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43화 (43/126)

43.

『하하……. 영화에서 보면 이렇게 휘리릭 던져서 잘만 묶던데. 역시 영화는 영화인가 봐요.』

그거야 당연한 소리였다. 그러나 하라고 하면 아주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단 한 팀이라도 통과를 시키려는 거라면 절대 불가능한 상황을 준비해 놓지는 않았을 터였다.

『잠깐 줘 보실래요?』

밧줄을 받아든 정원이 끝부분에 고리 모양의 매듭을 만들었다. 이 상태로 던져 고리 부분이 기둥에 걸리면 쭉 당겨 매듭을 단단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영 허무맹랑한 짓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정원은 매듭지은 밧줄을 들고 반대편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고리가 있는 부분이 나름대로 반대편 기둥에 걸릴락 말락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어? 잘하면 되겠는데요?』

거의 포기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알렉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정원은 자신이 이걸 반드시 걸고 말 거라는 집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몇 번 시도하던 정원이 밧줄을 든 채 석주에게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은밀하게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능력 써 놓고 안 쓴 척할 수 있어요?”

석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게 들렸다. 우스운가? 진심이었는데. 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겠지만 빨리 통과하는 게 최선이기에, 티만 나지 않는다면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또 부정행위예요?”

곧 석주는 얄궂게 웃으며 대꾸했다. 정원은 눈가를 찌푸렸다.

“좀 똑바로 대답하면 안 되는 건가요?”

“할 수는 있죠. 위험 부담이 좀 있지만.”

이번에는 생각보다 선선히 답이 나왔다. 들킬 수도 있다는 뜻인가. 정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석주가 아무렇지 않게 정원의 손에 있던 밧줄을 낚아채 갔다.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이런 건 딱히 부정행위 없이도 할 수 있는데. 그걸 먼저 물어보지 그랬어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인공 협곡 앞으로 가 섰다. 그리고는 허공에 밧줄을 몇 번 휘휘 돌린 뒤 건너편을 향해 던졌다.

『오. 꽤 카우보이 같은데요?』

제니가 칭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이 한 것보다 조금 더 깔끔하게 날아간 밧줄은 그대로 반대편 기둥에 자리를 잡았다. 그걸 쭉 잡아당겨 완벽하게 매듭을 지은 석주는 곧 이쪽 기둥에도 똑같은 모양으로 매듭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불안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제니가 다가가 밧줄을 꾹꾹 매만졌다.

『이거 안전한 거 맞나요?』

『이론상으로는요. 장담은 못 하죠.』

석주가 아무 대답도 없었기 때문에, 대신 대꾸한 것은 정원이었다. 제법 까마득해 보이는 아래쪽을 바라보는 제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포기하고 싶으면 해도 괜찮습니다.』

억지로 시켜 봤자 역효과일 테고,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는 일이니 나름대로 친절하게 이야기했다. 옆에서 석주가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돌아보니 그는 이번에도 삐딱하지는 않지만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낫겠다. 정원은 만약 팀원 중 일부가 포기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지를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제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해볼게요.』

『괜찮을 것 같나요.』

『뭐, 설마 실패한다고 위험하겠어요? 뭐라도 장치를 해 뒀겠죠. 위험한 미션은 없을 거라고 자기네가 말했잖아요.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도 했고…….』

걱정스러운지 횡설수설하다가 결국에는 말끝이 흐려졌다. 그래도 꿋꿋한 태도였다.

비각성자 전원을 몰살시키려고 했던 테프트다. 안전장치를 해뒀거나 구조를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정원은 고개를 끄떡이고 당장이라도 밧줄을 잡고 뛰어들 기세인 제니 앞을 막아섰다.

『일단은 제가 먼저 가 보겠습니다.』

건너편에서 받아 줄 사람도 있어야 할 테니까. 그리고 나서려는 정원을 막아선 것은 석주였다.

『내가 갈게요.』

『네?』

『딱 봐도 그쪽보다는 내가 더 무거워 보이는데. 내가 건널 수 있으면 나머지도 대충 건널 수 있다는 뜻이겠죠?』

딱 1인분만 하겠다는 듯 서 있기만 하던 여태까지와 달리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딱히 먼저 가지 못하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기에, 정원은 그냥 석주가 하려는 대로 하게 두었다. 그는 손을 뻗어 매듭이 단단하게 묶였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뒤 겉옷을 벗어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뛰어 겉옷을 밧줄 위에 걸고, 짚라인 타듯 줄을 타고 건너편까지 날아갔다.

『…저게 가능한 거예요?』

정말로 공중을 난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조금 어이없어하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 알렉스 못지않게 정원도 놀란 상태였다. 기껏해야 밧줄을 잡고 갈 줄 알았는데. 어떻게 보면 더 간편하고 쉬워 보이지만 잘못하면 겉옷을 걸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이능력을 믿고 막 사는 건가?

적어도 지금 이능력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렇지 않게 손을 툭툭 털어내고 건너편 매듭을 확인하는 석주를 보며, 제니가 슬쩍 정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도 저렇게… 가야 하는 건가요?』

『설마요. 단체로 떨어질 일이라도 있나요. 잡고 기어가셔도 됩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요…….』

다행이라고 말하면서도 영 불안해 보이는 말투였다.

『그런데, 저분이랑 아는 사이이신 거죠?』

갑자기 화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제니는 턱짓으로 석주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부터 뭔가 익숙하게 대화하시던데……. 근데 왜 저렇게 계속 좀 기분이 나빠 보이는 느낌이에요? 싸우기라도 했어요?』

남들 눈에도 보일 만큼 석주가 기분이 나빠 보이기는 한 모양이다. 이걸 싸웠다고 표현해야 하나. 따지자면 분명 자신이 강석주에게 해고당한… 아니면 차인 상황인데, 여전히 복귀시켜 주지 않는 것도 강석주였고, 그러면서 왠지 꽁해 보이는 것도 강석주였다.

『글쎄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결국 정원이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아서, 정원은 건너편에 있는 석주에게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줄을 타고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리 사이가 넓지는 않아서 할 만했다. 금세 끝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위로 올라가는 게 고역이었다. 석주는 힘겹게 절벽을 오르려 하는 정원을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겠다는 건가? 혼자 올라갈 수야 있지만. 그러나 석주는 결국 정원이 땅을 짚기 위해 위로 손을 뻗자마자 정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원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손을 잡고 올라가자 석주는 곧바로 손을 떼곤 정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이 아까 일을 사과해야 하는 타이밍인가. 그러나 정원이 그를 빤히 마주 보자 석주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데이비드 씨? 할 말 있으셨던 거 아닌가요?』

괜히 영어로 던진 정원의 부름에, 그는 눈만 살짝 다시 이쪽으로 돌린 뒤 웃어 보였다.

“정원 씨는 사람이 친절하시네요?”

“네?”

“나한텐 별로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석주가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뭐지……?’

그러니까 지금 이건… 자신에게는 별로 친절하지 않았으면서 남에게는 친절하다는 불만 표시인가?

모든 부분이 총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우선 자신이 어디가 그렇게 친절해 보였다는 건지.

또 설령 친절해 보였다고 해도 그걸 왜 석주가 지금 서운해하고 있는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언제 남들한테 그렇게 친절하게 굴었나요.”

“아까 그때도 그렇고. 본인이 다칠 뻔했으면서.”

아차 싶었다. 역시 그 일부터 사과했어야 하나.

“그건 미안해요. 그 자리에서 싸움이라도 나면 강석주 씨도 저도 곤란해지니까 그랬던 거지, 그쪽 편을 들겠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성의껏 신중하게 꺼낸 정원의 대답에 석주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빤히 얼굴을 마주 보다 입을 열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도 아주 친절하시고.”

“그럼 같은 팀인데 강석주 씨처럼 입 다물고 비협조적으로 굴어야 합니까?”

황당하다는 듯 대답하자 석주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면 협조적이죠. 애초에 나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나 있었겠어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왠지 재수 없었다. 반박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는 정원을 보던 석주가 힐끗 반대편으로 눈을 돌렸다.

“오늘 만난 팀원 말고 저 남자는 또 뭐예요? 지난번에도 같이 놀았죠?”

“놀긴 뭘 놀아요. 저 사람 말하는 거 못 봤습니까? 눈치라는 게 없잖아요.”

정원이 질겁하며 대답했다. 석주는 심드렁한 탄성을 뱉었다.

“흐음.”

“‘흐음’은 뭐가 ‘흐음’이에요. 애초에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예요? 아니, 제가 뭐, 특별히 강석주 씨한테만 유독 더 나쁘게 대하기라도…….”

…그건 맞았다. 말문이 막한 정원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석주가 가볍게 웃었다.

“맞긴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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