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42화 (42/126)

42.

이후 이어진 미션도 제니가 말했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아마 제니가 이 시험을 쳤다는 에스퍼 친구에게 더 많은 내용을 들어 왔다면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 시험 내용을 다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관문은 굴러오는 쇠공 피하기였다.

『거대 쇠공이었다고 했죠?』

『네. 사람 키보다 높이가 높고 속도도 보통이 아니었대요.』

『그거에 비하면 확실히…….』

할 만한 강도였다. 에스퍼를 상대로 시험을 칠 때에 비해 난이도를 상당히 조절한 모양이었다. 살인적으로 빠른 거대 쇠공이 아니라 적당히 빠르고 적당히 커다란 쇠공이 트랙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공을 모두 피해 트랙을 건너 반대편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면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난이도 조정이 된 건 다행인데……. 이게 안 위험한 미션은 아닌 것 같지 않아요?』

알렉스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원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사람 키보다 큰 거대 쇠공보다야 당연히 나았지만, 무릎보다 조금 위까지 오는 저 공도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위험했다. 깔리면 중상을 입고도 남을 터였다.

『여기서 포기한 팀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제니는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긍정적인 기색이었다. 다른 팀이 일찌감치 경쟁 후보에서 탈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푸근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보기에는 저렇게 위험해 보여도 상대는 테프트잖아요. 아무리 건성으로 치는 시험이어도 설마 위험한 걸 안전하다고 거짓말했겠어요. 여차하면 뭐, 에스퍼가 와서 초능력 같은 걸로 구해 주지 않을까요?』

『그, 그렇겠죠…….』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백 퍼센트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어쨌거나 알렉스도 그 말에 어느 정도 용기를 얻고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자, 건너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제가 달리기 하나는 빠르거든요. 나름 민첩하기도 하고 유연한 편이에요.』

『제니 씨가 제일 먼저 가겠다는 건가요?』

『네! 바로 출발할게요.』

제니는 굳이 묻지도 않은 말까지 늘어놓으며 스스로를 어필했다. 단순히 자신감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긴장이 심해 저러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알렉스는 제니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가겠다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위험하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어린 사람 먼저…….’ 같이 없어 보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제니는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지 길게 망설이지 않고 정말로 트랙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부산스럽게 굴러다니는 쇠공을 민첩하게 피해 반대편까지 건너갔다.

시간을 길게 끌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정원은 겁에 질린 알렉스와 덤덤한 표정의 석주를 번갈아 본 뒤 다음 타자로 출발했다.

정원이 체술을 괜히 익힌 것은 아니었다. 박규혁을 제압할 때의 절반만큼만 민첩하게 움직여도 공을 피하는 것쯤은 쉬웠다. 건너편에 도착하자 제니가 손을 들고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건성으로 한 번 손바닥을 부딪쳐 준 뒤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먼저 출발해요.』

『아니, 아니아니아니, 제가 제일 느리니까 제가 제일 마지막에 출발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먼저 출발하세요.』

둘은 출발 순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실랑이라기보다는 석주의 일방적인 판단과 알렉스의 눈물 나는 저항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혹시 당신도 무서워요? 그런 겁니까!』

알렉스의 말에 석주가 슬쩍 웃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이 비웃음이었지만 흥, 하고 코웃음을 친다거나 삐딱하게 웃는 것이 아니라 반듯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제일 느린 당신이 지금 출발해야 깔릴 것 같을 때 내가 도와줄 수 있겠죠?』

석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득 아닌 설득을 했다. 그 말에 움찔한 알렉스는 결국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먼저 출발해 납작 쥐포가 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꼭, 꼭 구해줘야 하는 거예요! 두고 그냥 가기 없습니다. 아셨죠!』

『빨리 출발하기나 하세요.』

석주가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다시 재촉했다. 저렇게 건조하고 삐딱한 태도의 강석주는… 어딘가 낯설어 보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줬다.

원래 저런 사람인 걸 정원 자신이 몰랐던 건가.

알렉스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부랴부랴 출발했다. 석주도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심지어 그는 급하게 뛰지도 않고 공을 피했다.

그리고 역시나 넘어질 뻔한 것은 느긋하게 건너오는 석주가 아니라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알렉스 쪽이었다.

『으아악!』

발이 꼬인 알렉스가 요란하게 비명을 질렀다. 저대로 넘어진다면 꼼짝없이 그 위로 굴러오는 쇠공에 깔릴 터였다. 안전장치가 되어 있는 건 맞나? 테프트 시험관들이 지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기는 한 걸까?

그러나 물론 의미 없는 걱정이었다. 순식간에 알렉스의 뒤로 따라붙은 강석주가 그의 뒷덜미를 슥 잡아채 바로 세운 것이었다.

체격이 작지 않은 성인 남성을 길거리에 떨어진 인형 줍듯 쉽게 들어 올리는 석주를 보며 옆자리의 제니가 감탄했다. 죽을 뻔한 알렉스 역시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석주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알렉스의 뒷덜미를 잡아 올린 상태 그대로 남은 트랙을 건너왔다.

도착을 하고 나서야 알렉스를 짐짝 내려놓듯 놓은 석주가 정원 쪽을 살짝 돌아보았다.

지금 대단하다고 말해 주는 게 중요하겠지? 딱 그런 타이밍이 아닌가 싶었다.

『데이비드 씨, 고생하셨…….』

그러나 기껏 꺼낸 말에 데이비드 씨께서는 자연스럽게 슥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미션 통과를 알리는 버튼을 자기 손으로 꾹 눌렀다. 저 끝의 문이 열려 다음 미션 장소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일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문 정원을 보고 제니는 눈치를 살피는 건지 꽤나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이비드가 아니신가……. 왜 대답을 아예 안 하신담.』

그 말이 상황에 맞지 않게 우스워서, 정원도 그냥 픽 웃어 넘겼다.

이어지는 관문은 오히려 첫 번째에 비해서 덜 살벌했다. 간단한 두뇌 게임 문제도 있었고, 퍼즐을 풀면 길이 열리는 것도 있었고, 거대한 미로를 통과해야 하는 관문도 있었다.

분명 에스퍼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었다면 미로 중간에서 괴물을 두세 마리 정도 마주쳤겠지만 지금은 그저 시간 싸움이었다.

그러는 동안 제일 적극적으로 임한 것은 역시 제니였다. 알렉스는 여전히 말이 많았지만 특출하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원은 최대한 빨리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답지 않게 말이 많아졌다. 특히 문제를 풀 때나 빠르게 돌파해야 할 때.

가장 조용했던 것은 역시 석주였다. 그는 절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오죽하면 첫 번째 관문에서 알렉스의 등을 떠밀었던 게 최고의 의사 표현이었을 정도로, 딱 1인분만 했다.

몇 층을 더 내려갔을 때, 그들이 예상했던 다음 미션이 등장했다. 바로 강 건너기.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강이라기보다 이건… 절벽인데요?』

정원이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서 있는 곳과 반대편 사이의 깊은 고랑이었다. 온 힘을 다해 멀리 뛰어봤자 절반만큼도 가지 못하고 저 아래로 추락해 버릴 것 같은 넓이였다. 밑으로는 인공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유속이 상당히 빨랐다. 깎아 지르는 높이는 아니었지만 떨어지면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확실히 절벽이라고 부를 만한 모습이었다.

밑에 흐르는 개울을 보고 강 건너기 미션이라는 말을 했던 걸까……. 전반적으로 엄청난 크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실내에 조성해 뒀다는 게 놀라운 시설이었다.

『이, 일단… 친구가 시험을 칠 때는 옆에 도구 같은 거 하나도 없이 맨몸이었다고 했어요. 그래도 우리는… 옆에 뭐가 있네요.』

제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일행 옆에 상황을 해결하라는 데 쓰라는 듯 비치된 물건이 있기는 했다.

『밧줄 있고… 갈고리 있고……. 앗, 이쪽이랑 저쪽에 기둥 같은 것도 있네요! 이 밧줄을 던져서 저기 걸라는 건가 봐요.』

『그걸 타고 건너가라고요? 누굴 죽일 일 있나…….』

그래도 의욕을 보이는 제니와 달리 알렉스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니는 그러거나 말거나 밧줄을 손에 쥔 채 거리를 가늠하다가, 한쪽 끝을 반대편을 향해 휙 던졌다.

『…….』

『그……. 안 될 것 같은데요?』

긴 침묵 끝에, 겨우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