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28화 (28/126)

28.

“…그건 그냥 능력 부작용 아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쯤 농담을 섞어 물었다. 석주는 픽 웃더니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답변을 했다.

“글쎄요.”

“…….”

“남이 주는 걸 턱턱 믿고 받으면 어떡해요? 생각보다 순진하시네, 정원 씨.”

자존심은 조금 상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억울해하는 대신 눈을 돌리며 재촉했다.

“상황이 급해서 판단력이 좀 흐려졌을 뿐입니다……. 빨리 하기나 하시죠.”

“그래요. 옷 벗어 보세요.”

더 놀리거나, 하다못해 좀 더 장난기 있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러나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말을 마친 석주의 손이 곧장 정원의 셔츠 위로 와 닿은 것이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로션 주세요.”

“알아서 할 수는 있겠어요?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서.”

내줄 생각이 없는 건지 석주는 가볍게 웃으며 로션을 등 뒤로 빼기만 했다. 정원은 눈을 날카롭게 뜨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빨리 주세요.”

“빨리 벗어요.”

“…….”

정말로 유치하고 의미 없는 신경전이었다. 그래도 그의 손에 옷까지 벗겨지는 것보다는 그 말대로 직접 벗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눈을 돌리며 드디어 그의 위에서 몸을 피했다. 침대 한 편에 어정쩡하게 무릎을 댄 채 벨트 위로 손을 가져갔다. 상의까지 벗을 필요는 없겠지. 할 일만 하면 그만이니까.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석주의 시선 때문에 머쓱한 나머지 이대로 눈을 감고 싶을 정도였다.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와 이런 상황이 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빨리 하고 끝내자. 정원이 고개를 돌린 채 벨트를 풀어 바닥으로 대강 던져 놓았다.

“벗었으니까 됐죠. 이제 제가 마저 알아서 할 테니까…….”

손을 뻗으며 한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단숨에 정원을 눕힌 석주는 다시 입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정원의 셔츠 위로 손을 가져갔다. 입술이 뒤섞이는 와중에도 단추를 풀어내는 손길은 한 번도 꼬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벗겨진 셔츠는 정원이 던진 벨트 근처로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정원이 힘주어 가슴팍을 밀어냈다. 석주는 순순히 밀려나 몸을 뒤로 물렸다.

제 입술을 닦아내는 석주를 보며 정원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벗길 필요 없잖아요.”

“바지만 벗고 하자고요? 짐승도 아니고.”

대충 나온 대답은 농담 같았지만 석주의 얼굴에는 생각보다 웃음기가 없었다. 저속한 말에 살짝 민망해져 괜히 인상을 찡그리는 정원을 보며 그제야 그가 짧게 웃었다.

“가이딩이 목표 아니었어요? 몸이 닿아야 효과가 있죠.”

분명 거부하던 쪽은 석주였는데. 싫다고 뻗대던 사람이 맞나. 이쯤 되면 예의상 거절했던 게 아닐까, 하는 불손한 생각까지 든다. 아니면 이것도 향수의 부작용이라도 되는 걸까.

그 향수… 심각할 정도로 위험했던 건가?

얼굴만 보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라 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정원이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보거나 말거나 석주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가 정원의 몸을 제 쪽으로 슥 끌어다 고정하더니 정원의 바지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대번에 속옷만 입은 상태로 그의 눈앞에 놓이자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수치심이 다시 끓어오르는 듯했다.

석주는 평소보다 더 하얗게 질린 정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곧 느긋하게 웃었다. 이미 몇 개 풀려 있던 자신의 셔츠 단추를 마저 풀어내는 손길에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가 벗어 던진 옷가지가 정원의 것과 뒤섞였다.

“이러면 좀 덜 민망해요?”

더 민망해.

같이 벗어 봤자 두 배로 민망해질 뿐 아닌가. 마음속으로는 즉각 답이 나왔지만,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정 직접 해야겠으면 빨리 하기라도 해 주세요.”

“빨리 하면 다치죠.”

느릿한 목소리였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반박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다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 그게 중요한가.

“지금 나하고 진짜 섹스라도 하자는 건가요. 상태가 그 모양이면 좀, 토 달지 말고 가이딩만 받으면 덧납니까?”

“네, 덧나요. 그럼 섹스하자는 게 아니면 이게 뭐예요. 목적이 있다고 행동 이름이 달라져요?”

“…….”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 정원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석주는 웃지도 않고 그저 덤덤하게 정원의 속옷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벗깁니다?”

“누가 그런 거 일일이 얘기하랬나요? 무슨 매너예요?”

날카로운 반응에 석주가 대답 없이 웃으며 속옷을 끌어 내렸다. 정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처음도 아닌데,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생소하고 낯선 기분이었다.

짜증 나게 말을 얹던 석주는 그 뒤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열린 어매니티 로션의 꽃향기가 석주의 향수 냄새와 섞여 미묘하게 달큼한 향을 만들어 냈다.

그 이후로는 자연스러웠다. 미끄러운 손가락으로 입구를 벌린 석주가 느리지만 천천히 안을 벌렸다. 이물감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안을 푸는 손길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로션이 금세 바닥났는지 꾸물꾸물 위로 올라온 석주가 젖지 않은 다른 손을 정원의 입가로 가져갔다.

“적셔 주세요.”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타액으로 손을 적셔 달라는 말이겠지만 정원이 순순히 입을 벌릴 리 없었다.

“그냥 해요…….”

“뭘 그냥 해요. 빡빡한데.”

홧홧한 얼굴을 한쪽 팔로 가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가이딩이라는 게 원래 다 그런 거죠.”

“항상 그랬어요?”

석주는 정원의 입가에서 손을 떼고 스스로 손가락을 물어 적셨다. 그 모습을 낯선 눈으로 보며 정원은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가이딩을 위한 관계. 상대에게는 섹스였던 적도 있겠지만 정원에게는 그저 가이딩이었다. 아팠던 기억뿐이지 쾌락을 위해 움직였던 기억은 한 번도 없었다.

“어차피 하다 보면 적응되니까.”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의 관계에서, 어차피 가이드의 몸은 에스퍼에게 적응해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도록 되어 있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그러나 석주는 심드렁하게 그러냐고 대답할 뿐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타액으로 적신 손을 써서 한참 더 뒤를 푼 후에야 겨우 바지 버클을 풀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아무렇지 않게 속옷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정원은 아예 양팔로 얼굴을 가렸다. 석주는 킥 웃더니 정원의 팔을 잡아 내렸다.

“정원 씨.”

“…왜 불러요. 제가 세워주기라도 해야 돼요?”

뾰족한 투로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직접 세워 줘야 한다는 걱정은 의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석주의 것은 이미 반쯤 일어선 상태였다.

호기롭게 물어 놓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남의 성기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입술을 꽉 깨문 정원이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웬만큼 아픈 것 정도는 감수하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석주의 것을 목도하니 그가 왜 그렇게 뒤를 푸는 데에 신경을 썼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심이 가는 크기였다.

긴장감에 침을 삼키자 석주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래는 잘만 세워 놓고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지.

“들어갈지 모르겠는데. 정원 씨, 내가 한번 빼줄 테니까 그걸로…….”

“됐어요!”

질겁한 정원은 더 질척하고 민망한 말이 나오기 전 그대로 다리를 뻗어 석주의 허리를 감은 뒤 끌어당겼다. ‘그냥 해요.’ 이를 갈며 중얼거리자, 순순히 끌려와 준 석주는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번 빼주는 건 부끄럽고 이건 괜찮아요? 기준을 모르겠네.”

어쨌거나 그도 더 이상 망설이지는 않았다. 곧장 제 성기를 손으로 몇 번 슥슥 쓸더니, 어느덧 완전히 일어선 것을 입구 주위에 가져다 댔다. 나름 공을 들였으나 여전히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혹시라도 석주가 다시 마음을 바꿔 전희를 계속하겠다 우길까 싶어서, 정원은 어떻게든 몸에 힘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별로 의미는 없는 걱정이었다.

“아프면 말하세요. 혹시 말이 안 나오면 손을 써도 괜찮고.”

질질 끌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 이후는 빨랐다.

석주는 입구를 맞추자마자 곧장 허리를 치받아 올렸다. 오래 끌어 봤자 더 아프기만 할 거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단번에 안쪽을 헤집고 들어오는 성기를 느끼며, 정원은 혀를 씹지 않기 위해 아예 입을 벌렸다.

“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탄식이 터지며 작살에 꿰뚫린 것처럼 몸이 떨렸다. 그걸 알아챘는지 석주는 몸을 더욱 가까이 붙여 정원을 끌어안았다.

“쉬이……. 다 들어갔어요.”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면서도 밀어낼 수 없을 만큼 버거웠다. 정원은 무심코 그의 어깨를 붙들고 매달렸다. 본래 옷깃을 잡으려는 동작이었지만 그도 반라였던 탓에 맨살이 손에 감길 수밖에 없었다.

석주는 그대로 한참 동안 정원을 안은 채 떨리는 몸을 도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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