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느낌이 딱 비슷한데? 맞죠?』
정원은 의아함에 얼굴을 구길 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만난 사람 중에는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난번에는 가면을 쓴 상태였으니까. 그렇다고 밖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완전히 낯선 얼굴의 외국인이었다. 머리 색은 흔한 밀짚색이고 머리 모양도 흔한 곱슬머리였다. 지금 이 층에만 비슷한 스타일을 한 사람이 세 명은 더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사실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순전히 부산스럽게 말을 거는 분위기가 닮았다뿐이지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이라, 상대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대답하지 않았더니 남자 쪽에서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저 그때 노란색 가면 쓰고 있었던 사람인데, 기억 안 나세요?』
『음…….』
예상대로라고 해야 하나, 정원이 떠올린 바로 그 사람이기는 했다. 그러나 정원은 그에게 말을 건 것도 아니고, 그때와 달리 머리까지 차분한 갈색으로 염색하고 왔는데. 자신도 그처럼 가면을 쓰지 않았을 때와 썼을 때의 분위기가 비슷하기라도 한 걸까.
그날 이 남자에게 들킨 건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굳이 아는 척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정원은 시치미를 뗐다.
『잘 모르겠네요. 그날 비슷한 가면을 워낙 많이 봐서. 무슨 대화라도 했었나요?』
『기억을 못 하시는 걸 보면 다른 분인가 봐요. 머리 색이 달라서 혹시나 하긴 했는데, 왠지 느낌이 그래서……. 실례했습니다.』
괜찮다는 뜻으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그와 대화하는 사이 석주는 어느새 자리를 떠난 뒤였다. 예상했던 대로이기는 했다.
그런데 찾던 사람도 아니겠다, 적당히 물러날 줄 알았던 남자는 이번에도 정원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그럼 그때 그 양반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되고 나서 찾아봤는데 보이질 않더라고요. 그날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글쎄요……. 들어 보니 지원자 중에 딱히 잘못된 사람은 없다고 하던데요.』
처음 본 사이였고 대화 몇 마디를 했을 뿐인데 뭘 그렇게까지 마음을 썼는지 의아했다. 그래도 걱정하는 듯해 넌지시 괜찮을 거라는 뉘앙스로 대답을 해 주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남자가 곧 자연스럽게 화제를 옮겼다.
『참, 면접 준비는 하셨어요? 대체 이런 회사에서는 면접을 뭐 어떤 식으로 보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일단 다른 회사에 맞춰서 열심히 준비하긴 했는데 영 불안하네요. 근데 당신은 이름이 뭔가요?』
『존입니다.』
『그렇군요. 난 알렉스예요. 존도 면접 대비 좀 했나요?』
여기서 계속 대화를 나누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정원은 배를 감싸 쥐며 갑자기 말을 돌렸다.
『저, 죄송한데 제가 지금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가야 할 것 같네요.』
『엇. 그쪽도 긴장한 모양이네요. 너무 태연해 보여서 혼자 자신감이 넘치는 줄 알았더니.』
『네……. 그랬나 봅니다.』
『어쩐지 얼굴이 너무 창백하긴 하더라고요. 하하! 얼른 가 봐요.』
당연히 자리를 빠져나오기 위한 거짓말이었지만, 모른 척 아예 다른 곳으로 가 버리려니 알렉스의 집요한 시선이 여전히 등 뒤에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정원은 뱉은 말대로 하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세면대 앞에 서서 이미 깨끗한 손을 괜히 더 박박 씻어냈다. 물기까지 말끔히 닦은 뒤 화장실 밖으로 나오려던 때였다.
“네, 네. 거의 확실합니다.”
멈칫한 정원이 문 뒤로 슬쩍 몸을 숨겼다. 테프트가 한국 기업이기는 했지만 국외인 탓에 영어나 노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절대다수였는데, 지금 들린 것은 익숙한 한국어였다.
“두 명이 불참인데요. 알아본 결과 하나는 광고 회사 직원이고, 하나는 자영업자라고 하네요. 두 사람 사이의 명확한 연관성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여기까지만 들어도 자신과 뭔가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는 느낌이 왔다. 정원은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하, 하지만 둘 중 하나는 외관이 확실히 일치해요! 170 후반 정도 되는 키에 회색 머리카락이요. 네, 규혁 씨가 말한 그대로죠. 다른 한 명은 아직 확인 중입니다.”
역시.
그가 말한 인상착의는 정원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색을 덮었을 뿐 본래 그는 회색 머리였으니까. 보아하니 박규혁은 예상대로 무사하고, 그날 보았던 정원과 석주의 인상착의에 대해 이야기를 해 둔 모양인데… 우연찮게 오늘 참석하지 않은 사람과 정원의 인상착의가 겹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평소 행적에 대해서도 알아보는 중입니다. 일단 광고 회사 쪽은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다는 것 같아요. 눈에 띄지 않는 편이었다고 하니 에스퍼였다고 해도 동료들이 잘 알 수가 없었겠죠. 네. 저희는 그 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오지 않은 사람들을 그날 상황을 망쳐 버리고 떠난 정원과 석주라고 단단히 헛다리를 짚은 모양이었다. 정원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럼 오늘 전형은 어떻게 할까요? 적당히 하는 척만 하고 합격자 없이 돌려보낼까요?”
그건 곤란한데? 정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 그야 물론… 그렇죠. 사람들 반응도 신경 써야 하니까요.”
꼭 정원의 속마음에 대답하듯 기막힌 타이밍에 그 대답이 나왔다.
“그럼 그나마 제일 성적이 좋은 한 팀만 전원 합격시키는 걸로 처리하겠습니다. 예에, 들어가십쇼.”
허공에 대고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그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는 바람에, 화장실 문을 쥔 상태로 서 있던 정원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정원은 자연스럽게 지금 막 문을 열고 나가던 사람인 척 행세했다. 그가 반신반의하는 듯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 왔다.
“어? 혹시… 들으셨습니까? 한국인이세요?”
『죄송합니다. 중국어 몰라요.』
정원은 얼굴을 찌푸리며 천연덕스럽게 영어로 대답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한국어를 생판 다른 외국어로 오해받는 게 가장 짜증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심이 컸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오늘 입사 시험 보러 온 분이신가요? 힘내세요!』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주먹까지 불끈 쥐어 가며 응원을 해 주었다. 정원은 덩달아 주먹을 한번 불끈 쥐어 보인 뒤 태연하게 자리를 떠났다.
‘정말 허술하네.’
사실 에스퍼들 중 이렇게 허술한 사람은 꽤 많았다. 모든 일을 능력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초능력 이외의 분야에서는 은근히 세상 물정을 모르고 순진해지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정원처럼 예민한 가이드가 에스퍼를 잘 알아보듯 에스퍼 중에서도 감이 좋은 사람은 가이드를 알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케이스는 아닌 모양이었다. 오늘 오지 않은 두 명의 지원자가 바로 자신들이 찾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본의 아니게 중요한 정보를 잔뜩 흘려 주었으니 정원으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느긋한 척 걷던 정원은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곧 마음 급하게 발을 옮겼다. 이 사실을 석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예상하건대 오늘의 면접 전형은 단순 면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팀을 이뤄서 어떤 시험을 치르는 형식인 듯했다. 그것을 1등으로 통과하기만 하면 강석주가 에스퍼라는 걸 드러낼 필요도 없이 테프트에 잠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터였다.
물론 두 사람이 같은 팀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지만…….
어차피 명분상 어쩔 수 없이 치르는 시험 같았고, 그렇다면 성의 있게 팀을 정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정원의 생각이었다. 기껏해야 번호순으로 몇 명씩 끊을 텐데, 31번과 32번으로 붙어 있는 석주와 정원은 한 팀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정원의 예상은 이번에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단순한 면접으로는 여러분의 역량을 모두 파악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지원자들이 한 방에 모이자마자 시험관이 그 말을 꺼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설명이 이어졌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5인, 혹은 4인이 한 조가 되어 저희 테프트 인재 양성소에서 준비한 시험을 치르시게 될 텐데요. 어렵거나 위험한 시험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상황 대처 능력과 협동력을 볼 예정입니다.』
『팀이란 건 어떤 식으로 나누는 겁니까? 랜덤인가요, 아니면 지원자끼리 임의로 모이면 되는 건가요?』
『네,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 아는 사이이신 분은 거의 없으실 테고, 그렇다고 저희가 임의로 개인정보를 취합해 팀을 정해 드리는 것도 좋지 않을 듯해 제일 간편하고 공정한 방법을 준비했는데요.』
정원은 방 안에서 석주의 모습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구석도 중앙도 아닌 곳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슬쩍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설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다들 번호표를 받으셨을 텐데요. 번호표에 적힌 순서대로 1번부터 5번까지, 6번부터 10번까지, 이런 식으로 팀이 됩니다.』
곤란하다는 투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이리저리 섞이는 가운데 정원은 마침내 가까워진 석주에게 작게 속삭였다.
“강석주 씨.”
석주가 힐끗 눈만 돌려 정원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