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33화 (33/126)

33.

“각인이요?”

정원이 어이없다는 듯 그 말을 되풀이했다. 떠올려 본 적도 없는 선택지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반응하려다가 무심코 멈칫했다.

각인은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 맺을 수 있는 가장 깊고 높은 단계의 계약이었다. 오직 한 명과만 각인을 맺을 수 있으며, 맺는 과정도 푸는 과정도 위험했다. 섣불리 각인을 맺으려다가 둘 중 한 사람이 영영 능력을 쓰지 못하는 몸이 되거나, 영원한 장애를 안게 되는 경우도 많았기에 각인을 맺겠다고 나서는 에스퍼와 가이드 페어의 수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었다.

위험한 탓에 허가받은 기관에서만 각인 신청 절차를 밟을 수 있었고, 구체적인 방법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정원이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각인을 맺는 경우 그 이유는 대개 한 가지였다. 서로 각인한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는 가이딩의 안정성이 생긴다. 동조율이 낮아 가이딩이 힘든 관계에서도 각인에 성공할 경우 그 효과가 전에 비해 확연히 높아지고,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 등급의 차이가 심하더라도 그 차이를 완화해 주는 효과를 낸다. 그러니 정원이 그를 계속 가이딩해도 강석주가 말한 것처럼 위험한 일은 발생하지 않을 터였다.

대신 그 효과는 서로의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것으로, 각인을 맺을 경우 다른 에스퍼/가이드와의 관계는 거의 불가능해진다고 봐도 무방했다.

각인을 맺은 가이드는 여전히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해 줄 수 있지만, 그 효과가 각인 전에 비해 확연히 떨어졌다. 오직 각인 상대에게만 원래보다 강력한 가이딩을 선사해 줄 수 있었다.

에스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드를 받을 수는 있지만, 각인 전과 비교하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그 효과가 미미하다고 했다.

그렇기에 각인은 사실상 영원한 맹세, 거의 결혼이나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관장은 아무 생각 없이 농담조로 던진 말이겠지만, 솔직히 정원은 솔깃했다. 그만큼 간절했으니까.

각인을 맺어서 이번 임무에 함께할 수 있다면 모든 단점을 감수할 수 있었다. 이번 일로 복수에 성공한다면 더는 지금까지처럼 몸을 갈아 일할 이유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가이딩하기 힘든 몸이 된다고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석주에게는… 너무 못할 짓 아닌가.

각인이 누구 개 이름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말할 일도 아니고. 결국 고민 끝에 정원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은 참 쉽게 하시네요. 막상 제가 각인 맺으면 제일 곤란하실 분이.”

- 하하. 그만큼 지푸라기라도 잡아 볼 각오로 애써라~ 이런 거지. 뭐든지 비벼 보라고.

“…아, 네.”

- 뭐, 원래도 정원 군 신경 쓰는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설마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관장의 태평한 말을 들으면서도 실제로 건성으로 흘려들을 뿐 감흥이 없었는데, 이어진 이야기에는 저절로 귀가 기울여졌다.

“절 신경 썼다고요?”

- 어, 그런 말은 안 하디?

임무 도중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걸까. 하지만 관장의 말은 왠지 그보다 더 전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렸다.

- 정원 군 얘기 들었을 때부터 꽤 관심을 보였거든. 원래 그러는 일이 잘 없는 녀석인데.

그랬나. 그런 건 전혀 몰랐다.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꽤나 친근하게 굴기는 했다. 이상한 말투로 문자를 보내면서. 본인 입으로 친밀해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게 강석주의 원래 성격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면 정말로 정원에게 특히 호의적이었던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것 또한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복잡한 기분이라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관장의 말이 이어졌다.

- 아, 그리고 너랑 아는 사이였다고 하던데?

“저하고요?”

아는 사이라니. 기억이 전혀 없는데.

- 왜, 정원 군은 모르겠어?

“그런 사람을 봤으면 기억에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눈에 띄는 타입인데.”

- 그거야 그렇지만.

아는 사이가 아니라 그저 한 번 마주친 사이여도 기억에는 남았을 것 같았다. 그럴 만한 외모와 그럴 만한 분위기였으니까.

“강석주 씨 본인도 그런 말은 한 적이 없고요.”

-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사소한 부분이 아니잖아.

사소하다기에는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정원은 차분하게 말을 돌렸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 좀 민망하긴 합니다만…….”

- 뭐길래 밑밥까지 깔아?

“정말 그런 거라면 더더욱 문제 아닐까요. 절 걱정해서 일을 같이 안 하겠다는 게 백 퍼센트 진심이면요. 제가 정말로 각인이라도 하겠다고 나서도……. 각인은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그가 정원을 걱정한다면 각인처럼 위험한 일에 동의할 거라는 생각이 영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심각한 정원에 비해 유 관장은 태평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 그런 거야 어쩌겠어?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고 정 설득이 안 되면 돌아와야 하는 거지, 뭐. 흐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늦은 시간이니 이해가 가면서도, 지금 하품이 나오냐며 화를 내고 싶은 마음 또한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속으로 눌러 참았다.

- 일단 당장은 강제 송환 명령 안 들어가게 미뤄 줄 테니까, 어떻게든 노력해 봐. 석주가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지도 최대한 살펴보고. 그 녀석 통 본부에 보고를 안 해서 말이야.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네.”

- 혹시 더 뭐 필요한 건 없고?

“필요한 거라기보다…….”

열을 올리느라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을 보고 형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할까.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히 자신이 조급함에 눈이 멀어 이상한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순간의 감각은 여전히 생생했다. 그날 보았던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여전히 밝혀내고 싶었다.

그러나 정원에게 형의 죽음을 확인시켜 주었던 것은 관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장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딘가 찝찝하게 느껴졌다.

- 라기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관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정원은 덤덤하게 부정했다.

“아뇨. 그냥 테프트가 뭔가 수상한 동향을 보이면 전해 달라는 거였습니다.”

- 그래,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는 관장의 목소리에 정중하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화면에 떠오른 [DELETED], 삭제 완료 표시를 확인하고 방을 나왔다.

그러자마자 직원들이 다가와 ‘강석주는 원래 그런 사람’이며 ‘정원 씨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를 해 주었다. 이들 사이에서 강석주는 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위로는 적당히 무시하고, 본부로부터 오는 소식이 있으면 전해 달라고 부탁한 뒤 지부를 나섰다. 들어가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일어난 시간 자체가 늦었던 탓인지 벌써 노을이 지고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한 노인이 한적한 길목에 좌판을 깔아 놓은 채 사탕을 파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곳에서 장사를 해 봤자 용돈벌이나 할 수 있을까. 단 것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색색깔의 싸구려 사탕을 보니 왠지 입맛이 당겼다.

가까이 다가가 커다란 막대사탕을 가리킨 뒤 가지고 있는 것 중 제일 작은 단위의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그나마도 적힌 가격과 비교하면 큰돈이었다. 오백 원짜리 껌 한 통을 사면서 만 원 지폐를 내밀어 버린 듯 사소한 머쓱함.

지폐를 빤히 들여다보던 노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노른어로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난감하게 듣고 있던 정원이 말했다.

『영어로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거스름돈 no. 운세. ok?』

노른에서는 노른어와 영어를 혼용해 사용했고, 그렇기에 영어만 할 줄 알아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실제로 테프트 같은 국제 기업에서는 모두가 영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지금 만난 노인의 영어는 간단한 단어 몇 개로 더듬더듬 겨우 이어지는 수준이었다. 어찌어찌 알아듣기는 했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노인이 좌판 밑에서 주섬주섬 꺼내 든 쪽지 몇 장이 왠지 흥미를 끌기도 했다.

돈을 낭비하는 셈 치고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정원의 손에서 지폐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한 장을 고르라는 듯 쪽지를 내밀기에, 그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을 골랐다.

한 손에는 막대사탕. 한 손에는 낡은 쪽지. 알 수 없는 조합이었다. 여러모로 정원답지 않은 일이다.

사탕과 쪽지를 든 채 걸음을 옮기다가, 한 골목 떨어진 곳에서 쪽지를 펼쳐 보았다. 왠지 그 노인의 바로 앞에서 결과를 개봉하는 건 머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아.”

쪽지는 노른어로 적혀 있었다.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중간중간 한두 개뿐이라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로 운세가 맞는지조차 모르겠다.

허탈해졌다. 아무리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당장 쪽지의 내용이 그렇게까지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물어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정원은 쪽지를 가방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그리고 마침 손에 걸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이 강석주의 연락처 위에서 꽤 긴 시간을 망설였다. 지금 석주를 찾아가 대뜸 다시 파트너로 받아 달라고 말해 봤자 통할 리 없다. 그때야말로 한국으로 강제 송환을 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과연 석주가 그 호텔에 계속 머물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물론 경비를 챙겨 왔으니 숙소를 잡으려면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숙소에서 시간을 때워 봤자 의미가 없으니 문제였다. 정원이 이 먼 곳까지 온 이유는 테프트의 사장 때문이었고, 강석주와 함께 일을 해야 조금이라도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뭔가 없을까. 강석주를 설득하려면 최소한 그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다. 하다못해 이제부터 뭘 하고 다닐지라도…….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어제 받았던 명함 한 장이었다.

분명히 가방 한구석에 챙겨 뒀으니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정원은 곧 가방 안에서 구겨진 명함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 네~ 순이 심부름 센터 김준희입니다.

들어 본 적 있는 발랄한 목소리에 정원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