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27화 (27/126)

27.

내가 아니면 안 된다. 그건 조금 무거운 말이었다.

스스로 한 말을 곱씹다가, 정원은 손을 내려 침대를 짚었다. 석주의 얼굴이 팔 사이에 갇힌 꼴이 되었다. 한껏 고개를 숙인 바람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방해했다.

석주는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으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원은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이 돼서 그렇다고 하면 이상한가요.”

“…….”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내가 책임지게 해 줄 수 있잖아요. 이거 한 번으로 뭐가 망가지는 것도 아닌데…….”

“…….”

“싫어도 그냥 한 번만 참아요.”

막막한 심정으로 뱉은 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석주의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 짧게 터져 나오는 호흡……. 정원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보던 석주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정원 씨.”

“…또 똑같은 소리 할 거면 안 들을게요.”

담담한 부름을 들으니 또 착잡해졌다. 대체 왜 가이딩을 해 주겠다는데도 한사코 거부하냐고,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원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석주는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왜 울고 그래요.”

울고 있다고?

멍한 눈으로 석주를 내려다봤다. 질 나쁜 농담은 아닐까. 그러나 당황해 눈을 깜빡이자 정말로 눈가가 축축했다. 석주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있자니 어이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쩌자고 울고 있단 말인가. 석주는 가만히 손을 뻗어 정원의 눈가를 닦아냈다.

“나도 걱정돼서 그랬던 거예요.”

“…….”

민망함과 당황으로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정원 씨 등급이 높고 실력이 좋아도, 망가지지 않을까 싶어서. 정원 씨라서 싫은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정원 씨라서 더 걱정이 되면 됐지…….”

정원은 긴 침묵 끝에 대답했다.

“절 뭘로 보시는 건가요.”

꽤나 자신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허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석주의 걱정에는 물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태 그를 제대로 가이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석주는 그 말에 뭐라 반박하는 대신 ‘그러게요.’ 하며 작게 웃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정원이 보인 눈물이 꽤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 그렇게 매너가 좋은 편은 아닌데.”

“…이건 그러니까…… 좋다는 뜻으로 들어도 되는 거죠.”

더없이 머쓱했지만, 확인차 한번 물어보았다. 석주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무언의 대답이 떨어진 셈이니 빠르게 끝장을 보아야 했다.

석주는 지금 상태가 엉망이다. 게다가 굳이 강도 높은 접촉 가이딩을 하자고 설득한 쪽은 정원이었다. 그러니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했다.

“…….”

정원은 어매니티 로션을 손에 쥔 채 잠시 망설였다. 석주는 가만히 누워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이건 일이다. 이건 일일 뿐이다.

다른 사람이 상대였다면 굳이 속으로 다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석주를 보니 도무지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섹슈얼한 이유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열기로 젖은 눈동자를 보면 더더욱 곤란해졌다.

“표정이 왜 그렇게… 비장해요.”

한참 가만히 있던 석주가 정원을 가까이 당겼다. 뒤집어 눕히려는 건가 싶은 눈빛이었다. 그러나 석주는 자세를 뒤집는 대신 그냥 정원의 뒷목을 잡고 자신 쪽으로 당겼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는 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가 힘 빠진 손으로 자신을 당기는 것이 안쓰러워서인지, 무의식중에 그를 배려해서인지 모르게, 순간 저항하지 못하고 당기는 대로 끌려 내려갔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제야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차렸다.

입술이 닿기 직전 석주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정원은 그대로 얼었다. 맞닿은 입술은 거스러미 하나 없이 매끈했다. 그리고 따끈했다.

키스할 생각 같은 건 없었는데. 머리가 그대로 굳는 기분이었다.

그때 석주가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굳어 있는 정원의 모습을 보고는 타이르듯 한마디 했다. 작게 힐난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깔려 있었다.

“눈은 감아야죠.”

등골이 조금 오싹했다. 일부러 낸 목소리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길이 없는데.

“이럴 필요가… 있어요?”

입술이 스치는 거리에서 힘겹게 대꾸했다. 석주는 얄밉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어차피 섹스할 건데 키스가 대수인가?”

만류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으나 보람이 없었다. 괜히 더 민망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사무적으로 가이딩만 마친 뒤 떨어지려던 목표가 벌써부터 흐려지고 있었다.

석주는 정원이 적응하기를 그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다시 완전히 포개진 입술은 적당히 따뜻했지만, 정원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듯 가르는 혀는 열에 들떠 너무 뜨겁게 느껴졌다.

입안을 델 것 같았다. 침대 시트를 짚고 있던 정원의 손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뜨거운 혀가 부드럽게 입안을 훑었다. 얼굴을 찡그린 채 굳어 있는 정원을 보던 석주가 다독이듯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그럴수록 안정감이 생기기는커녕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이 든 것은 잠시 후였다. 키스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가이딩 효과는 있겠지만 정원 본인이 작정하고 힘을 실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차이가 컸다. 둘 곳을 모르는 손을 옮겨 석주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입안을 식히듯 핥아냈다.

가볍게 감겨 있던 석주의 눈꺼풀이 살짝 들리고 그 사이로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약간의 웃음기가 섞인 눈빛이었다.

키스는 한참을 이어졌다. 정원은 이게 가이딩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일부러 더 전투적인 자세로 입맞춤에 임했다. 마침내 숨이 모자라 고개를 들었을 때, 석주는 방금 전에 비해 한결 투명해진 눈으로 정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정원의 입술을 닦아냈다. 손이 닿기 전까지는 타액으로 젖어 꼴이 엉망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긴 한숨으로 숨을 고르는 정원을 보던 석주가 곧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침대 시트 위에 떨어진 로션을 집어 들었다. 어느 순간 손에 힘이 빠진 정원이 떨어뜨린 것이었다.

“이런 걸로 될지 모르겠는데.”

석주는 담담한 투로 중얼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정원은 급히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물론 석주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뒤로 빼며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민망하죠.”

“…….”

보면 모르나? 민망해 죽겠는데.

알면서 묻는 게 뻔하니 더 얄미웠다. 정원은 대답하지 않고 석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까는 잘만 얘기하더니.”

“…당신이 지금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고 있잖아요.”

“싫으면 그만둘까요? 방금 키스로 좀 나아진 것 같은데?”

또 실랑이할 일은 없을 줄 알았더니,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건 곤란했다. 정원은 민망함을 억눌러 참았다.

“하아……. 또 그 소린가요. 되도 않는 말 좀 그만해요.”

여전히 열에 들뜬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나아지긴 뭐가 나아졌다는 건가. 방금의 키스는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이건 꼭 약을 먹고 잠시 나아진 어린이가 이제 아프지 않다고 우기는, 그런 상황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내려다보자, 석주는 입매를 곱게 접어 웃었다.

“안 빼서 다행이네요.”

“…하기 싫다면서 다행일 건 또 뭔가요?”

“나도 좀 급해질 것 같아서.”

정원은 미묘하게 찌푸려진 석주의 미간에 시선을 두었다.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더니 의외의 발언이었다. 그 말이 영 과장은 아니었는지, 석주는 더운 듯 작게 한숨을 쉬며 제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물었다.

“나한테 뭐 뿌렸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지? 의아해하다가 곧 정말로 뭘 뿌리긴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신이 없던 나머지 잊고 있었다.

“당신이 부른 사람이 이상한 걸 주더라고요. 에스퍼 향수랬나……. 에스퍼 냄새라는 걸 지워준다던데.”

석주가 곤란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 향수에 뭔가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마음이 급한 나머지 받아서 뿌려 주기는 했지만,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는 향수였다.

“…왜요. 거짓말인가요?”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애매한 표정만 짓고 있으니 불안해졌다. 정원이 조급하게 추궁하자 석주는 느릿느릿 대꾸했다.

“아뇨. 거짓말까지는 아니지만……. 좀 위험한 걸 주고 갔네. 준희도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좀 위험한 것.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굳이 캐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실제로 에스퍼의 흔적을 눌러 주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겠지만, 위험하다는 건 아무래도……. ‘그런’ 뜻이겠지.

“어쩐지 머리가 좀 어지럽고… 열이 나는 것 같더라니.”

그렇게 중얼거린 석주가 입만 휘어 웃으며 정원을 마주 보았다.

“이젠 어쩔 수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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