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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25화 (25/126)

25.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제 목소리 같지 않았다. 한 차례 뱉어진 뒤 다시 귀로 들어오고 나서야 정원은 스스로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인식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이 움찔거렸다.

형?

내가 지금 형이라고 한 건가?

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가면 쓴 남자에게서… 형을 떠올린 건가?

어째서?

죽음을 앞둔 것도 아닌데 눈앞으로 주마등이 펼쳐졌다. 정원이 그 무엇보다도 끔찍해하는 눈동자와, 그 날부터 있었던 일들이 차례대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정원이 열 살이었던가, 그보다 어렸던가. 자연재해 같은 남자가 정원의 가족에게 찾아왔던 날.

정원의 부모님은 그날 확실하게 돌아가셨다.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 그 사실에는 의심해 볼 여지조차 없었다.

그리고 형은……. 사라졌다. 말 그대로 증발한 것처럼. 정원이 깨어나자마자 접한 것은 부모님의 부고와 형의 실종 소식이었다. 시신조차 찾지 못했으니 한동안은 형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살았다. 그러나 국가기관에서 형의 사망을 확실히 확인해 준 순간부터는 더는 희망만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이제 정원의 목표는 오직 복수였다.

그 남자… 테프트의 창립자를 향한.

죄책감과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밤마다 그날의 일을 악몽으로 꾸기는 했으나, 한 번도 누군가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이상하게 그립고 익숙하고, 그러면서도 갑갑한 느낌.

눈앞에 나타난 이가 마치, 그날 실종된 형처럼 보이는 이런 느낌.

그 순간 천장에서 후드득 돌무더기가 쏟아졌다. 시야가 가려진 사이 가면 쓴 남자는 복도 끝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정원은 홀린 듯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왜 그래요? 어디 문제 있어요?”

“잠시, 잠시만요.”

“뭐라고요?”

당황하는 석주를 두고 정원은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절대 지금 그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머리가 완전히 마비된 것 같은 감각이었다.

정원은 제 발이 흐느적거리는 것을 느끼며 달렸다. 복도 끝으로 단숨에 달려가 코너에서 몸을 틀었다.

“기… 기다려!”

겨우 한마디를 뱉을 수 있었지만 코너를 돌아 눈에 들어온 복도에는 개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헛것을 본 건가? 아니면 그사이 어디론가 사라진 건가?

정원이 뻣뻣하게 굳어 서 있을 때,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희끄무레한 섬광을 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머릿속을 메웠다.

방금 전 본 것과는 다른 모양의 가면. 그리고 방금 전 보았던 이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찌릿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다른 에스퍼인 모양이었다.

속은 건가? 정원은 지금 이 에스퍼의 능력을 피하고 그를 제압하거나 도망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결론은 불가능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그래 봤자 정면에서 맞는다면 소용은 없겠지만.

“…….”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닥치지 않는 충격 때문에, 의아해진 정원이 천천히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너른 가슴팍이었다. 조금 더 고개를 드니 익숙한 호박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석주는 정원의 앞을 막아선 채 온몸으로 상대 에스퍼의 기운을 받아내고 있었다. 자신을 보호하듯 끌어안은 몸이 차갑고 단단했다. 그에게 이렇게 틈 없이 안겨 본 적은 처음이었지만 그럼에도 지금 석주의 몸이 평소보다 훨씬 더 차가운 상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

귓가로 괴로워하는 듯한 짧은 신음이 흘러들어왔다. 느리게 정신이 돌아왔다. 정원은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감각과 함께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석주를 올려다봤다.

“강…….”

강석주를 부르려던 정원은 숨을 삼켰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눈앞에 보인 것이 형일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버렸다. 망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생각이었건만. 이미 과도하게 힘을 쓴 탓에 기운이 빠져 있는 파트너 에스퍼를 내버려 두고 눈앞에 뵈는 것도 없이 덤벼들었다. 그들 눈앞에 띄지도 말고 조용히 사라졌어야 하는 상황에 자신 쪽에서 여기 있다고 광고를 하며 나타난 셈이었다.

이따위 터무니없는 실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 남자’를 향한 복수와, 형을 향한 부채감과 그리움은 항상 정원의 원동력이면 원동력이었지 걸림돌이 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너무 방심했던 걸까.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정원을 보며 석주가 손을 뻗었다. 깨물어서 상처를 내는 짓 같은 건 하지 말라는 듯, 힘이 들어간 입가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안 다쳤어요?”

지금 이 상황에 나올 질문인가, 이게.

“가, 강… 강석주 씨.”

정원은 그답지 않게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너무 가깝게 느껴지는 행동은 둘째치고, 차라리 화를 냈다면.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 정원을 탓했다면. 그랬으면 이만큼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을 터였다. 석주는 일그러진 정원의 표정을 보고 작게 웃더니 상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대로 먹히지 않은 능력에 당황한 것인지 잠시 멈칫했던 상대 에스퍼가 다시 한번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눈앞에 찌릿한 섬광이 튀었다가 석주의 손짓에 사그라지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겉보기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상황이었다. 정신없이 서로의 사이에서 부딪히는 기운의 파장만이 대강 돌아가는 일을 인식할 수 있게 했다.

상대는 전격계 에스퍼인 것 같은데, 석주가 무슨 능력으로 그걸 받아치고 있는 것인지는 육안으로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정원이 옆에 놓여 있던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이어지던 공방이 아주 잠시 틈을 보였을 때, 상대 에스퍼의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 그 순간 석주가 염력으로 소화기를 터뜨렸고, 얼굴에 분을 잔뜩 뒤집어쓴 에스퍼가 콜록이는 사이 정원이 석주의 손목을 낚아챘다.

“사람 불러 놨어요. 바로 앞에… 차 대 놓으라고 했으니까, 그거 타면 돼요.”

기운 빠진 음성으로 석주가 중얼거렸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정원은 다시 피가 날 정도로 입안을 씹으며 석주를 부축했다. 이번에는 석주도 거부하지 않았다. 기력을 잔뜩 소진한 상태에서 만만찮은 에스퍼를 상대한 게 역시나 무리였던 모양이다.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불안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원은 초조해져 그를 다독이며 발을 놀렸다.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건물 앞은 혼잡했다. 대피하던 사람들과 건물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섞여 있었다. 보통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러하듯 현장이 잘 통제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확성기를 들고 물러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질서 있게 통제되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막 도망쳐 나온 에스퍼들이 쉽게 말을 듣지 않는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제대로 된 인력을 파견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난리 통을 틈타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올 수 있을 정도였으니 경계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만했다. 이렇게 허술하게 굴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는 것인지, 정말로 예기치 못한 상황이라 이렇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원은 석주를 부축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을 향해 라이트를 번쩍이는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번화가가 아니라 오가는 차가 많은 것도 아니었으니 착각은 아닐 듯했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겨 차 문을 열자 예상대로 문은 수월하게 열렸다.

운전석에는 빵모자를 눌러 쓴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정원과 석주가 타자마자 차에 시동이 걸렸다.

“와, 석주 씨 맞아요? 못 알아보고 내리라고 할 뻔했네. 꼴이 왜 그렇게 됐어요?”

빠르게 돌아가는 핸들만큼이나 빠른 목소리였다. 석주는 정원의 어깨에 기댄 채 거칠게 쌕쌕거리는 숨을 내뱉을 뿐 대답이 없었다. 정원은 그의 몸을 받아 안다시피 한 채 손목을 붙들고 가이딩을 하느라 마찬가지로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폭주하려는 건 아니죠? 저 이 차 뽑은 지 얼마 안 됐다구요. 폭주할 거면 나가서 해 주세요.”

정원이 가이딩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될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강석주 정도 되는 S급 에스퍼가 폭주할 경우 차 한 대가 문제가 아니었다. 정도가 심할 경우에는 과장 좀 섞어 도시나 나라 하나가 통째로 날아갈지도 몰랐다. 누군지는 몰라도 저렇게 태연하게 떠들 일이 아니었다.

“석주 씨, 제 말 들리기는 하세요? 가이드 불러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석주는 얼굴을 파묻은 상태 그대로 대꾸했다.

“어, 필요없어.”

“그러고 보니까 새 파트너? 생겼다고 하셨나? 옆에 계신 분이세요?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일단 말을 거니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건성이었다. 상대 역시 별생각 없이 한 인사였는지 정원이 대답을 하건 말건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가이딩을 저분 혼자 하신다고요? 와, 사람 죽일 일 있나.”

“머리 울린다, 준희야…….”

석주가 중얼거렸다. 반말을 하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듯했다. 그야 자신을 대하는 말투나 기관 사람을 대하는 말투 정도밖에 들은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머리가 울린다는 말 때문인지 운전석은 조용해졌다. 어느 정도 번화한 도로로 빠져나온 뒤 행선지를 묻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정원은 내내 가이딩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처럼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기운을 부으면 빠져나가고, 또 부으면 또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 에스퍼가 너무 많은 능력을 사용했을 경우에는 가이딩을 몸에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등급이 낮은 에스퍼라면 어떻게든 채워줄 수 있겠지만 석주는 아니었다.

앓는 소리를 내는 석주에게 정원이 초조하게 당부했다.

“조금만 참아 보세요. 정신 놓으면 안 됩니다.”

“정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석주가 힘없이 대꾸했다.

잠시 후 마침내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빠른 속도였지만 그럼에도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정원은 급한 마음에 문부터 열고 석주를 끌어당겼다. 그때 운전석의 준희가 정원을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이거 가져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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