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36화 (36/126)

36.

주위가 평온한 것과 달리 딱 기현상이 일어난 부분의 바닥에서만 용암이 절절 끓고 있었다. 보기에만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화산이 폭발할 때 흘러나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진짜 용암이었다.

겁도 없이 그 사이로 뛰어드니 피부에 후끈한 열기가 끼쳐 올라왔다. 정원의 얼굴을 확인한 석주는 인상을 확 구긴 채로 언성을 높였다.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에요?”

석주에게서 들어본 것 중 가장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바닥을 살피며 고개를 드는 정원에게 그가 다시 화를 냈다.

“이런다고 내 생각이 바뀔 것 같았어요?”

그야 자신이 여기 등장했다고 갑자기 석주가 마음을 고쳐먹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설득하는 게 조금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

“이렇게 안 하면 대화할 기회도 잡기 힘들 것 같아서요. 얼굴 보기 힘들더라고요, 강석주 씨.”

“…….”

“바쁜 와중에 미안합니다.”

사실 얼굴을 보려 했던 거라면 진작 한 번은 보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가 어떤 호텔에 틀어박혀 있는지는 다 알았으니까. 다만 그때 찾아가 봤자 무슨 대답이 나올지 뻔하니 기다린 것이었다.

석주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뒤 손짓했다.

“일단 이쪽으로 와요. 거기 위험하니까.”

“복직시켜 주실 건가요.”

걸음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원의 덤덤한 물음에 석주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복직이라니, 그건 표현이 좀 그런데요.”

“사실상 잘린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니까요. 강제로 송환되게 생겼습니다.”

“여기가 마음에 들면 여행은 계속해요.”

문제없다는 듯한 얼굴로 석주가 대꾸했다. 설마 진심으로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정원이 날카롭게 코웃음을 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거부하시면 강제송환 명령 내려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 말을 하는 순간 발밑이 다시 꿈틀거렸다. 아차 싶어 발을 용암이 없는 곳으로 옮기는 정원을 보며 석주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이쪽으로 와서 얘기해요.”

“파트너로 복직시켜 주실 건가요.”

“이쪽으로 와서, 얘기하자고요.”

석주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고 무거워지고 있었다. 정원은 굳어지는 얼굴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받아쳤다.

“제가 낯을 가려서요. 파트너 말고 다른 사람 옆에는 가기가 힘드네요.”

“정원 씨.”

“가 봤자 안 된다고 할 걸 아니까 안 가는 겁니다.”

경고하는 것 같은 부름에 정원 역시 진지하게 답했다. 말없이 상황을 살피다가, 결국 석주는 대화를 포기하고 알아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부터 정원이 있는 곳까지, 바닥에 널린 용암의 잔해를 차례로 청소하듯 쓸고 지나온 것이었다. 정원이 오기 전에도 작업 속도는 빠른 편이었지만, 지금은 가히 놀라울 만한 속도였다.

마침내 정원의 코앞까지 다가온 석주가 손을 털어내며 물었다.

“왜 자꾸 그렇게 위험을 자처해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내 말 다 들었잖아요.”

“복수해야 한다고 했던 거?”

절절 끓던 용암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질문을 던진 뒤, 그는 대답하는 정원을 보는 대신 바닥에 찍힌 문양 위로 힘을 불어넣었다. 정원은 그의 반듯한 뒤통수를 착잡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흘러나오는 복수라는 말은 꽤 우습게 들렸다.

그도 우습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래서 저렇게 태연한 말투일 수 있는 건가. 정원은 조금 날 선 목소리로 말문을 텄다.

“강석주 씨한테는 별일이 아니겠지만.”

“왜 별일이 아니겠어요? 정원 씨 일인데.”

그러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끊겼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흘러나온 석주의 반박 때문에.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다. 밀어낸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본인이면서. 관장에게 들었던, ‘강석주가 너를 신경 썼다.’는 말을 떠올리게 만들지 않나.

기분이 애매해졌다.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 정원을 여전히 돌아보지 않으며, 석주가 차분하게 말했다.

“정원 씨가 없어도 일은 계속할 거예요. 아마 틀림없이 테프트 사장을 만나게 되겠죠.”

“그러니까 저는 꼭-.”

“그 남자를 죽이고 싶은 거라면 내가 그렇게 해 줄게요. 혹시 정원 씨 손으로 직접 끝장내는 게 아니면 의미가 없다 싶어요? 그런 거면 잡아 놓고 그때 부를 수도 있어요.”

그게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공감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그렇게 해서라도 정원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겠다는 의지인가. 직접 죽이고 싶어 할 가능성까지 고려해 주는 걸 보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닐 텐데, 그렇다고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꺼림칙했다. 그가 대체 왜. 자신과 뭐 어떤 사이라고.

정원이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망설임이라고 생각한 걸까. 석주는 계속 설득했다.

“그때 봤던 사람이 정말로 정원 씨 형은 아닌지, 그것도 신경 쓰인다고 했죠. 그것도 알아볼게요. 혹시라도 살아 있는 거면 어떻게 된 건지, 빼낼 방법은 없는지 그것도 알아볼 테니까.

“왜요.”

결국 물을 수밖에 없었지만 돌아온 것은 전혀 듣지 않는 척하는 동문서답이었다.

“그러니까 정원 씨는 그냥 여기서 빠져요.”

“왜냐고 물어봤잖아요.”

재차 질문하자 석주는 그제야 눈을 돌렸다.

“뭐에 대한 왜인데요? 빠져야 하는 이유, 벌써 설명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왜 자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느냐는 질문은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아서. 아예 화제를 어물쩍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다.

“가이딩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상태 아주 멀쩡해요.”

“필요하실 것 같은데요.”

집요하게 이어지는 질문에 석주가 삐딱하게 웃었다.

“정원 씨가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쓸데없이 고생을 좀 하기는 했죠.”

“네. 그러니까 가이딩해 드릴게요.”

어느 한쪽도 밀리거나 지칠 기미가 없는 대화였다. 석주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소리를 최대한으로 키운 것인지 그가 전화를 거는 신호음이 정원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곧 그 소리가 뚝 끊기고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여보세요? 그때 부탁드렸던 거랑 같은 내용인데요. 네, 같은 호텔로. 아뇨, 별로 힘을 많이 쓴 건 아니라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네, 그래요.”

가이드를 부르는 전화일까. 정원은 석주가 통화를 마칠 때까지 가만히 선 채 그를 바라보았다. 전화를 끊은 뒤 석주는 정원 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혼자 잘 찾아왔으니까 혼자 돌아갈 수도 있죠. 태워 줘야 하는 건 아니죠?”

“…….”

태워 달라고 해서 같이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설득을 시도할까, 고민하며 침묵하는 사이 석주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정원은 굳이 잡지 않았고, 그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바닥에 새겨진 익숙한 무늬의 문양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오늘은 이대로 보내도 상관없을 터였다. 어차피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어쩐지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원은 한참 만에야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억지로라도 조금 가이딩을 해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 * *

“…저기,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요.”

“뭔가요? 급하니까 쓸데없는 내용이라면 다음에 부탁합니다.”

“네……. 저한테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에요.”

몹시 열중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정원을 룸미러로 돌아보며, 준희가 착잡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이렇게 절 기사로 쓰실 거예요?”

“더 나은 운전사를 못 찾는다면 아마 그렇게 되겠죠.”

정원은 뻔뻔하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준희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핸들 위로 살짝 몸을 숙였다.

“신호 들어왔습니다. 빨리 출발하시죠.”

무덤덤한 정원의 목소리에 준희는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뱉고, 시키는 대로 순순히 차를 출발시켰다. 잔뜩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운전 실력에는 손색이 없었다. 평범한 차를 레이싱카라도 되는 것처럼 능란하게 모니 이 운전사를 포기하기 힘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인데요. 뭔가 효과는 있었어요? 되겠다 싶어요? 제가 보기에는 역효과 같은데…….”

준희가 회의적인 말투로 말했다. 실제로 석주가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준희를 호출해 그를 쫓아다닌 결과, 그를 마주친 것만 세 번이었다. 처음을 포함한 두 번은 기현상이 일어난 현장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그냥 살 것이 있어 나왔다 우연히 마주친 석주를 붙든 것이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석주의 반응은 일관적이었다. 완고하고 싸늘했다. 그러니 준희도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겠지만, 정원의 표정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저는 최고의 설득 방식은 삼고초려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미 세 번은 넘기셨는데요?”

“그건 옛날 얘기니까요. 시대에 맞춰서 보완이 조금 필요하겠죠.”

준희는 영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정원에게는 내심 확신이 있는 상태였다. 차가 멈춰 선 자리에서 문을 열어 내린 뒤, 정원이 차 안으로 다시 고개를 내밀며 덧붙였다.

“오늘도 안 되면 그때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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