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38화 (38/126)

38.

그 이상 버틸 수도 없었다. 강석주는 정원을 바로 세워 둔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났고, 그를 부르거나 쫓아가 잡기에는 기운에 눌려 멀쩡하지 못했다.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강석주가 말처럼 태연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긴 했으니까. 그러나 그걸 아는 것만으로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원을 왜, 얼마나 신경 쓰고 있든지 간에 파트너로 복귀시켜 주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다.

준희에게는 이번에도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해 뒀는데, 그 다른 방법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런 식으로 다시 쫓겨나듯 보내졌으니 다음번에는 또 어떤 식으로 찾아가 만나야 할지 그것부터가 막막했다.

관장에게 연락을 해 봐야 할까. 만약 강석주가 계속해서 이렇게 임무를 거부하더라도 복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준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급한 용건이었는데.

종일 노트북을 붙잡고 테프트의 동향을 파악하고 어떻게 석주의 뒤를 쫓나 생각하느라 핸드폰은 확인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찍힌 뒤에야 준희가 연락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원은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무슨 일이었나요?”

- 살짝 비상이에요. 석주 씨가 위치추적기 찾아냈더라구요. 벌써 부수는 바람에 지금 추적이 안 되고 있어요.

“아.”

어제 그 만남 이후에 부숴 버린 걸까. 하긴, 그렇게 감이 좋은 남자를 상대로 지금까지 멀쩡했던 게 기적이다.

여태 할 수가 없어서 두고 본 것이 아니라 몇 번 하고 말겠거니 싶어서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거라는 말이 그냥 한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말을 하자마자 바로 위치추적기를 찾아낸 것을 보면.

- 아마 다시 달려고 해도 같은 걸로는 안 될 것 같고, 좀 더 작고 알아채기 힘든 최신형으로 붙여야 될 것 같아요. 또 무엇보다 다시 붙이려면 다시 만나야 하는데, 석주 씨가 아무래도 절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또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라고 말은 했는데 안 믿은 모양이네요.”

- 믿겠어요? 정원 씨 노른 현지에 아는 사람도 없다면서요. 달리 누구한테 그런 부탁을 했겠어요. 어휴, 괜히 이번 일 받아서 단골만 잃게 생겼네. 부려 먹히기나 하고.

준희가 과장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정말 화가 난 거라면 진작 의뢰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쩌지. 지금이 아니면 또 ‘그 남자’를 언제 뒤쫓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막막함에 긴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막 도착한 메일을 클릭해 내용을 확인한 정원의 눈이 빛났다.

“…그거 말인데, 이제 괜찮습니다.”

- 네? 뭐가 괜찮아요?

“당분간 새 위치추적기는 달 필요 없을 거라고요.”

- 뭐예요, 이제 쫓아다니는 거 포기하셨어요? 삼고초려라더니~ 하긴 벌써 네 번이나 실패하기는 했죠.

준희의 대답에는 살짝 ‘그럴 줄 알았다.’ 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지칠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꼭 실패해서는 아니에요. 이제 그 사람이 어디로 갈지 알 것 같아서 그러는 겁니다. 같이 있으면 위치추적 같은 건 필요 없지 않겠어요?”

- 같이 지낼 수 있게 됐어요? 저번에 봤을 때 무슨 진전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강석주가 직접 자신이 갈 곳을 알려 준 것도 아닌데, 그럴 리가. 호기심이 가득해 보이는 준희에게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은 채,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정원은 막 도착한 메일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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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FT 신입사원 공개 모집에 관심을 갖고 지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보낸사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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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테프트 노른 지부 인사 담당자입니다.

지난번 테프트에서 개최한 신입사원 공개 모집 설명회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중단되어 지원자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해당 설명회에 참석했던 1차 서류 전형 합격자를 대상으로 2차 면접 전형을 실시합니다.

2차 면접 전형은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구분하여 진행됩니다.

일자: XXXX년 X월 X일

장소: 테프트 노른 지부 인재개발양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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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프트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그날 테프트는 분명 비각성자들을 그 방에 모아둔 채 건물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테프트가 진심으로 비각성자 직원을 모집하려던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럼에도 굳이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따로 나누기까지 하면서 다시 비각성자들을 불러들이는 이유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현장을 그 꼴로 만들어 놓고 사라진 게 누구인지 알아내려는 것이리라. 덕분에 건물과 함께 생매장당할 뻔했던 비각성자가 모두 목숨을 건졌으니, 대체 그중 누가 상황을 꼬아 놓았는지가 궁금할 만도 하다.

당연히 석주도 이 연락을 받았겠지. 생각해 보면, 자신은 테프트에게 메일 주소를 넘긴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도 정원에게 연락이 도착했다는 건 가짜 초대장을 받아 온 강석주가 정원의 메일 주소를 적어 냈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쯤 그 일을 후회하고 있으려나.

그 또한 혼자서라도 임무를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어쨌거나 그는 싫어도 정원을 다시 볼 수밖에 없을 터였다.

* * *

가면을 꼭 쓰고 참여해야 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오히려 절대 얼굴을 가리지 않는 것이 필수였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는 게 너무 분명해 보였다.

테프트가 지원자들을 불러낸 장소는 인재개발양성소. 지부 건물과는 별개로 에스퍼와 가이드의 훈련을 위해 따로 지어 둔 훈련소 개념의 건물이었다. 새로 지었던 건물에는 훈련용 시설이 아예 그 안에 딸려 있었는데, 그 건물이 이번 일로 너덜너덜해졌으니 당분간은 이 훈련소를 계속 이용해야 할 터였다.

이번에도 건물은 적지 않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정원이 데스크 앞으로 다가가자, 직원이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띤 채 질문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존… 존 데논입니다.』

누군가의 짝퉁 같은 이름은 초대장 원래 소지자의 이름일까, 아니면 석주의 작명 센스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명단을 확인한 직원이 다시 친절하게 웃어 주었다.

『네, 확인되셨습니다. 여기 이 번호표를 가슴에 달아 주시면 돼요.』

32번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내려다보며 정원이 물었다.

『지원자가 총 몇 번까지 있나요?』

『마지막 지원자가 51번이실 거예요.』

『지난번에 설명회장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잖습니까?』

슬쩍 운을 떼자 직원은 짐짓 침통해 보이게 표정을 바꾸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죠. 덕분에 새 지부는 완전히 못 쓰게 됐지만… 그래도 인명 피해가 없었으니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그 현장에 계셨던 거죠? 무서우셨겠어요.』

『네. 그때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으니까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몸을 떠는 시늉까지 했지만 과연 효과가 있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번에도 비즈니스적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직원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지원자 51명이 빠짐없이 참석한 건가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무서워서 못 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요.』

『아, 지원 포기하신 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두 명 정도 불참 의사 밝히셨어요. 아마 오늘 면접 보시는 건 49명일 거예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포기했다는 두 명은 신원이 어지간히 확실하지 않은 이상 의심의 대상이 될 터였다. 설마 그 중 강석주가 끼어 있지는 않겠지? 분명 정원이 없더라도 사건은 계속 해결할 거라고 말했으니, 이런 중요한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 지원자분 성함 말씀해 주시겠어요?』

정원이 생각에 빠진 사이, 다른 지원자가 온 모양이었다. 직원의 말을 들은 정원은 급히 옆으로 몸을 비키며 앞을 막았던 것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강석주였다.

“…….”

정원이 살짝 얼굴을 굳힌 사이 그는 데스크 앞에 서 이름을 댔다.

『데이비드입니다.』

『데이비드, 데이비드……. 아, 데이비드 베톰 씨 맞나요? 확인되셨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축구선수의 짝퉁 같은 이름. 정원과 바로 붙어 있는 31번 이름표. 누가 봐도 혹시 무슨 연관이 있나 싶은 조합이건만, 석주는 정원을 본체만체하며 스쳐 지나가 버렸다.

바로 쫓아가 말을 붙이려 했다.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어엇! 혹시 그때 그분 아니세요?』

자신을 삿대질하며 나온 말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분명 처음 보지만 어쩐지 익숙한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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