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32화 (32/126)

32.

호텔 로비 소파에 앉은 정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호텔에 비치된 현지 신문 1면에도 석주와 정원이 방문했던 건물 사진이 올라 있었는데, 이 사건은 노른 현지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크게 화제가 된 것 같았다. 포털 사이트를 장식한 기사가 정원의 화면에 떠 있었다.

〘TEFT ‘테러 단체 습격으로 노른 지부 초토화, 엄중히 대처할 것’〙

기사 댓글은 모두 호의적이었다. 테프트 자체가 워낙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기업이기 때문이리라. 테러 단체의 소행이라는 걸 누구도 의심조차 하지 않는 모양인데, 현장에 있었던 정원으로서는 그저 우스운 일이었다.

테프트씩이나 되는 대기업이 현장 대응부터가 너무나 허술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석주와 정원이 무사히 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기는 했지만…….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자신들이 상황을 그렇게 만들고 빠져나왔다는 게 테프트 본사 쪽에 전달되지 않은 것일까. 박규혁을 비롯해 여러 명이 자신들을 목격했으니 그럴 리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냥 묻고 넘어가기로 결정한 건가…….

하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정원은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덮었다.

‘지부로 가세요.’

당장 내쫓으려는 건가 싶었는데, 석주는 정원을 방에서 내쫓는 대신 자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쉬다가 나가요.’

네가 나가지 않으면 내가 나가겠다, 그런 표현인 건가. 이 이상 상냥한 방식으로 사람을 쫓아내기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자신이 나가지 않는다면 석주 역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뒤 짐을 챙겼다.

제법 무거운 짐가방을 챙겨 왔지만 그걸 전부 다 들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와 함께 일하는 게 아니라면 필요 없을 잡다한 짐이 대부분이었고, 무엇보다 정원은……. 당장 호텔에서는 나가지만, 이대로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시 방문한 지부는 지난번과 다를 바 없이 서먹하고 사무적인 분위기였다. 다만 벌써 석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인지 정원을 맞이하는 반응에 꽤 큰 차이가 있었다.

“아이고……. 오셨어요?”

누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지난번과 달리, 문을 열고 들어서는 정원을 보며 나름대로 열심히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저 눈빛은 어딜 봐도 측은해하는 것 같은 눈빛인데.

‘내가 쫓겨난 게 불쌍한가.’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겉으로는 침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얘기는 대충 들었어요.”

“강석주 씨한테 직접 들으신 건가요.”

“음, 네. 아무래도 그랬죠.”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정원을 응대했던 직원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분명 석주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인사했던 사람 같았다. 석주와 친하거나 그에게 친한 척을 하고 싶은 사람인가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다 안다는 듯 촉촉한 눈빛으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석주를 좋게 보는 거 아니었나?

“석주 씨가 사람이 좀 신기하죠? 대체로 에스퍼치고 참 괜찮은데……. 씁. 가끔 이렇게 알 수 없는 변덕 같은 걸 부린다니까요.”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파트너가 쫓겨나는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익숙해하는 반응이었다. 묘하게 거슬리는 기분에 인상을 찡그리고 묻자 이번에는 직원이 손사래를 쳤다.

“뭐, 이런 파트너 관련 이슈 같은 건 처음이긴 해요. 애초에 석주 씨한테 장기적인 파트너가 붙었던 경우 자체가 한동안 없어서…….”

한동안이라. 있기는 있었다는 뜻인가? 그 사실도 왠지 의외였다. 마음에 걸렸지만 잠자코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근데 그냥 좀 그런 편이에요.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사람을 좀 위협한다고 해야 되나? 그럴 때 보면 에스퍼는 에스퍼구나 싶죠. 그렇지 않나요?”

“딱히 위협을 받지는 않았습니다만……. 에스퍼 특유의 기운 같은 게 있기는 하죠.”

아마 직원이 말하는 위협은 그 자신 쪽에서 뭔가 거슬리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는 했다.

그렇다고 그걸 해명하는 것도 우스웠다.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제가 싫어서 화낸 게, 아니라 걱정돼서 보낸 것뿐이에요’? 아니면, ‘그렇게 험한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어느 쪽도 우습다. 그렇기에 ‘에스퍼가 변덕을 부려 괜히 가이드를 내치는 건 흔한 일’이라며, 정원을 위로하는 노른 지부 직원에게 아무 부정도 하지 않았다. 변덕을 부리는 에스퍼를 백 명 단위로 상대해 온 정원에게는 애초에 딱히 타격감이 없는 말이기도 했다.

“본부에도 소식이 들어갔나요.”

“어, 보고를 하긴 했어요.”

“그럼 유 관장님 연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보고는 역시 정원을 이곳에 보냈고, 석주와 파트너를 맺어 준 관장에게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보고만이 아니라 상담할 필요도 있었다.

“가능하긴 하지만, 지금 한국은 한밤중일 텐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분 이 시간에 주무시지도 않아요.”

직원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덤덤하게 대꾸한 뒤, 내선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직접 전화를 걸지 않는 건 국제 전화 요금 같은 일차원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유 관장이 업무 외의 시간에는 개인 전화를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속 편한 사람 같으니.

“아, 통화 기록 남지 않는 쪽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단 신청은 해 볼게요.”

기관에서 하는 통화는 원칙적으로 모두 녹음되었지만, 기밀일 경우 상급자의 허가가 있다면 전화를 끊는 즉시 삭제되도록 설정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신청하면 아마 허가가 떨어질 것이었다. 유 관장은 정원의 사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혹시 모를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외부와 차단한 방에서 기다리자니 곧 전화가 연결되었다. 관장은 기지개를 켜고 있는 건지 길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겨우 멀쩡한 목소리를 냈다.

- 어이구……. 여보세요? 정원 군? 한밤중에 이게 무슨 일이야. 뭐 비밀 얘기라도 있어?

“보고 아직 못 들으셨나요?”

정원은 관장의 물음이 끝나자마자 인사도 없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잠시 말이 없던 관장이 뭔가 뒤적이는 소리 끝에 대답했다.

- 보고라니, 무슨 보고?

“저 쫓겨났습니다.”

지나칠 만큼 직설적인 설명이었다. 관장은 당황한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우당탕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방금 전까지 누워 있다가 겨우 고쳐 앉은 모양이었다.

- 다시 잘 말해 봐. 쫓겨났다니, 누구한테? 테프트에 잠입한다더니 거기서 쫓겨났나? 기사만 봐서는 뭘 알 수가 있어야지.

물론 석주가 자신을 쫓아낸 건 당장 몇 시간 전 일이었으니 모르는 게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살짝 이성을 잃어버린 정원에게는 모든 게 곱지 않게 보였다.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왔다.

“강석주 씨한테 쫓겨났다고요.”

- 뭐……?

“제가 안 나오면 본인이 나간다길래 지금 짐 빼서 나왔습니다.”

- 아니, 그 녀석이 갑자기 왜? 좀 독특하긴 해도 갑자기 그럴 타입은 아닌데. 더군다나 정원 군이랑 일하는 건 석주 그놈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고.

무심코 ‘마음에 들어 하셨나요.’ 같은 말을 할 뻔하다가 겨우 참았다. 자존심도 없이 아주 조금 뿌듯해질 뻔했다. 거부당한 상황에서.

정원은 한숨을 푹 쉰 뒤 설명했다.

“제가……. 아니란 걸 알아낸 것 같아요.”

- 뭘 알아내?

“…제 등급 문제 말입니다.”

- …….

그 말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던 건지, 관장도 침묵했다.

- 아니, 그걸 어떻게 안 건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걸 사람이 단순히 감으로 알아낼 수 있는 거였어요?”

- 거 참 나…….

당황한 듯한 관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머릿속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애써 참으려고 했지만 석주의 심란한 표정과 냉랭하게 나가라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라 참기가 힘들었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린 정원이 결국 험한 말을 뱉었다.

“계속 생각했던 건데, 그거 순 미친놈 아닙니까?”

- 어이쿠. 석주가 뭐라고 해?

“감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그게 사람이에요 짐승이에요?”

정원이 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불평했다. 잔뜩 화난 목소리로 있었던 일을 설명한 뒤, 강석주의 쓸데없이 좋은 감을 한참 욕했다. 오히려 관장은 정원의 그런 모습을 보고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이어지던 정원의 말을 끊고 그가 물었다.

- 일단 좀 진정을 해 봐. 그래서, 어떡하려고?

“…제가 뭐 어떻게 합니까.”

정원도 화내던 것을 멈추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고민하던 관장이 말했다.

- 뭐, 기관에서는 솔직히 석주가 그렇게 나오면 들어줄 수밖에 없어. 정원 군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석주 혼자서는 일이 돼도 정원 군 혼자서는 안 되니까.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정원 군이 꼭 거기 있어 줬으면 좋겠지. 누군지도 모르는 낮은 등급 가이드 여럿 데리고 임무 하게 내버려 두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커. 능률도 떨어지고.

그렇게 이야기하던 관장이 곧 선심 쓰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 그리고 정원 군이 계속 바라던 일이잖아? 이대로 송환시키기에는 안타깝지.

“…….”

자신의 복수에는 별로 관심도 없을 사람이 말은 참 잘했다. 그래서 결국 뭘까.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은 없다는 건가.

- 어쩌겠냐. 최대한 설득해서 다시 임무 잘 같이 해 봐.

“그게 뜻대로 되면…….”

- 아, 아예 각인을 맺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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