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할 수는 있어요. 할 수는 있는데….”
준희가 난색을 표했다. 마음에 걸려 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잘하는 짓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정원에게 이미 국가기관에서 붙여 둔 위치 추적기가 있는 상황이라 더 경각심이 없어진 것일지도.
그가 실시간으로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건 관장의 지시 사항이기도 했다. 아마 이곳에 의뢰를 맡겼다고 해도 정원을 질책하지는 않을 터였다. 기관 측에 정식으로 위치 추적을 맡길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으니까.
정원은 덤덤하게 물었다.
“이것도 도의적으로 마음에 걸리나요? 그럼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여기서 다른 심부름 센터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만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니, 할 수 있어요! 저희가 받을게요.”
준희가 손을 내저으며 답하더니, 난감하게 뺨을 긁적였다.
“음, 뭐… 미안하긴 하지만요. 저희도 석주 씨 하루 이틀 본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더 해드려야겠다 싶네요.”
“무슨 뜻인가요?”
“가이드 떼거지로 붙여서 겨우 진정시키고 그러는 게 에스퍼한테 어떻게 좋겠어요? 솔직히 가이드 열 명을 갖다 붙여도 완벽하게 해소가 안 된다는데, 말 그대로 근근이 버티는 거죠.”
맞는 말이었다. 동조율이 낮고 등급이 낮은 가이드를 열 명 붙여 가이딩을 해 봤자 열 배만큼 효과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전에는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S급 가이드 구해다가 붙여 준 적도 있는데, 그때도 별로 재미를 못 봤어요. 상성이 안 좋았다나? 저는 이런 분야 잘 모르지만요~”
“동조율이 낮았나 보네요. 준희 씨는 비각성자이신가요?”
“네. 근데 이런 일 하고 있는 게 신기하죠?”
확실히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유를 물을 정도는 아니었다. 준희도 더 말하지 않고 원래 화제로 돌아갔다.
“영문은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 원래 가이딩 받을 때 그것도 잘 안 하려고 한대요.”
“뭘 말인가요.”
“섹스죠, 뭐.”
어깨를 으쓱하며 거리낌 없이 꺼낸 말이었다. 순간 멈칫했지만 놀란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머쓱해 정원도 덤덤하게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자신에게만 그랬던 게 아니라 남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나.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유감이라고 봐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정 못 견디겠으면 어쩔 수 없이 한댔나, 아님 끝까지 안 한다고 버틴댔나~ 그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제가 그 사람 성생활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건 아니라서.”
“그렇게 버틴다는 건 별일이네요.”
“그쵸? 암튼 싫어하는 건 맞다고 하니까요. 요즘 시대에 설마 혼전순결 뭐 그런 거라도 지키나? 웃기죠, 에스퍼면서?”
“네. 에스퍼한테 정조 관념이 있다는 건 좀 웃기죠.”
정원이 모처럼 공감하는 반응을 보였다. 준희는 내내 혼자 떠들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반응이 나오니 만족한 건지 크게 웃었다.
“어쨌든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정원 씨가 사실 그 사람 어디 야산에 묻어 놓고 가이딩 잘했다고 거짓말하시는 게 아니라면…….”
“…….”
“아니,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구요~”
말없이 바라보자 지레 찔린 것인지 슬쩍 눈을 돌렸다.
“…암튼, 그런 경우만 아니면 솔직히 정원 씨한테 계속 가이딩 받는 게 석주 씨 그 사람한테도 더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맞는 말이었다. 강석주 본인이 거부하고 있다는 게 유일한 문제였지만. 아마 준희는 자신이 사실 석주와 등급이 맞지 않아 그를 가이딩할수록 소모되는 몸이라는 걸 알게 되어도 석주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어제 처음 본 자신보다야 꽤 긴 시간 함께 일했다는 석주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테니까.
그런데 강석주는 대체 뭘까. 모처럼 가이딩을 제대로 해 줄 자신 같은 사람이 나타났으면 반기기나 할 것이지. 쓸데없이 남의 건강 따위를 걱정하고.
다른 생각에 잠긴 사이 준희는 알아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왜 싸우셨는지 몰라도, 보나 마나 석주 씨가 찔 부린 거 아니겠어요?”
“찔을 부린다니…….”
우스꽝스러운 표현에 헛웃음을 흘렸다. 준희에게 석주는 ‘찔을 부리는’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는 것일까. 남들에게 듣는 석주는 정원이 보았던 것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달랐다.
“점잖은 척하는데 은근히~ 속이 좁거든요, 그 사람.”
“잘 아시나 보네요.”
적당히 호응하는 것처럼 대답했지만 그 사실이 은근히 신경 쓰이기는 했다. 자신은 강석주에 관해 조금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정원이 바랐던 바였고,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에 아쉬움을 느낄 일 따위는 없었겠지만…….
이런 생각을 준희가 눈치채지는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럼 진행 상황은 전화로 보고할게요~ 진짜 예민한 사람이라 쉽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의뢰 조건에 관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마치고, 정원은 슬슬 돌아갈 채비를 했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섞인 준희의 말에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평소처럼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왜요?”
어쨌거나 에스퍼는 가이드 없이는 평소만큼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지 못하니까. 게다가 여태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했을 강석주에게 자신이 처음으로 멀쩡한 상태를 선사해 줬으니까, 당장은 괜찮아도 이다음에 능력을 썼을 때 정원이 없다면 그 공백을 느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니 그리 무거운 마음은 아니었다.
* * *
정원의 예상대로였다. 석주에게 위치 추적기를 붙이는 데 성공했다는 연락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도착했다. 기현상이 발생해 혼자 현장에 방문했던 석주가 준희가 일하는 ‘순이네 심부름센터’에 연락을 했고, 그 기회를 틈타 어떻게든 추적기를 설치한 모양이었다.
- 들어 보니까 진짜 상태가 좀 안 좋긴 한가 봐요. 평소보다 가이딩도 더 안 받는다고 하고.
준희가 통화를 통해 전해 준 말 역시 예상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확인해 본 결과, 석주는 정말로 숙소를 옮겼다. 정원이 다시 찾아갈 상황에 대비하기라도 한 걸까. 누가 호텔 앞까지 찾아가서 다시 받아 달라고 애원이라도 할 줄 알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물론 그것보다 훨씬 더 극악무도한 짓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정원은 내심 석주가 혼자서도 잘만 돌아다닐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자신과 함께 지낼 때 매일같이 근처의 관광 명소라거나, 음식점이라거나, 전시회 등의 소식을 들고 와 내밀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지켜본 석주의 생활 패턴은 단조로웠다.
아니, 단조롭다고 하기에도 머쓱했다. 지켜보는 며칠 내내 호텔 방에 틀어박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정원과 함께 지낼 때 유독 이상하게 행동했던 걸까. 아니면 지금이 이상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문제는 문제였다.
그러던 석주가 처음으로 움직임을 보인 것은 위치 추적기를 설치한 지 4일 만의 일이었다. 정원은 그의 움직임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숙소에서 나섰다. 언제든 석주를 따라갈 수 있게 인근 숙소에 자리를 잡아 둔 게 다행이었다.
“저기, 믿고 맡겨 주셔서 정말 감사하기는 한데요. 제가 꼭 운전까지 해야 하는 이유라도…….”
운전석에 앉은 준희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원은 석주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여기 택시 기사들은 다들 영어보다는 노른어를 쓰더라고요. 의사소통도 잘 안 되고, 택시가 따라다니는 건 아무래도 수상한 티가 날 테니까요.”
준희가 한숨을 푹 쉬며 일단 차를 출발시켰다. 석주가 탄 택시를 티 나지 않게 잘 쫓아가면서도 난감한 기색의 투덜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가 조만간 걸리겠는데……. 다른 차 가져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남의 차 빌려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어쩔 수 없잖습니까? 저번이랑 같은 차로 쫓아다니면 준희 씨인 게 다 티가 날 테니까.”
그럴 때마다 정원은 태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마침내 석주가 탄 차가 멈춰 서는 것을 확인하고 준희 역시 인근에 차를 세웠다. 부지런히 차에서 내리려는 정원에게 준희가 물었다.
“여기서 기다릴까요?”
곤란한 얼굴이었다. 석주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모양인데, 그런데도 기다려 줄지 묻는 모습이 꽤 고맙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원은 그럴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준희가 자신의 의뢰를 받았다는 걸 석주가 알게 되면 곤란해지는 것은 준희뿐만이 아니었다.
“아뇨. 돌아가는 건 알아서 하겠습니다. 고마웠어요.”
“그러시다면야.”
준희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정원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대신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석주의 위치를 가리키는 점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허탕이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기현상의 징조를 느끼고 움직인 게 맞았던 모양이다. 석주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땅이 요동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기현상의 형태는 불……. 아니, 용암인 모양이었다.
정원의 계획은 단순했다. 사실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평소 하나하나 치밀하게 작전을 짜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는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냥 바로…….
“강석주 씨.”
현장에 뛰어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