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강석주 씨. 중요한 얘기예요.”
“…….”
“강석주 씨. 제 말 좀 들어 보시죠. 오래 걸리는 얘기도 아닙니다.”
정원은 인내심을 갖고 계속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석주는 귀가 막힌 사람처럼 팔짱을 낀 채 시험관의 설명만 듣고 있었다.
『지원해 주신 분 중 34번, 48번 지원자님이 불참하셨는데요. 따라서 31번부터 35번 지원자님 팀은 4인 1조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명이 빠진 데 대한 어드밴티지는 나름대로 드릴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고요. 51번 지원자님은 46번부터 50번 팀으로 들어가 주시면 되겠습니다.』
31번부터 35번까지라면… 하필 정원이 속한 팀이었다. 석주의 팀이기도 했다. 정원은 틈을 살펴 또다시 말을 걸었다.
“강석주 씨.”
『그게 누굽니까?』
“…….”
마침내 대답이 나오기는 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게 상당히 황당했다. 못 알아듣는 척을 하겠다고? 멀쩡히 한국어로 말을 걸었는데 뜬금없이 영어로 대답하기까지 했다.
오늘따라 그가 심통을 부리는 초등학생처럼 느껴진다고 하면 착각일까. 정원은 얼굴을 구기면서도 속으로 참을 인 자를 새기며 대꾸했다.
“그러세요. 그럼 데이비드 씨. 잠깐 할 얘기가 있습니다. 이번 시험에 관한 정보인데…….”
그 말에 석주가 고개를 돌려 정원 쪽을 내려다보았다. 시험과 관련된 정보라는 말에 그도 흥미가 생긴 걸까? 그러나 정원이 말을 이으려 하기도 전 그가 받아쳤다.
“지금 이거 부정행위예요?”
딱 자신의 귀에만 들릴 만큼 작고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귓구멍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 찌릿할 만큼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에 비해 말의 내용은…….
“그렇게 안 봤는데 야비한 사람이네, 정원 씨.”
…이번에도 역시나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정원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이를 갈았다. 이렇게 유치한 말에는 자신 역시 유치하게 반응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정원이라니 그건 누군가요. 강석주가 누군지는 모른다면서.”
“정원이나 존이나 발음이 비슷하지 않아요?”
어이없는 억지에 정원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
예상했던 대로 석주와 같은 팀이 되기는 했지만, 이런 상태의 석주를 데리고 과연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저한테 민폐나 끼치지 마시죠. 중요한 시험이니까요.”
재차 이를 갈며 뱉은 말에 석주가 픽 웃었다. 이번에도 멋들어지게 휘어지는 입매가 보기에는 좋았다. 보기에만.
“각자도생, 자력갱생. 몰라요?”
혼자 잘해서 될 상황이 아니니까 그러지. 가장 잘한 한 팀만 통째로 합격시킬 거라는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하는데, 들을 생각도 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담당 시험관의 설명이 모두 끝난 뒤 배정받은 팀원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주어졌다. 사람들은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며 제각기 가슴팍에 붙인 번호표를 살폈다. 먼저 소리 높여 ‘16번부터 20번 팀 계신가요?’라고 묻는 사람부터 구석에 서서 눈치를 살피는 사람까지, 다양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유일하게 4인 1조인 팀에 배정된 것도, 강석주와 한 팀이 된 것도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심정으로는 상당히 별로인데.
정원은 겨우 모인 세 명의 팀원을 눈으로 살폈다. 강석주와 정원, 그리고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33번 여성 지원자 한 명, 마지막으로…….
『어! 여기서 또 만나네요. 아까 화장실은 잘 다녀왔어요?』
노란 가면의 남자, 알렉스였다.
『네. 아주 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얼굴색은 창백한 게 별로네요. 속이 많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
『그래서, 저희 미션에 대한 거 말인데요.』
계속 이어지는 알렉스의 화장실 토크를 끊어 준 것은 33번 지원자였다. 저 쓸데없는 말에 대답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반가운 심정으로 고개를 돌려 집중했다.
『어제 이 건물에서 각성자 대상으로도 입사시험을 봤다는 거 아시나요?』
『아, 정말이에요? 처음 들어요. 그 날짜는 안 나와 있었잖아요.』
제일 먼저 반응한 것도 알렉스였다. 그냥 말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계속 자신이 하던 말에 집착하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보다 각성자를 대상으로 하는 입사시험도 벌써 치른 뒤라는 건 정원도 지금 처음 알았다. 공개되지 않은 정보였기 때문이다. 33번 지원자가 고개를 끄덕이곤 설명했다.
『아는 사람 중에 거기 지원한 사람이 있거든요.』
『에스퍼 지인이 있어요? 신기하네.』
『에스퍼도 에스퍼 나름이니까요. 아무튼, 거기서도 이거랑 비슷한 형식으로 시험을 쳤대요.』
알렉스가 알아서 최선을 다해 반응해 준 덕분에, 정원은 가만히 앉아 내용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 양성소 유명하잖아요? 에스퍼들 훈련 시설 있는 걸로? 거기 장치를 이용해서 과제를 냈다는 모양이에요. 뭐, 굴러오는 거대 쇠공을 피한다거나 다리 없이 강을 건넌다거나… 대충 이런 것들이었나 봐요.』
『초능력을 잘 써서 돌파하는 사람이 합격, 이라는 거겠네요?』
『네. 아무래도.』
그녀가 말한 것들은 여타의 사기업에서도 에스퍼의 능력 시험을 위해 볼 만한 항목이었다. 그러나 비각성자만 모여 있는 지금 이야기하기 적당한 내용은 아니었다. 뭔가 이유가 있을 듯했다. 정원이 차분하게 물었다. 처음 끼어드는 셈이었다.
『그런데 그 얘기를 지금 하신다는 건?』
『네, 생각하시는 대로예요. 오늘 시험 내용을 들어 보니까, 어제 했던 걸 오늘도 그대로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긴 하지만요.』
그 말에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펄쩍 뛰며 답한 것은 또 알렉스였다.
『아니, 그건 애초에 초능력자 대상으로 내준 미션 아니에요? 우리 같은 비각성자가 거대 쇠공 같은 걸 맨몸으로 어떻게 상대합니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반박이었다. 정말로 그런 과제가 나올까 봐 겁에 질린 얼굴 같기도 했다.
『난이도를 낮추거나 도구를 줄 수는 있겠지만……. 생각해 보세요, 시험 장소도 똑같고 날짜도 하루밖에 차이가 안 나잖아요? 솔직히 에스퍼나 가이드 같은 중요 인력을 뽑는 것도 아니고 비각성자 대상으로 뭘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겠어요.』
그러자 33번 지원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자신도 비각성자이면서 중요 인력도 아니라는 말을 하는 태도가 상당히 신랄했다. 알렉스가 머뭇머뭇 반박했다.
『하지만 그래도… 비각성자한테도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로 부른 건데.』
『기회를 준댔지, 누가 합격시켜 준다고 했나요? 아무튼 제 생각은 그렇다고요.』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거면 지원은 뭐 하러 한 겁니까?』
그 냉랭한 반응에 알렉스는 꽤 마음이 상한 것 같았다. 상황이 어째 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싸움이 붙었던 것과 비슷하게 흘러가는데.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에 그날 피했던 것처럼 슬쩍 알렉스의 시야 밖으로 몸을 물려 앉았다. 그러나 33번 지원자는 삐딱한 반응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쨌든 좋은 직장이기는 하잖아요? 운 좋게 쇠공 잘 피해서 합격하면 좋은 거죠.』
알렉스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곧 ‘설마 그런 미션이겠어.’ 하고 혼자 중얼거린 뒤 더 답하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싱숭생숭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던 시험관이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혹시 지원 포기하고 싶은 분들 계신가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일제히 고개를 내밀고 다른 사람들의 동향을 살폈다.
『다른 팀들 보세요. 손 드는 사람들 있어요?』
『딱히 기권하려는 사람은 없어 보이네요. 불안해 보이는 사람들은 있어도.』
정원이 남들의 모습을 쭉 둘러본 뒤 대답했다.
『하긴, 미션 내용이 그럴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테니까요. 저희도 다들 도전하는 거 맞죠? 안 그래도 사람이 네 명인데 누가 더 빠지면 곤란해요.』
『당신이 괜히 겁만 안 줬어도 곤란할 일 없었을걸요.』
볼멘소리를 하는 알렉스를 힐끗 돌아보며 그녀가 대꾸했다.
『제 이름은 제니예요. 그래서 기권하시겠단 건가요?』
『흥, 누가 그렇대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테프트에 입사하고 싶어 지원한 사람들이니만큼 여기까지 와 놓고 빠지지는 않을 터였다. 위험한 미션도 없을 거라고 미리 장담했으니 겁을 먹을 이유도 없고.
제니는 정원에게도 변동 없이 참가할 거냐고 질문을 던졌고, 정원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석주였다.
그래도 간간이 몇 마디 끼어든 정원과 달리, 석주는 대화가 마무리될 때까지 공기처럼 가만히 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재촉하듯 바라보자 그제야 가만히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