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정원의 모습을 보자마자 석주가 꺼낸 말이었다. 그답지 않게 짜증을 참는 투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여기서부터 주눅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원은 덤덤했다.
“이러지 않아도 될 때까지 하겠죠.”
“하아……. 했던 말을 몇 번씩 하려니 지치네요.”
“저는 아직 괜찮은데요. 강석주 씨도 기운 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뻔뻔한 대답에 강석주의 얼굴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시선이 오래 뒤엉켰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먼저 눈을 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입을 연 것은 석주였다.
“이제 그만해요. 정원 씨가 돌아가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여태 말 안 했던 건데, 계속 이런 식으로 위험하게 현장까지 찾아오면 나도 본부에 연락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강제송환 싫다고 했잖아요.”
석주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반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원은 탐색하듯 그를 살폈다. 이게 가이딩을 제대로 받지 못해 예민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을 지긋지긋해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히 살필 필요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전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잘 맞는 가이드에게 제대로 된 가이딩을 한번 받았다가, 다시 동조율이 낮은 가이드의 손길로 근근이 연명하려면 힘든 게 보통이니까. 그렇지만 석주에 관해서는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전혀 힘들어 보이지도 아파 보이지도 않는 기색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고 계속 이렇게 찾아오는 건지 의아하기도 했는데… 몇 번 이러다 그만두겠지 싶어서 굳이 캐지 않았던 거예요. 정말 알아볼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보나 마나 뭐, 준희가 또 오지랖을 부렸겠죠.”
“잘못 짚으셨네요.”
일단 잡아떼기부터 했다. 석주는 딱히 그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가볍게 코웃음을 칠 뿐 트집은 잡지 않았다. 정원은 그때를 틈타 물었다.
“하나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정원을 가만히 마주 보던 석주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말해 봐요.”
“제가 걱정돼서 가이딩을 거부하시는 게 맞나요.”
“뭐라고 대답해야 정원 씨 성에 찰까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는 게 좋겠죠.”
석주는 잠시 정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샛노란 눈동자에 모처럼 움찔, 하는 동요가 보였다. 곧 석주가 지쳤다는 듯 픽 웃었다.
“내가 정원 씨 때문에 내 몸 축내 가면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정원 씨가 부탁하면 들어줄 줄 알고 이렇게 끈질기게 찾아오는 건가?”
일부러 사람을 머쓱하고 민망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듯한 말투였다. 역시나 정원이 아니었다면 진작 물러서고도 남았을 것이다.
“정원 씨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에요. 나 때문에 몸이 망가질 텐데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어요. 그런데 그게 정원 씨를 위해서 날 희생한다거나, 그런 뜻이라고 생각하는 건 좀 곤란한데.”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살짝 머쓱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석주는 잠시 무감정한 듯 알 수 없는 눈으로 정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난 그냥, 남한테 내가 그런… 재해 같은 뭔가가 되는 게 싫어요. 그래서 가이딩 맡길 때도 한 번 왔던 사람들은 다시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고.”
“…….”
“정원 씨도 한두 번이었으면 상관없었겠죠. 그러니까, 내가 특별히 정원 씨 때문에 이런다거나-.”
정말로 그게 석주의 본심인 걸까? 재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
확실히 에스퍼가 아닌 이들은, 설령 가이드라고 해도 에스퍼를 불가해의 자연재해 비슷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에스퍼 중 그 사실에 유감을 갖는 이는 딱히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반기면 반겼지.
“…다 맞는 말인 건 압니다. 저도 강석주 씨가 절 무척이나 특별하게 생각해서, 다른 사람이라면 이러지 않았을 건데 나한테만 이런다거나…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고민하던 정원이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어쩌면 석주가 실제로 정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에스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기에는 일부러 빈정거리는 듯한 저 말투와 관장이 했던 말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절 신경 쓰셨다면서요?”
자신의 입으로 이 말을 꺼내게 될 줄은 몰랐다. 석주는 잠시 멈칫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요?”
“네, 관장님이 그러시던데요. 강석주 씨가 날 신경 썼고, 우리가 아는 사이였다고 했다고.”
“…….”
“아닌 건 아니라고 쳐도, 이건 대답해 줬으면 좋겠네요. 우리 아는 사이였나요?”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만큼이나 우습게 들리는 말이었다. 석주는 정말로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은 사람 같기도 하고, 허를 찔린 사람 같기도 했다.
대답은 그리 길지 않은 사이를 두고 나왔다.
“글쎄요. 얘기가 잘못 전달된 거 아닐까요.”
아주 잠시 혼란스러워 보였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지극히 담담한 어투였다.
“내가 정원 씨를 알고 있기는 했죠. 우리 본부에서 거의 유일한 S급 가이드였으니까. …뭐, 실제로는 아니었지만.”
덧붙인 말에 어쩐지 뼈가 박힌 느낌인데. 그것 또한 딱히 찔리지는 않았다. 가볍게 무시했다.
“아는 사이라고 했던 적은 없다는 건가요?”
“그렇죠. 그게 중요해요? 그냥 아무거나 트집 잡고 있는 거죠?”
정원은 생각에 잠겼다. 이 실랑이가 지루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석주의 모습은 진심처럼 보였다. 오늘도 능력을 사용했으니 힘들어 보이는 것이 정상인데 그런 기색조차 없이 멀쩡했다. 정말로 정원의 가이딩 없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건가.
“강석주 씨. 몸은 괜찮으신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석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비슷해요. 안 괜찮아지기를 기다리는 거면, 아마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가요…….”
이제는 정말로 그의 말대로 포기하는 게 맞는 걸까. 아는 사이였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신경을 많이 썼다는 말에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네가 아니어도 똑같았을 거다.’ 같은 뉘앙스의 말까지 하며 완고하게 거부하니, 계속 이렇게 쫓아다니는 것도 의미가 없을 거라는 회의감도 조금 들었다.
차라리 그와 같이 다니는 건 포기하고… 혼자서라도 ‘그 남자’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게 좋을까. 만약 강제송환 명령이 내려오더라도 거부하면 된다. 후환이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테프트의 사장을 제대로 찾기만 한다면… 후환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석주 없이는 그를 찾아낼 가능성이 확연히 줄어든다는 것 하나였다. 그러니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오기와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는 회의감이 뒤섞여 머릿속이 복잡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정원은 석주를 빤히 보다가 문득 물었다.
“혹시 제가 각인을 해 달라고 하면 뭐라고 하실 건가요.”
“…….”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 된 탓인지 거의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었다.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원은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석주의 얼굴 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자신이 본 것이 과연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정도였지만. 제대로 본 게 맞나, 의아한 마음에 그의 얼굴을 조금 더 면밀하게 살폈다.
착각이었나……. 다시 본 석주의 얼굴은 복잡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냉랭할 정도로 굳어 있기만 했다.
“각인은…….”
무겁게 숨을 삼킨 석주가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각인은 안 돼요.”
표정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였다. 정원 또한 그가 받아들일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관장이 지나가듯 농담했을 때부터 이미 강석주에게는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겠죠. 아무래도 그렇게 부담이 큰 건.”
“…….”
“그러면.”
수긍한 뒤, 일단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든 정원은 예상치 못한 석주의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석주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복잡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정원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방금의 싸늘한 얼굴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잘도 그렇게 위험한 것만 들이미네요.”
“…….”
그 말은 짐짓 태연함을 가장한 채 흘러나왔지만…….
태연한 척하고 싶었으면 좀 더 확실하게 했어야지. 저렇게 혼란스러워 보이는, 누가 봐도 신경 쓰는 얼굴로 말해 봤자 믿음이 갈 리 없지 않나.
“위험해서 거부하는 건가요?”
“하아…….”
“보통 각인할 때 위험해지는 건 등급이 더 낮은 쪽이죠? 제가 걱정되시나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걱정되는 건 맞지만 정원 씨라서가 아니라-.”
“그런데 그런 표정을 지어요?”
계속해서 묻는 정원의 말에 결국 석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정원과 거리를 좁혔다. 기묘한 위압감에 뒤로 물러설 뻔했지만 겨우 그러지 않고 버텼다. 짓눌리는 듯한 감각. 일부러 자신의 기운을 가득 실어 정원을 찍어 누르려 하는 게 분명했다.
석주가 정원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절로 뒤로 젖혀진 정원의 몸은 순전히 석주의 팔에 의지한 덕분에 쓰러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정원을 보며 석주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겨우 이걸로 이렇게 창백해지면서 파트너는 무슨 파트너고, 각인은 무슨 각인이에요?”
“…….”
“가세요, 정원 씨.”
어쨌든 버티고는 있지 않냐고, 그런 건 알 바 아니니 파트너로 복귀시켜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정원을 내려다보던 석주는 한순간에 정원을 짓누르던 기운을 거두었다. 잔뜩 찌푸려진 정원의 미간을 손으로 꾹 누른 그가 미련 없이 몸을 바로 세웠다.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