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31화 (31/126)

31.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진 것 같았다. 자신이 자신 같지 않은 느낌. 정원이 그 말을 듣고 제일 먼저 한 생각은 하나였다. ‘어떻게 알았지?’

정말로 처음이었다. 이제까지 아무도 눈치챈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이드의 등급이라는 게 원래 그랬다. 등급을 책정하는 기계 안에 들어가 검사하지 않는 이상 육안으로는 정확한 등급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정원은 겉보기로 보이는 능력만으로는 S급이 아니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났다. 가이딩 실력에도 손색이랄 게 전혀 없었고, 모든 에스퍼와 동조율이 높은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럼에도 S급으로 판정받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높은 등급 에스퍼를 가이딩하면 필연적으로 망가지는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정말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사실이었다. 기계에 들어가서 수치화하지 않는 이상은.

정원은 더 이상 자신에게 가이딩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석주의 싸늘한 얼굴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석주의 건조한 눈빛과 굳어진 표정, 감정이 담기지 않은 노란 눈동자는 마주 보고 있는 것이 힘들 만큼 고압적이었다. 그러나 정원은 그 위압감에 얼어붙어 말문이 막히기에는 너무 다급했다.

“못 받는다는 건 뭔가요. 설령 제가 S급이 아니라고 해도 강석주 씨를 가이딩 ‘못’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요. 또, 다른 S급 가이드가 오더라도 저만큼은 못 할 겁니다.”

그럴수록 냉랭하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석주가 확신을 가진 채 묻는 거라면 아니라고 우기는 건 의미가 없을 터였다. 대신 자신의 능력에 손색이 없다는 것을 내세웠다.

실제로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정원의 능력 총량은 정말로 여타 S급 가이드와 비교해서 부족한 점이 없었다. 다만 석주를 가이딩하기 위해서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뿐. 건강상태와 가이딩을 맞바꿔야 했으니까.

“안 받을 거예요.”

그러나 석주의 반응은 고집스러웠다. 내심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강석주가 사람 말을 깔끔하게 개무시할 리는 없다고 생각해왔던 정원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반응이기도 했다. 전혀 친밀하지 않은, 타인을 보는 듯한 시선에 솔직한 심정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많이 무겁고 조금 쓰렸다. 그러나 티를 내는 대신 여전히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문제인가요. 신뢰가 깨졌다거나, 그런 생각이라도 하시나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석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곤란한 쪽은 정원이건만 표정만 보면 그가 더 심한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정원은 그 표정을 똑바로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누구한테도 밝힌 적 없습니다. 문제 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저는 웬만한 S급 이상으로 가이딩할 수 있고 여태 단 한 번도 문제 일으킨 적이 없어요. 지금은 ‘이게’ 제 신원인 거예요.”

처음에는 남의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걸 이어받아 살게 된 이상 지금은 정원이 그였다. 그의 자리를 완벽하게 소화해야만 했다.

그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있던 석주가 전혀 변화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요, 정원 씨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달리 뭐가 있죠. 어제 가이딩에 문제라도 있었나요? 아직 몸이 성치 않아요? 그런 거라면,”

“화날 것 같으니까 그만 말해요.”

정원으로서는 정말로 알 수가 없어서 한 말이건만, 석주의 반응은 착잡한 듯 싸늘했다.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려야 할 상황에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니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속으로 삼키는 정원 쪽이 오히려 화가 났다.

“…….”

“정원 씨 몸이 못 버틸 거예요. 다른 이유는 없고 그거 하나예요.”

침묵하는 정원을 보던 석주가 한참 만에 차분한 투로 설명했다. 정원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정원 씨는 그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난 그게 이해가 안 가고,”

“별게 아니니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몸을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정원이 스스로의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경우에는 그것만 문제는 아니었다. 강석주 같은 S급 가이드를 계속해서 가이딩한다면 확실히 몸이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간이 길어지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견뎌낼 만했다. 임무가 끝날 때까지는, 또……. 복수를 끝낼 때까지는 문제없이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이 미션으로 망가지지는 않을 거라는 거, 아니까 온 겁니다. 관장님도 그래서 절…….”

“그 사람이 당신 생각을 하기는 해?”

석주가 날 선 투로 정원의 말을 끊었다. 살짝 흠칫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석주는 잔뜩 찌푸려진 표정을 겨우 갈무리하며 평온을 되찾았다.

“기관이 소속 가이드나 에스퍼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거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어요? 모두가 다 소모품이에요. 나도 마찬가지고, 정원 씨도 마찬가지고.”

“…그렇다고 해도.”

그 자신과 정원을 번갈아 가리키며, 석주가 말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예리한 설명에 말을 잇지 못했던 것은 자신이 소모품이라는 말에 상처받아서는 아니었다. 정원을 소모품 취급하기로는 그 자신을 따를 사람이 없을 테니까.

석주는 정원이 입을 달싹이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어 말문을 막아 버렸다.

“더 말하지 마세요. 난 나 때문에 사람 하나 망가지고 고장 나는 꼴 가만히 두고 보고 싶지가 않아요. 그게 답니다.”

“그래서 이제 가이딩을 거부하시겠다고요.”

“네. 더 이상 정원 씨랑 같이 일 못 하겠어요.”

석주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정원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조급함? 초조함? 낭패감? 복수가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어쩌다 들키고 말았는지 모르겠다는 난감함이 주된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정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거부하는 석주를 보고… 조금은 서운했다.

자신의 몸을 생각해서든 뭐든, 정원의 우선순위는 그 부분이 아니었다. 그 이성적이지 못한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간밤에 내내 생각했어요.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근데 그냥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고, 달리 더 포장할 말도 없는 것 같아서.”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석주는 달래듯 침착한 말투로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정원 씨한테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속인 걸 탓한다거나, 그럴 생각은 없어요. 사정이 있었겠죠. 지난밤에 나한테 말했던 것처럼.”

“그걸 아시면서.”

“…….”

“그걸 아시면서 저한테 이러시는 건가요.”

자신의 말을 들었으면서.

복수를 위해 살아 왔다는 처절한 고백을 들었으면서.

그걸 그렇게 흔들리는 얼굴로 들었으면서… 지금은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석주의 표정이 복잡한 기색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정원은 그 길로 고개를 숙였다.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석주는 설득해 봤자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런데도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뭐 다를까요. 어차피 당신 가이딩하면서 버틸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을 텐데요. 이때까지 동조율도 안 되는 조무래기 몇 명 모아다가 근근이 버텨 왔죠. 날 보내면 그게 달라지나요?”

“달라지지는 않겠죠.”

“나야 쌓이고 쌓이면 몸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거지, 그 사람들은 한 번으로 평생 가이딩 못 하는 몸이 될 수도 있는데? 효율적으로 생각하든 이성적으로 생각하든 나 하나 데리고 다니는 편이 나을 텐데요?”

말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등급이 낮은 가이드가 등급이 높은 에스퍼를 가이딩할 때 몸이 상할 수도 있다는 것은 1+1이 2라는 것만큼 당연한 이론이었다. 석주는 그게 무슨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같은 에스퍼가 상대라면 누구라도 몸상태를 망칠 각오로 가이딩을 해야 할 터였다. 그런 논리라면 정원보다 그를 상대해야 할 다른 조무래기 가이드를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따져 묻는 정원의 말에도 석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한 번으로 갈아치우면 돼요. 정원 씨랑은 경우가 다르죠. 정원 씨는 오래 봐야 할 파트너잖아요. 아니, 파트너‘였잖아요’.”

꼭 그렇게 선을 그어야만 하나. 묘한 불쾌감이 치밀었다. 정원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슬쩍 눈을 돌렸다. 석주는 한참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침묵 끝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정원이었다.

“걱정해 주신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저는… 말했잖아요. 여기 온 이유가 뭔지. 이번 임무에서 빠진다면 언제 다시 그 사람 흔적을 잡을 수 있을지 그것도 불분명해요. 그러니까… 제가 S급이 아니라서 가이딩을 못 받겠다고 하면, 적어도 같이 다닐 수 있게라도…….”

구차한 부탁이었다. 쓸모도 없는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말하는 셈이었으니까. 석주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같이 다니게 된다면. 정원 씨가 급한 순간에 날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을까요. 아닐걸요. 바로 가이딩하겠다고 나서겠죠.”

“…….”

“다른 사람들이 어떤지는 말해 봤자 의미 없어요. 난 정원 씨라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니까.”

“…….”

“지부로 가세요.”

명백하게, 정원을 쫓아내겠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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