 능력을 쓸 여력은 없을 테니 저 목소리가 닿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터였다.
정원은 힐끗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누가 구하러 오든 아니든, 어쩔 수 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석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도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러려 했다.
순간 복도 끝에서 보인 그림자에 정원의 시선이 멈췄다.
박규혁을 구하러 온 사람인가? 그렇게 판단했으면 이쪽에 주목하기 전 빨리 자리를 뜨는 편이 맞을 텐데. 어쩐지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복도 끄트머리에 멈춘 그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정원과 상대방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눈이 마주쳤다는 것은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원의 머릿속으로 벼락에 맞은 듯 찌릿한 충격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형?”
입 밖으로 무심코 그 단어가 흘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