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정원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창문에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방 안이 깜깜한 것을 보고 아직 밤이 가지 않았나 싶었다가, 커튼이 쳐진 것을 보고 그렇지는 않은가 생각했다가, 탁상 위에 놓인 동그란 시계가 2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새벽인가 했다.
머릿속이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했다. 눈은 말똥말똥하게 뜨였고 더는 졸린 것도 아니었지만 정신은 다른 데 팔린 것처럼 뚜렷하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앉으니 허리에서 아릿한 둔통이 타고 올라왔다. 미묘한 수치심이 부유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다시 머리가 멍했다.
침대는 깨끗했다. 욱신거리는 통증만 아니었다면 강석주와 잤다는 사실이 완벽한 거짓말처럼 느껴졌을 것이었다.
‘아니지……. 그걸 잤다고 표현하면 안 되지.’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밤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가이딩이라고 말해야 했다. 다른 표현을 갖다 붙여서는 안 된다.
정원으로서도 이렇게 기력을 많이 소모하는 가이딩은 오랜만이었다. 아니, 처음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온몸에 진이 빠져 똑바로 일어서지조차 못하고 있으니, 역시 처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S급 에스퍼와 임시나마 파트너를 맺어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역시 예상은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는 법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강석주의 침실이었다. 간밤에 잠들었던 곳이 여기였으니 자는 사이 옮겨 놓지 않은 것 정도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트는 갈았는데…….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정원은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무심코 ‘의외다.’라는 생각을 한 뒤 흠칫 놀랐다.
의외라니, 뭐가? 그가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스스로 한 생각이 당황스러워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는 벌써 일어난 걸까. 아니면 아예 다른 곳에서 잔 건가.
일부러 간밤의 일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한참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다가, 타들어 가는 듯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밖으로 나가 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설마 설마 했더니 새벽 2시가 아니라 낮 2시였던 모양이다. 기절하기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쯤 기관으로부터 질타 섞인 연락이 쏟아져 들어와 있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테프트의 일은 어떻게 됐을까. 그 소란을 피우고 나왔으니 지금쯤 자신들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석주의 모습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통유리창 앞에 선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라서, 정원은 잠자코 입을 다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일어났어요?”
기척을 내지 않았는데도 정원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했다.
정원을 돌아보는 석주의 눈은 알 수 없는 기색이었다. 기분 탓일까? 단순히 느낌의 문제일까? 정원은 그 눈을 보는 순간 아무 말도 꺼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지난밤의 일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꿈결처럼 그에게 털어놓았던 모든 말들이 다 해서는 안 될 말이었던 것 같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일어났을 때 석주가 옆에 없었기 때문에? 간밤의 상냥했던 손길에 정말로 무슨 착각이라도 해 버렸던 것일까.
정원은 외롭지 않냐는 말을 종종 들어 왔다. 국가기관에서 가끔은 잠잘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은 상태로 일만 하면서, 연애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 꺼냈던 말이었다. 물론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자신이 외롭다고 느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애매한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글쎄, 정말로 외롭기라도 했던 걸까. 사람의 하룻밤짜리 온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걸 보면.
정원은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진정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 밖으로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주무셨나요. 이제 몸상태는 좀 괜찮으시고요.”
흠잡을 구석 없이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이렇게 말한다면 방금 전 보였을지 모르는 미세한 동요도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석주는 말없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순간, 그가 이 거리감 느껴지는 말투를 지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 없어 보이게 그게 뭐예요?’라거나.
‘자고 일어났더니 부끄럽기라도 해요?’라거나.
석주는 그 순간 정말로 그런 말을 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금세 사라졌다. 석주는 곧 정원을 보며 빙긋 웃었다. 단순한 착각이었던 걸까.
“정원 씨는 괜찮아요?”
“저야… 괜찮죠. 한 게 뭐 있나요.”
“가이딩, 힘들었을 텐데.”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석주 또한 정원만큼이나 사무적이었다. 어쩌면 안심해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석주가 간밤의 일을 가이딩이 아닌 섹스인 것처럼 표현했다면 난감해졌을 터였다. 정원 자신이 줄줄이 늘어놓았던 말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 주려는 듯한 태도가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이 화제를 길게 끌고 가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요?”
“하루도 안 지났어요. 그냥 늦잠 좀 잔 수준이죠.”
“그럼 테프트는,”
“이제부터 슬슬 알아보려고요. 배고프지 않아요?”
그리 적극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배가 고픈가. 딱히 그렇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우습게도 그에게서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배가 고파 오는 것 같기도 했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석주는 정원의 표정을 살핀다거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전화기 앞으로 다가가 프론트를 호출했다.
룸서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말이 없었다. 석주는 그저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그의 표정과 상태를 살피던 정원도 곧 느릿느릿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노트북을 챙겨 나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석주의 앞에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도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사실 할 일이야 많았다. 보고서를 써야 했고, 테프트의 설명회가 결국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도 알아봐야 했다. 다만 당장은 그 중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정원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잠시 후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반사적으로 일어나려는 정원을 만류하고 석주가 음식을 받아 왔다. 폭신해 보이는 오믈렛이 정원의 앞에 놓였다. 당황스러웠지만 그 순간 입맛이 확 도는 기분이었다.
“숙취는 아니니까 적당히 시켰는데, 속은 괜찮죠?”
“아무 이상 없어요. 정말로 걱정하실 필요도 없고.”
석주의 얼굴 대신 오믈렛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먼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왜일까. 예상 밖의 침묵이 당혹스러웠다. 보통 식사할 때 입을 다무는 쪽은 정원이었고, 쓸데없는 말을 하는 쪽은 석주였다. 이쯤 되니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게 단순히 착각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도 이상했다. 정원 역시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오믈렛을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 석주는 숟가락질을 멈춘 채 정원이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숨기려는 생각도 없어 보였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애써 모른 척 밥을 먹던 정원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강석주 씨.”
“네.”
“할 말이 있으신가요?”
그 말을 하면서도 오만 생각이 교차했다.
자신이 잠자리에서… 아니, 가이딩을 하면서 너무 무르게 굴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상대에게 틈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자신 쪽에서 매달렸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혹시나 그 여파로 저렇게 구는 걸까. 그건 자신의 실책이 맞았지만, 말 그대로 실수일 뿐이었다. 공사 구분도 하지 못하고 계속 그런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못 믿는 건가. 자신을 못 믿는다 해도 잘못은 아니지만 괜히 속이 쓰렸다. 억울한 걸까. 아니면 서운한 건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다시 오믈렛 위로 숟가락을 가져갔다. 계란을 난도질하는 정원을 보며 석주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있어요, 얘기할 거.”
“말씀하세요.”
석주는 고요한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다 먹었어요?”
“…네.”
어차피 더는 입맛이 돌지도 않았다. 무슨 말이기에 뜸을 들이는지. 스푼을 내려놓은 뒤 석주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그는 길게, 아주 길게 침묵했다.
한참 만에 석주의 입이 열렸다.
“정원 씨.”
“…….”
어딘가 비현실적인 감각.
“S급 가이드, 아니죠?”
찰나, 모든 생각이 정지했다. 정원은 아주 짧은 순간 미리 숟가락을 내려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저 질문을 듣는 순간 바닥에 떨구었을 게 분명했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린 정원이 석주의 얼굴을 보고 허탈한 듯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정말로 당혹스럽다는 듯,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일그러진 목소리. 다른 사람이었다면 너끈히 속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석주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확신이 없어서 묻는 거 아니에요.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고.”
“…….”
“이제 정원 씨한테 가이딩 못 받아요. 아니, 안 받을 겁니다.”
단호한 얼굴이었다. 정원은 발밑이 꺼지는 듯 아득한 감각 속에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