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태가 됐다. 동시에 민망해졌다.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석주의 손길에 델 것만 같았다.
“그만하세요…….”
“뭘 그만해요. 아파요?”
작게 중얼거리자마자 대답이 돌아왔다.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면서도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은 멈추지 않아 더욱 민망해졌다.
“이제 안 아픕니다. …머리 쓰다듬는 거, 그만하라고요.”
“왜?”
“왜기는 뭐가 왜인가요, 그냥…….”
이런 낯간지러운 기분이 드는 게 불편하니까. 팔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재촉했다.
“그냥 빨리 해요.”
귓가에서 큭큭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우습게 들릴 수 있는 말이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잠깐 웃고 마는 게 차라리 나았다.
석주는 느긋하게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뗐다. 그러더니 정원의 허리를 한 번 고쳐 잡고,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읏…….”
덕분에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이 선연하게 와닿았다. 둔탁한 통증이 골반을 타고 찌르르 올라왔지만 처음에 비하면 훨씬 견딜 만했다. 그 상태로 다시 움직이지 않는 석주를 정원이 재차 채근했다.
“이제 움직이세요.”
“네, 네. 분부대로 해야죠.”
놀림당한 기분이었다. 석주는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허리를 한계까지 뒤로 물렸다. 입구 끄트머리에 걸렸던 귀두가 다시 단번에 안쪽을 찍고 들어왔다. 느린 움직임 탓에 묵직하게 스치는 감각이 너무 선명했다.
정원은 이를 악문 채로 참았다. 그것뿐이라면 견딜 만했겠지만, 더 큰 문제는 석주가 한 번 허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에스퍼의 기운이 몸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듯한 감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건 불쾌하면서도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귓가에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별거 아닌 짧은 한숨에 온몸이 긴장되는 듯했다. 그사이 날뛰던 석주의 기운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그 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열기는 그대로였다.
“정원 씨.”
석주의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파고드는 숨결에도 그 향수 냄새가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 한번 안쪽을 부드럽게 치받았다. 깊은 곳에서 찌르르하게 올라오는 느낌이 뱃속을 간지럽혔다.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이제껏 해본 가이딩 중에서도 이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
정원은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꽉 다물리려 하는 다리 사이에 낀 석주의 허리가 작게 떨렸다. 왜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방금 괜찮았어요?”
“빨리 하기나 해요, 제발!”
손을 뻗어 정원의 미간을 꾹 누른 석주가 이번에는 아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양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붙든 채 짐짓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아까부터 자꾸 재촉이네요. 괜찮겠어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대답할 틈도 없었다. 석주는 질문을 마치자마자 허리를 한껏 뒤로 물렸다가 강하게 처박았다. 여태까지는 일부러 조절하고 있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몇 번을 연달아 쑤셔지는 바람에 뱃속이 욱신거렸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석주의 성기는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오차 없이 같은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정원이 딱 한 번 반응을 보였던 바로 그 지점을, 짓누르듯 후벼 파기도 하고 더 깊게 헤집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안쪽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아윽, 흣……. 잠, 아!”
빨리 끝내라고 하면 익숙해질 겨를 없이 통증만 느껴질 줄 알았는데, 정원의 오산이었다. 헤집어질 때마다 그대로 길이 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뻑뻑하던 아래쪽은 점차 풀어져 젖은 소리를 냈고, 감각은 점점 더 예민해졌다. 점차 찌릿한 느낌이 강해졌기에, 정원은 견디지 못하고 석주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나 주지 않았지만.
“거, 거기 말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몸을 위로 빼려 했다. 그러나 석주의 손에 단단히 붙들린 허리 역시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기 왜요.”
“거기 기분 나쁩… 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벽이 강하게 쑤셔졌다. 정원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뱃속이 저릿저릿했다. 분명 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사람 말을 아주 귓등으로 들었다.
“별로 기분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석주가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원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갔다. 반쯤 일어선 자신의 것을 보며 정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석주는 빙긋 웃을 뿐 집요하게 놀리려 들지는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정원의 것을 그러쥐었다.
“손 치워.”
“반응하는 게 싫어? 왜?”
“…….”
석주가 고개를 숙여 정원의 목과 귀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일을 일 이상으로 여기게 되는 게 싫은 거였다. 대답하는 대신 손을 치워 달라 요구했지만 석주는 꿋꿋했다. 그의 손이 느릿하게 비벼질 때마다 반쯤 부푼 정원의 것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아랫배가 점점 더 지끈거렸다. 정원은 허리를 뒤틀며 거의 몸부림을 쳤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단지 한쪽 골반을 단단히 틀어쥔 석주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을 뿐.
귀두 끝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석주가 다시 유연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석주 쪽으로 재차 골반이 당겨진다. 끝까지 처박힌 성기가 또 한 번 극점을 자극했다.
“흐으, 읏….”
그가 하체를 뭉근하게 돌릴 때마다 안쪽이 짓눌리고 섞이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성기가 파묻히는 곳마다 살이 흐무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만……읏.”
자신의 귀에도 너무 유약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하지 말라 중얼거리자, 그는 다시 놀리듯 대꾸했다.
“아까 거긴 싫다면서요.”
그렇다고 안을 휘저어 놓으라고 한 적도 없었다. 정원은 석주의 어깨를 아프도록 꽉 붙들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아파 보이는 손자국이 새겨지고 있는데도 석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속도를 늦춰 느릿느릿 움직이다 문득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스칠 것처럼 가까워졌다. 정원은 눈을 감아야 하는지 아주 찰나의 순간 고민하다가 흐물흐물 떨리는 목소리로 만류했다.
“키스하지 마세요. 지금 키스하면…….”
안 될 것 같아.
그 말끝은 석주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말랑한 입술이 겹쳐지고, 힘없이 벌어진 사이로 혀끝이 파고들었다. 입안이 정신없이 헤집어졌다.
머리가 녹는 것 같았다. 이성이 마비된 걸까. 입술이 떨어진 사이 여전히 불규칙하게 아래를 파헤치며 석주가 말했다.
“정원 씨 얘기를, 좀 더 해 봐요.”
“이 와중에, 갑자기, 무슨 말을 하라는……, 윽!”
황당함에 대꾸하다 말고 깊은 곳을 푹 찍히는 바람에 절로 신음이 샜다. 정원은 겨우겨우 말을 마무리했다.
“…하라는 건가요.”
“뭘 그렇게 억지로 버텨요.”
최선을 다해 평온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하는 모습이 우스웠던 모양이다. 석주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굳이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생각해 보면 내가 정원 씨를… 잘 알지는 못하잖아요.”
그는 느릿느릿 움직이며 정원의 이마를 닦아냈다.
“테프트 사장은 왜 싫어하는 거예요?”
“…….”
“아까 그 사람은 누구였어요?”
곤란한 질문이 이어졌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석주는 캐묻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대답이 나오기도 전 다시 빠르게 허리를 쳐올린 것을 보면 정말로 답이 필요 없는 모양이었다. 정원은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며 석주의 몸을 끌어당겼다. 괜한 말을 듣는 바람에 다시 아까의 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그러게. 누구였을까?
그는 손도 아래쪽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정원의 것을 자극해 주고 있는 그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생각을 할 겨를도 없게 만들면서 무슨 대답을 하라고. 흔들리는 시야속에서, 정원은 그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멈추기 위해 단단한 손을 잡으며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이러는 건요.”
불규칙하게 숨소리가 섞인 서두였다. 말이 나오기 시작했으면 속도를 늦출 법도 한데, 석주는 여전히 정원에게는 버거울 만큼 성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기껏 입을 연 충동이 금세 사그라져 버렸을 테니까.
“전에 말했었죠……. 아! 거기 좀 그만 건드려요.”
“전에 뭘 말했는데요.”
“…할 일이 있어서, 여기서 일한다고.”
술김에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했다는 기억만은 명확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채 정원이 눈을 감았다. 남에게 할 거라고는, 특히나 강석주에게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말이 입 밖으로 샜다.
“그 남자가…….”
“그 남자가.”
“가족들을 다 죽였어요.”
“테프트 사장이?”
“…….”
정원이 한 말을 재촉하듯 따라 하던 석주가 질문을 던졌다. 정원은 입을 다물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래서 만나야 합니다.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을 잇고, 정원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제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건 간헐적인 신음과 숨소리밖에 없었다.
석주 역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리 짓에 조금 더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아아, 흑, 아……!”
정원은 신음을 토하며 정신없이 흔들렸다. 눈앞이 번쩍이며 사지를 잠식당하는 감각에 그는 숫제 울부짖으며 자신을 낱낱이 까발리려 하는 에스퍼를 밀어내려 했지만 흉포해진 존재는 결코 놓아주는 법이 없었다.
“그, 그만, 제, 발… 아……!”
“큭…….”
정원이 진저리를 치는 어느 순간 그가 긴 한숨을 뱉었다. 숨 막히는 위압감이 자신에게로 모조리 쏟아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안쪽이 뜨겁게 젖어 들었다. 끝끝내 석주가 손을 멈추지 않았기에, 젖은 것은 뒤만이 아니라 앞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원에게 그걸 느낄 겨를 따위는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 피로한 가이딩이 또 있었던가……. 깜빡이던 눈이 결국 까무룩 갈피를 잃었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정원의 눈에 보인 것은, 묘하게 굳어진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석주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