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등 뒤로 방문을 닫자 석주는 다 잠겨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우기지 마시죠. 다리에 힘도 제대로 안 들어가면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넘어가려다가 대답을 하기는 했다. 정원의 차가운 목소리에 석주가 숨을 내쉬듯 약하게 웃었다. 그 뒤에 꺼질 듯한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꼴사납게 됐네.”
아무리 힘든 현장에서도 흐트러진 기색을 보이지 않았기에, 그가 이런 모습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꼴사납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혼잣말을 못 들은 척한 뒤, 정원은 석주의 침대가 있는 방까지 그를 데리고 들어가 자리에 눕혀 놓았다.
겨우 안정적인 자세로 누운 석주는 긴 한숨을 뱉으며 한쪽 팔로 얼굴을 덮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일부러 표정을 가리는 걸까.
정원은 아주 짧은 순간 그의 창백해진 얼굴을 구석구석 들여다보았다. 미미한 향수 냄새와 더운 호흡이 섞여 공기에 열감이 감돌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둘 시간이 없을 듯했다. 가이딩을 계속했기에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안정이 될 때까지 석주는 내내 저런 위태로운 모습일 터였다.
정원은 답지 않게 제 겉옷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그리고 침대 위에 올라가 무릎걸음으로 석주에게 다가갔다.
몸을 숙여 이마를 짚어 보았다. 속에서 끓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는 건지 열은 방금 전보다도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열이…….”
무심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을 때, 무의식중에 한 행동인지 아니면 의식하면서도 한 건지 석주가 정원의 손에 이마를 비볐다.
순전히 걱정되는 마음에 손을 댄 것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니 불에 덴 것처럼 손끝이 찌릿했다. 서로 조금만 더 멀쩡한 상황이었다면 뭐 하는 거냐고 웃거나 핀잔을 줄 수라도 있었을 텐데, 지금은 손을 뗄 수도 없었다. ‘나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도 않는 상태였고, 또 이렇게 힘들어 보이는 얼굴의 석주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정원은 석주의 감은 눈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민 끝에 그에게로 몸을 완전히 숙였다. 안다시피 한 상태에서 가이딩을 했던 것은 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막상 흔들리는 차 안이 아니라 침대 위에서 그와 몸을 붙이고 끌어안으려니 그때와는 또 다른 낯선 기분이었다. 이래도 되나, 하는 기분.
고작 가이딩일 뿐인데. 잠시 망설이는 사이 석주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이대로 두고 가요.”
“뭐라고요?”
예상도 하지 못했던 그의 말에 정원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석주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대답했다.
“하루 자면 나아지겠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강석주 씨 지금 폭주 직전입니다.”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정원이 그의 말을 가차 없이 끊어 버리자 석주가 픽 웃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반응이지만 평상시와 달리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정원은 입술을 깨물고, 그 상태 그대로 석주를 가득 끌어안았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자신의 기운으로 석주를 진정시키다가 조금 시간이 흘렀을 때쯤 그 가슴팍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본래 가이딩을 위해 하는 행동임에도 지금은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건 일이니까, 이 이상 의식하는 건 곤란하다.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꾸준히 가이딩을 하고 있는데도 상태는 겨우 유지될 뿐 나아지지는 않고 있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는 강경책을 쓰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원은 끌어안고 있던 몸을 들어 석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마지막으로… ‘그런 식의’ 가이딩을 했던 게 언제였더라.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할 정도로 한참 전이었는데.
정원은 숨을 들이마신 뒤 크게 마음을 먹고 손을 뻗어, 석주의 셔츠 가장 윗단추에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댔다. 화끈화끈한 피부가 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느껴졌다.
석주가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듯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 정원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런 식으로는 안 하겠다고 했잖아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섹슈얼한 방식으로 가이딩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고, 먼저 건드리는 일도 없을 테니 안심하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먼저 건드렸던 아니던, 그래야만 할 상황이었다. 정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기지 말라고 했어요. 당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태 아니에요.”
“이런 일 없게 하고 싶은데……. 정원 씨랑은.”
석주가 길게 한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자신과는 그럴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 말은 나라서 싫다는 뜻인가? 난데없이 거부당한 기분에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침착하게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싫은 건 알겠는데, 어쩔 수 없어요. 일이니까.”
“항상 그런 생각으로 했어요?”
정원은 더 묻지 않고 석주의 셔츠 단추를 풀어헤쳤다. 그가 만류하듯 난감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봤다.
자신의 손목을 힘들게 부여잡은 석주를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정원이 답답함에 결국 언성을 높였다.
“제발 좀!”
지금 이 순간에도 석주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뭐 어쩌겠다는 건가요. 왜 고집을 부려? 저하고 자기 싫다는 건 알겠습니다. 근데 싫어도 이게 일이잖아요. 지금 당신 상태가 안 좋잖아요. 달리 뭐 어떡해요?”
자신과는 싫다는 건, 다른 사람이라면 괜찮다는 뜻일까. 하긴 그동안 동조율도 높지 않은 가이드들에게 가이딩을 받으려면 손만 잡는 방식으로는 힘들었을 터였다.
그런데 자신은 왜 안 된다는 걸까. 화가 난다기보다 어이가 없었고, 오기가 든다기보다 조금 억울했다.
“좀 전에 명함 받은 데 연락해서 가이드 몇 명 보내라고 할까? 몇 명 달라붙어서 가이딩하면 나아지겠어?”
준희가 내민 명함에는 심부름센터 소속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작은 사설 기관인 모양이었다. 석주와 같이 일해 본 적이 많은 곳일까.
하지만 그게 어디든, 그 심부름센터가 믿을 만한 곳이든 아니든, 정원은 가이드 여러 명 틈에 그를 눕혀 놓고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정원에게 그걸 막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랫동안 신뢰를 기반으로 이어져 온 파트너 관계에서조차 통하지 않을 만한 생각이었다. 나 외의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맡기지 않겠다, 는 건.
상대가 자신이 아니면 섹스든 뭐든 꺼리지 않을까? 정말 그런 거라면 대체 무슨 기준으로 정원 자신만 콕 집어 거부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질투심이 느껴진다거나, 분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와 동조율이 낮은 가이드 몇 명이 달라붙건 자신 하나만 못할 터였다. 정원에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석주가 저런 상태가 된 것은 정원 자신의 탓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다른 가이드에게 떠맡길 수는 없었다.
“여태 이런 꼴이 돼 본 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 꼴이 돼도 그런 식으로 버텼던 건지 그건 모르겠는데… 다른 가이드 몇 명으로 돌려막기 해봤자 소용없어요. 제가 해야 됩니다.”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정원은 석주의 위에 올라타듯 앉아 거의 멱살을 잡은 채였다.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석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여야 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