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존! 존 어디 있어요?』
『여기 있습니다.』
부르는 목소리에 재빨리 달려갔다. 방금 전까지 복사하고 있던 파일을 손에 가득 든 채였다. 정원을 불러낸 직원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가 시킨 건 다 됐어요?』
방금 전 <에스퍼의 존재와 무값 변동에 관하여>라는 기사를 주며 121장을 복사하라고 말한 것도 이 남자였다. 등급은 C급 정도 될까? 부서 내의 다른 에스퍼들과 달리 전투형 능력이 아니라서 그런지 사무실을 비우는 일이 잘 없었다. 그리고 이 부서에서 정원의 존재를 유독 못마땅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다. 또래라는 점이 싫었나, 아니면 그냥 비각성자 자체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편인 걸까.
딱히 자신이 실은 고등급 가이드라는 데에 자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대접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인 것도 아니라서 상관은 없었지만.
『지금 100장 정도 끝났습니다. 21장만 더 복사하면 돼요.』
『왜 이렇게 느려 터졌나 몰라.』
『복사기 속도가 원래 그렇습니다.』
사실 이 조직에서 아주 원만하게 지내고 싶은 거라면 이런 식으로 토를 달지는 않는 편이 나을 터였다.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얼굴이 더 시뻘겋게 달아올라, 심하게 화를 낼 것도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괜히 입바른 소리를 붙였다. 에스퍼는 예상대로 화가 나 씩씩거렸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든…….』
『이 사무실 복사기가 좀 느리기는 하죠? 새 복사기 좀 놔 달라고 건의를 하고는 있는데 들어주질 않아서 문제야. 여기서 복사할 게 뭐가 그렇게 많냐더라~』
다른 직원이 때마침 끼어들었다. 정원은 화를 내는 에스퍼를 무시하고 자연스럽게 슥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B급 가이드로, 적어도 지금 말을 걸고 있는 C급 에스퍼보다는 이 회사에서 근무한 기간도 길고 등급도 높고 직위도 높은 사람이었다.
『그건 너무하네요. 입사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저희 사무실이 아마 테프트에서 손에 꼽게 복사할 서류 양이 많은 부서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물론 이제까지 정원이 복사한 것들은 모두 이 성격 나쁜 에스퍼가 들이민 쓸데없는 자료였지만. 종이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까라면 까야 하니 별수 없이 하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는 복사 결과물이 아깝기는 했다.
『존! 빨리 가서 복사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해요.』
괜히 트집을 잡는 말에 정원의 고개가 다시 그쪽으로 돌아갔다. 아마 지금 지적한 게 B급 가이드가 아니라 B급 에스퍼였다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을 텐데.
가이드로서 느끼는 약간의 동질감 때문에 지금 어깨를 으쓱하며 서 있는 B급 가이드가 제법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것 좀 봐요. 이 눈빛! 에스퍼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안다니까요!』
『눈빛이 뭐 어떻다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멀쩡한데……. 설령 아니라고 해도 자꾸 쓸데없는 일을 시키니까 그렇겠지. 존, 그 쓸데없는 거 복사 다 끝나면 개발 1부에 가서 이 서류 좀 전해줄래요?』
『알겠습니다.』
결국 동질감을 느꼈던 그녀 쪽에서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는 이유도 마련해 줬다. 게다가 가야 하는 장소도 마음에 들었다. 개발 1부는 강석주가 배정받은 부서였기 때문이다.
121장을 모두 복사하고, 어차피 확인하지는 않겠지만 그 종이 뭉치를 에스퍼의 앞에 가져다 놓기는 했다. 그리고 <에스퍼의 존재와 무값 변동에 관하여>보다는 훨씬 생산적인 내용으로 보이는 서류를 받아 개발 1부로 향했다.
테프트는 본래 기존 노른 지부였던 건물을 떠나 새로 완공된 건물로 적을 옮길 예정이었지만, 그날의 테러 사고 이후로 그 건물이 망가져 버리는 바람에 아직 원래 쓰던 건물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정원은 이 건물을 돌아다닐 때마다 당장 전산실을 습격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곤 했다. 그래 봤자 의심받고 회사에서 쫓겨나 다시 ‘그 남자’를 찾을 기회가 사라질 테니 적당한 때를 노리고 있었지만.
그러려면 다시 석주를 설득해 보아야 할 텐데, 그는 설득하기는커녕 만나기도 힘들 만큼 거리가 떨어진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31번과 32번이었는데 하다못해 옆 부서에 붙여 주면 안 됐던 걸까.
『실례합니다. 영업 2부에서 서류를 전해 드리러 왔는데요.』
열린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사람들 틈에서 튀어나온 키 작은 에스퍼 하나가 서류를 받아 들었다.
『아, 그래요? 생각보다 되게 빨리 왔네. 내일까지만 가져다주면 된다고 했는데.』
아마 그 자리에서 정원을 빼내 주려는 고마운 배려 때문일 것이다. 그가 서류를 확인하는 사이 정원은 빠르게 눈을 돌려 주위를 훑어보았다.
이곳에서 석주는…….
‘…뭘까, 정말.’
사람들의 중앙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석주의 모습이 보였다.
정원의 책상은, 아니 정원만이 아니라 제니와 알렉스의 책상 역시도 사무실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덤처럼 붙어 있는 간이 책상이었다. 그러나 이 부서에서, 아마도 처음에는 석주의 몫으로 배정되었을 간이 책상은 저만치 구석으로 밀려나 짐을 쌓아 놓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석주의 자리는 중앙에 있는 멀쩡한 책상이었고, 그 위에는 같은 개발 1부의 직원들이 선물해 준 것으로 보이는 각종 잡다한 물건이 쌓여 있었다.
『이봐, 데이비드. 이건 우리 부서에서 다음 회의 때 내놓으려는 야심작인데, 어떻게 생각해? 사용하는 에스퍼가 여기 손을 얹고 힘을 조금만 불어넣으면… 자! 이렇게 토스트가 익는 물건이라고.』
『정말 대단하네요. 제가 에스퍼였다면 2개를 사서 한 번에 토스트를 4장씩 구워 먹었을 것 같네요.』
『역시 그렇지? 하하하! 데이비드가 괜찮다고 하는 걸 봐서 이 아이템은 틀림없이 통과되겠어!』
“…….”
때마침 이루어지고 있는 촌극을 정면에서 목격한 정원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물들었다.
테프트가 저런 자질구레한 것도 파는 줄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강석주는 이 회사에 놀랍도록 잘 녹아들었다. 단순히 적응을 잘하는 게 아니라,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그 자신이 속한 부서의 사람들을 모조리 그의 열성적인 팬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매일매일 커피를 나르고 복사나 하며 강제로 종이를 낭비하는 정원이나 다른 신입 비각성자 직원들과 달리, 석주는 자리에 앉아 놀고먹으며 저런 자잘한 도움 요청에나 겨우 응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제니와 알렉스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며 매일같이 그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원 역시 들으면서도 신기하다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그 광경은 정말로 이상해 보였다.
석주의 인정을 받은 토스터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중년의 에스퍼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석주와 눈이 마주쳤다.
석주는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은 편하게 놀고먹는데 뼈 빠지게 잡일을 하며 구르는 정원이 안타깝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기에는…….
시선 교환이 조금 더 이루어진 끝에 그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이 보였다. 그냥 이 상황을 충분히 즐기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은데…….
하긴 그는 정원이 여기서 계속 일하기보다는 하루빨리 지쳐 그만두기를 바라기는 할 터였다.
『음, 다 확인했어요. 내가 부탁한 대로 아주 잘 됐네요. 근데 당신은 처음 보는 얼굴 같네? 이번에 새로 들어왔어요?』
『새로 들어왔다고? 비각성자인가?』
직원들이 흥미를 보였다. 관심은 불편했지만 싫은 내색을 할 수는 없어서 덤덤하게 대꾸했다.
『네. 이번에 새로 입사했고, 비각성자입니다.』
『이번 시험은 한 팀이 통째로 합격했다고 하던데. 그럼 데이비드와도 구면이겠네? 데이비드, 잠깐 인사하고 올래?』
그냥 입사 시험에서 같은 팀이었을 뿐인 상대라고 생각하면서, 인사까지 시켜 주려고 하는 게 신기했다. 정말로 데이비드… 아니 석주에게 우호적인 듯했다.
그가 나오면 할 말이 많았다. 내심 빨리 나와 보라는 듯 눈빛으로 그를 재촉했지만, 석주는 잠시 정원을 바라보다가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뇨. 업무 시간이니까 일에 집중해야죠.』
『역시~』
역시는 뭐가 역시냐.
정원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얼굴을 노려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음에도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알 바 아니라는 듯 눈을 돌려 버렸다.
너무 잘 살고 있는 강석주의 모습만 본 채 이대로 터덜터덜 원래 부서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속이 꼬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정원을 구제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때마침 개발 1부 안에 설치되어있는 호출벨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저건 이 부서 내에 새 임무에 배정될 직원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벨이었다. 토스터를 내려놓은 중년 남자가 호출벨 앞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저희 전원이라고요? 개발 1부 에스퍼 전부? 그거 참 별일이네요. 일단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에스퍼 전부 현장으로 가라는데? 큰일이냐고 하니까 그건 또 아니라는 것 같고…….』
『빨리 준비해야겠네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으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이어지는 말이 정원으로서는 상당히 반가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혹시 데이비드 자네도 같이 갈래? 에스퍼는 아니지만 한 번쯤 현장 견학하는 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의 고개는 정원 쪽으로도 돌아왔다.
『온 김에 자네도 같이 가는 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