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34화 (34/126)

34.

“안녕하세요. 전화를 드렸었는데요.”

“아, 정원 씨라고 하셨죠? 바로 또 뵙네요. 일단 자리에 앉아 계세요.”

가게에는 어제 보았던 준희 한 사람뿐이었다. 한구석으로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자 낡아 보이는 소파에서 먼지가 푹 하고 피어올랐다. 먼지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푹신한 덕에 안정감을 주는 의자였다.

오래된 벽지가 발린 벽이 시선을 잡아끌었고, 소품 하나하나가 앤티크한 감성의 가게였다. 다 말라 죽어 가는 화분 하나가 바닥에 놓여 있었는데, 저것도 혹시 인테리어를 위해 일부러 가져다 놓은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심부름센터라기보다는…….

여러모로 낡은 골동품 가게처럼 생긴 곳이었다.

전화를 걸고 의뢰를 맡기고 싶다 말하자 준희는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게 위치를 알려 주었다.

한국에도 이런 곳은 왕왕 있었다. 일종의 에스퍼/가이드 사립기관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런 기관이 양지에서 대대적으로 사업을 하는 것과 달리 이런 작은 심부름 센터나 해결사 사무소 같은 곳은 주로 작은 규모로 운영하며 곤란한 일을 대신 처리해 주는 역할을 했다.

소개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정원이 아무런 절차 없이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석주 덕이 클 터였다.

“커피? 차? 주스? 냉수? 말만 하세요.”

준희가 수건에 손을 닦으며 말을 걸어왔다. 평범한 아르바이트생 같은 모습이었다. 딱히 에스퍼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는 걸 보니 가이드인 걸까. 가이드 중에는 비각성자 일반인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이들도 많으니까.

“커피로 부탁드릴게요.”

아무거나 달라고 하려다가, 문득 피로해져서 그렇게 대답했다.

커피를 타 온 준희는 정원에게 컵을 내밀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제 스치듯 딱 한 번 본 사람이건만 정원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거리낌이 전혀 없었다.

“어제는 어떻게 됐어요? 당연히 바로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놀랐거든요. 사람 죽은 거 아닌가 걱정도 좀 했구요.”

정원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호들갑을 떠는 준희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혹시 석주 씨 그 사람 아직도 쓰러져 있어요? 폭주한 건 아니죠?”

“그랬으면 저희 둘 다 여기 이렇게 멀쩡히 있지는 못했겠죠.”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랬으면 여기 앉아 있을 수나 있었겠는가. 어제 일은 잘 해결되었다고 덧붙인 뒤 아직 뜨거운 커피를 몇 모금 더 삼켰다. 준희가 타 온 커피는, 솔직한 심정으로 아주 맛이 없었다.

“가이딩은 어떻게 한 건데요? 저희 말고 다른 센터 부르셨어요? 저희 꽤 믿을 만한데~ 강석주 그 까탈스러운 사람이 저희랑만 계속 일하잖아요. 말 다 했죠, 뭐.”

“그동안은 그런 향수 같은 건 주지 않으셨던 모양이네요.”

“앗……. 아하하, 그게 부작용이 좀 있긴 하죠~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다구요. 석주 씨도 평소에 종종 썼어요.”

여태까지는 용케 그런 부작용 없이 써 왔던 모양이지?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그 사람이 까탈스러운 편인가요?”

까탈스럽다기보다는 종잡을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예상 못 한 행동을 자주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원의 말을 듣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눈치였고…….

지금 생각해 보면 고집이 너무 센 것 같기는 했지만.

“음~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면서 일하긴 해도, 까보면 좀 까탈스럽지 않아요? 일단 옆을 안 주잖아요.”

대충 알 것도 같은 느낌이었다. 결과적으로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정원도 지금 옆자리에서 쫓겨나 여기까지 온 상황이니까.

“그러니까, 사람 안 쓰셨다는 거죠? 진짜로 혼자 다 가이딩하셨어요?”

준희가 넌지시 질문을 던져 왔다. 생각에 잠겨 있던 정원은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희는 신기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우와, 그게 정말 되긴 되는 거예요? 능력 좋으시네.”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우습고, 아니라고 겸양을 떨기도 애매한 말이었다. 대답하지 않자 준희가 눈치껏 알아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가이딩 잘 된 거면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러고 보니까 석주 씨는 어디 두고 혼자서. 사실은 막 혼자 쓰러져 있는 거 아닌가 몰라.”

“차라리 정말 그런 편이 나았을지도요.”

겨우 나온 대답이 그거라는 게 우스웠는지, 준희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커피를 마시던 정원은 문득 준희의 페이스에 말려 인사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말 뒤늦은 질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일 중요한 부분을 물어보았다.

“그래서 여기… 뭘 하는 곳인가요.”

“모르고 오신 거예요?”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뭐, 심부름 센터라는 게 원래 하는 일 정해놓고 일하는 데는 아니잖아요. 시키시는 거 중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요.”

정원이 짐작했던 것과 같은 답변이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불법적인 일도 취급한다는 뜻이겠지. 명색이 국가기관 소속으로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이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빈 커피잔을 내려놓은 정원이 꽤나 직설적으로 말했다

“지금 제가 상황이 좀 곤란하게 됐습니다.”

“넵.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빠릿빠릿 대답하던 준희가 아차 하며 덧붙였다.

“말씀드리는 걸 까먹었는데, 다 한다는 건 입금이 됐을 때 얘기예요. 아시죠?”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정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기관은 박봉이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급노동인 것도 아니었다. 정원은 원래 씀씀이가 크지도 않고 돈 나갈 구석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모아 둔 돈이 제법 있었다.

본부나 관장 측에 비용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기에 되도록이면 자신 선에서 해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얼마를 부를지 몰라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싹싹하게 뭐든 말해 보라고 하는 준희에게 정원은 상황을 최대한으로 축약해 설명했다.

“강석주 씨가 지금 저와 임무 수행하는 걸 거부한 상태입니다.”

“네? 음, 네.”

준희는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이제껏 보여준 모습 때문에 ‘왜요? 당장 어제 가이딩 잘해 줬다면서 왜 그렇게 된 건가요? 역시 지금 쓰러져 있는 거죠?’ 같은 장난 섞인 질문을 하는 것도 각오한 상태였는데, 의외로 의뢰인을 대하는 프로 정신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석주도 여태 계속 일을 맡겨온 거겠지.

“이제부터 틀림없이 제게는 숨기고 현장에 나갈 것 같아서요.”

“같이 하는 걸 거부했으면 그렇겠네요. 혹시 그 현장을 찾아 드려야 하는 건가요?”

“그런 셈입니다. 어디서 뭘 하는지 알고, 사건이 생기면 제가 그 현장까지 따라갈 수 있어야 해요.”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정원에게서 나올 리 없었을 말이었다. 남이 어디서 뭘 하는지에 별로 관심도 없고, 안다 해도 졸졸 따라갈 생각은 전혀 없는 사람이 정원이었으니까.

“우와……. 그런 얼굴로 되게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요.”

“그런 얼굴이라는 건 뭔가요. 딱히 무서운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괜히 양팔로 그 자신의 몸을 감싸고 소름이 끼친 척하는 준희에게 조금 의아한 심정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마저 물었다.

“그래서, 가능할까요.”

준희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잠시 생각하던 준희가 곧 난감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음……. 사실 난이도로 따지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왜냐면 지금 정원 씨랑 파트너였는데 그 사람이 쫓아낸 거잖아요? 그럼 이제 가이드가 없겠죠? 그럼 현장 나가서 능력 쓰고 나면 가이드가 필요하겠죠? 그럼 저희한테 연락을 할 테니까, 그럴 때 의뢰자님이 딱~ 나타나시면 되기야 하겠지만요.”

석주가 알면 진심으로 기막혀할 만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준희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사실 이게 좀 도의적인 문제라……. 석주 씨랑 같이 일한 게 얼만데 냉큼 이걸 받아들이기엔 좀, 상호 신뢰가 상하잖아요?”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더 신뢰가 갔다. 정원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방식을 말씀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네? 아니었어요? 당연히 그래서 다른 센터 말고 저희를 찾아오신 줄 알았는데.”

“여길 찾아온 건 명함이 여기 것밖에 없어서예요.”

실제로 이곳이 특별히 가장 뛰어난 심부름 센터일 거라고 생각해서 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우연찮게 명함이 있었고, 석주를 아는 상대이니 편할 것 같았고, 또 준희가 한국인이었기에 노른인에 비해 의사소통이 용이할 것 같다는 몇 가지 작은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얘기를 퍼 날라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걸로는 어차피 한 번이면 효과가 떨어질 테니까요.”

그를 속이고 정원이 대신 나타났을 때 결과야 뻔했다. 일을 맡길 센터를 바꾸겠지. 그래서 정원의 계획은 좀 달랐다.

“그냥 강석주 씨한테 위치추적기만 달아주세요.”

“…우와…….”

정원의 덤덤한 말에 준희가 순수하게 감탄한 듯 탄성을 냈다.

“아니, 말이 되는지나 효과가 있을지 그런 거 다 접어 두고……. 진짜 그런 얼굴로 잘도 그런 얘기를 하시네요?”

이번에는 그런 얼굴이 어떤 얼굴이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그래서, 이건 가능할까요?”

준희는 망설이는 얼굴로 한참 정원을 바라보았다. 짧지 않은 시간 끝에 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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