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정원은 다급하게 석주의 뒤를 따라갔다. 분명 그는 걷고 자신은 거의 뛰고 있는데도 거리를 좁히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강석주가 키가 크고 다리가 길다 해도 정원 역시 작은 키는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이대로 가다가는 놓쳐 버릴 것 같아서, 거의 전력질주하듯 달려가 석주의 옷깃을 붙들었다.
“강석주 씨!”
붙들리자 석주는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그렇다고 잡힌 것을 떨쳐내고 가 버리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일이냐는 듯 내려다보는 냉랭한 눈동자를 보고 정원은 잠시 망설였다. 뭐라고 말해야 잡아 놓을 수 있을까.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할 말도 많았기에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하고 가실래요.”
“회식이 하고 싶었던 거면 저 사람들한테 끼지 그랬어요?”
석주가 심드렁한 얼굴로 제니와 알렉스가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너라면 저 사이에 끼고 싶겠냐?’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자신도 저 자리에 끼고 싶지 않아 말도 없이 돌아선 거면서 별 쓸데없는 말을 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당장 가 버리지 않는 것을 보면 가능성이 있었다. 정원은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 배가 고픈데요.”
“…….”
석주가 황당함인지 당황인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정원을 보았다. 생각했던 것에 비해 훨씬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정원은 아예 배를 감싸 쥐는 시늉을 했다.
“요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닙니다.”
“…….”
이번에는 확실히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네가 밥을 못 먹고 다니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석주는 그런 황당한 얼굴을 하면서도 멈칫한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뭐가 먹고 싶어요.”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이었다. 정원은 내심 잘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말이 통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파트너일 때부터 그렇게 자신에게 뭘 먹이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더니. 밥을 못 먹여 죽은 귀신이 붙기라도 했나.
“뭐 먹고 싶은지 얘기하면 갈게요.”
이상한 조건이었다. ‘아무거나.’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석주가 바라는 건 그런 대답이 아닐 터였다. 음식에 관한 상상력이 워낙 빈약한 정원은 겨우 한 가지를 생각해 냈다.
“스테이크……?”
“고기가 먹고 싶다는 건 확실히 속이 허하단 건데. 철분이 부족한가 봐요.”
진지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니 왠지 우스웠다. 어쨌거나 그런 척 고개를 끄덕이자 석주는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무지 따라가기 힘들었던 방금 전에 비해 훨씬 느릿한 발걸음이었다. 아까는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걸까. 가진 초능력 중에 축지법도 있나…….
* * *
식사를 주문한 뒤, 종업원이 물러가는 것을 본 석주가 말했다.
“밥 먹는 동안 파트너 얘기 한 번이라도 꺼내면 난 갈 거예요.”
밥까지 같이 먹어 주러 왔으면 이제 그냥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나. 어차피 본의 아니게 같은 직장에서 일하게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다른 얘기는 해도 되죠?”
“입 다물고 먹는 거 좋아하잖아요?”
“항상 그랬던 건 아니잖아요. 나만 물어보는 게 싫으면 또 그때처럼 질문 교환이라도 하든가요.”
석주가 고개를 들어 정원을 빤히 보았다. 웃지 않는 얼굴의 강석주에게서는 거리감이 심하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며 대답했다.
“물어봐요.”
“출근할 거죠?”
첫 번째 질문이었다. 신분은 기관을 통해 미리 조작해놓으면 되니까 정원 혼자서 들어갈 수도 있지만, 합격까지 해 놓고 그가 나오지 않아 버리면 곤란해졌다. 아무리 테프트에 들어갔다 해도 말단 신입사원이니 바로 사장을 보게 될 리 없었고, 어쨌거나 석주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러려고 간 거긴 하니까요.”
“다행이네요. 강석주 씨도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요.”
석주는 잠시 침묵했다. 또 처음 봤을 때처럼 쓸데없는 걸 물어보려나. 이제 와 굳이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면 물어볼 게 없다고 하려나.
“글쎄요……. 오늘 이렇게 될 건 알고 있었어요?”
“질문이 모호하네요. 팀이 통째로 합격할 걸 알았냐는 뜻인가요?”
석주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궁금해 보이지도 않는데 꼭 대답을 해 줘야 하나……. 그래도 들은 게 있으니 말을 하기는 했다.
“말해 주려고 했는데 강석주 씨가 무시하셨죠. 우연히 들었거든요.”
“부정행위.”
또다시 나온 말에 정원이 확 표정을 구겼다. 미운 네 살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라는 말인가. 툭 내뱉은 뒤 정원의 표정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웃던 석주가, 겨우 고개를 돌려 물을 마시고는 말했다.
“다른 거 물어보고 싶으면 물어봐요.”
“아까 거기 정말로 환각계 능력이 깔려 있었습니까? 제가 기척을 못 느껴서요. 그만큼의 실력자라는 건가 하고…….”
“없었어요.”
즉답이었다. 그렇다는 건 환각 에스퍼가 만든 게 아닌, 정말로 위험한 환경이었다는 건데. 어쩌자고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뭐, 현장에 강석주 같은 에스퍼가 없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거짓말이긴 하지만.
“그런가요…….”
정말 비각성자를 싹 죽일 셈이었던 걸까? 왜? 테프트의 진의를 파악하려 했으나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정원이 생각에 잠겨 있자 석주가 물었다.
“이제 딱히 물어볼 게 없으신가요?”
“네? 아, 네.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네요.”
막상 파트너 이야기를 제외하면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이제는 싫어도 같은 직장에서 얼굴을 보게 될 테니까, 당분간은 파트너를 시켜달랍시고 쫓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정원이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리자 석주가 웃음을 띠는 건지 인상을 쓰는 건지 모를 모호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회사 나가는 게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이것도 일종의 질문인 걸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죠.”
석주는 그런가요, 하고 끄덕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한번 쥐어짜 봤어요.”
역시 그도 자신에게 궁금한 게 없나 보다. 처음에는 정말 신변잡기적인 질문만 했었는데. 사실은 그것도 정원 개인이 궁금하다기보다는 물어볼 게 없어서 아무거나 꺼낸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정원도 질문거리가 떠올랐다.
“…쉬는 날에는 주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시나요?”
영화 취향 같은 걸 묻던 강석주나 할 법한 질문. 석주도 그게 의외였는지 묘한 얼굴로 눈을 들어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쨌거나 입을 다무는 것보다는 생산적이지 않은가. 생각해보니까 석주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기도 했다. 파트너를 시켜달라고 자처하고 따라다니고 있으니, 이 정도는 알아두면 좋지 않겠나.
“그러고 보니… 취미 같은 건 딱히 없는 것 같네요.’
신중하게 꺼낸 대답이었지만 심심한 구석이 있었다. 뭔가 하는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어쩐지 호텔 방에만 처박혀서 나오지 않더라니.
알수록 알 수 없는 타입이었다. 억지로 쥐어 짜냈던 질문 이후 의외로 정말 그가 궁금해졌기에, 정원은 그 뒤로도 비슷한 종류의 질문을 몇 개 늘어놓았다. 하나씩 주고받자던 룰은 이미 뒷전이 되었지만 두 사람 다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정원에게 흥미가 없다는 듯이 무미건조하게 대답만 이어가던 석주가 입을 연 것은, 대화인 듯 대화가 아닌 것 같은 일방적인 물음 끝에 정원의 질문거리가 끊겼을 즈음이었다.
“정원 씨는…….”
“네. 물어보세요.”
“아니, 아닙니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으나 정원의 채근에도 석주는 끝내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표현하기 오묘한 표정을 한 채였다. 마치… 토라진 것 같은 느낌.
…토라져?
정원은 자신의 생각에 깜짝 놀라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역시 잘못 본 모양인지, 석주의 표정에선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식사는 그런 상태로 끝났다. 소득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로.
* * *
첫 출근은 일주일 뒤였다. 한참 기다려야 할까 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시기가 빨랐던 것은 어쩌면 테프트 쪽에서 ‘우리가 비각성자 직원도 뽑았다.’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내세우고 싶어 했기 때문일 거라고 정원은 생각했다.
[알렉스> 월요일]
[알렉스> 진짜 싫네요.]
메신저에서 알림음이 들렸다. 첫 출근을 했던 날 알렉스의 제안으로 만들었던 단체 채팅방의 알림이었다. 사실 제니나 알렉스와 교류하고 싶은 마음은 딱히 없었지만, 정원과 석주를 포함해 네 사람이 모두 뿔뿔이 다른 부서로 갈라졌기에 다른 부서의 상황도 알아내고 싶다면 그들과 연락을 하는 게 필수였다.
물론 이 채팅방에 석주가 들어와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제니> 말도 안 되는 게 뭔지 알아요? 오늘도 아침부터 한 일이 복사하기밖에 없다는 거예요.]
[알렉스> 내 사정이 좀 더 낫네요. 나는 커피도 사왔어요.]
이어지는 알림을 들으며 정원 역시 자신의 앞에 놓인 잡무 몇 개를 바라보았다.
입사한 것은 좋았지만 말단 직원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예상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기껏 출근한 뒤부터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정원이 한 일이라고는 테프트가 주로 하는 일과는 정말이지 조금도 연관이 없는 잡일뿐이었다. 이러다가는 커피를 내리는 분야에서 따를 자가 없게 될 터였다.
어떻게든 사장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고 다닌 결과, 수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게다가 자신만 이렇게 의미 없는 반복노동과 잡무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의외로 제법 기운을 줬다. 매일매일 푸념을 늘어놓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단체 채팅방을 나가지 않고 유지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제니> 그런데 있잖아요. 데이비드 그 사람은 대체 뭘 어떻게 한 걸까요?]
[알렉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분명히 같은 시험을 치고 같이 입사했는데…….]
어느새 채팅방의 화제는 석주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건 정원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대체 동시에 입사해 바로 옆 부서로 배정받은 강석주가 뭘 어떻게 했기에 상황이 이렇게 된 건지.
정원도 제니도 알렉스도 회사에 들어와서 한 일이라고는 이리저리 심부름을 위해 굴러다니는 것, 직원들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복사기를 사용하는 것, 기껏해야 그 정도의 잡일이었다.
다른 건 딱 석주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이 회사에서…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