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47화 (47/126)

47.

정원 쪽을 바라보는 석주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정원은 그게 자신의 눈에만 들어온 변화일 거라고 자신했다.

역시나, 그 표정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석주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야 물론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저 사람은 그냥 평범한 비각성자일 뿐인데요. 체력적으로도 허약한 편이고요.』

허약하다니?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야 물론 강석주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보다 허약하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기에, 당연히 자신도 허약한 편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런 식으로 매도해 일을 방해하는 건 무슨 경우라는 말인가.

『뭐, 어차피 현장 처리는 에스퍼가 다 알아서 할 건데 좀 허약하면 어때. 원래 평소에 가이드 달고 다닐 때도 고생스럽긴 마찬가지거든. 가이드 중에는 딱 가이딩만 할 줄 알지 그 외에는 짐짝이 따로 없는 친구들도 워낙 많아서 말이야.』

『너무하시네요, 팀장님. 하도 그렇게 구박하셔서 운동도 다니는데.』

『그래 봤자 여전히 허약해. 하하하!』

너스레를 떠는 척 반박하던 가이드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도 가이드는 어김없이 눈칫밥을 먹으면서 일하고 있구나. 그것도 비각성자 행세를 하는 강석주보다도 더. 어쩐지 또 느껴지는 짠한 기분에 그쪽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더니, 그는 어떻게 안 것인지 홱 고개를 들어 정원을 노려보았다.

『뭘 봐요?!』

딱히 짠하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정원은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척 슬쩍 눈을 돌렸다. 팀장이라고 불린 중년 남자가 정원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자네는 갈 건가, 말 건가?』

『가겠습니다.』

속으로는 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에스퍼밖에 못 쓰는 우스꽝스러운 토스터를 자랑하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재빨리 대답했다. 석주가 얼굴을 찌푸린 채 정원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정원은 그를 향해 빙긋 웃어 주었다. 웃는 얼굴을 정통으로 마주 본 석주의 표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풀렸다.

* * *

개발 1부가 불려 나간 곳은 기현상이 발생한 현장이었다. 이미 괴물이 나타나 한바탕 날뛴 뒤인 것 같았다.

기현상을 보니 석주와 함께 다녔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물론 석주와 함께였을 때와는 그 양상이 달랐다. 그때는 미리 사건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출발했기에 도착했을 때에는 일이 막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라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석주가 나서면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해결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딱 봐도 상태가 심각했다. 주변은 통제된 상황이었고 인근의 건물 두어 개는 이미 완파되어 있었다. 그나마 고층 건물이 있는 곳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인명 피해는?』

『다행히 초기에 대피에 성공해서, 사망자는 나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은 다섯 명 있습니다.』

『그 정도면 양호하네.』

팀장은 혀를 쯧 차며 석주와 정원 쪽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큰일은 아니라고 해서 방심했는데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군……. 데이비드,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말고 제자리에만 가만히 서 있어!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줄 테니까. 아, 뭐 그 옆의 자네도.』

어딜 봐도 자신은 덤처럼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어디 가서 보호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라고는 없을 건장한 미남 강석주는 짐짓 시름에 잠긴 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팀장님. 딱 봐도 상황이 위험해 보이네요.』

정말 천연덕스럽다. 솔직히 이 정도로 기현상이 심하게 진행되었다고 해도 강석주가 나서면 해결은 금방일 텐데. 석주에게 염려 섞인 당부를 마친 팀장은 다른 팀원에게 빨리 가서 괴물과 싸우라며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자신도 현장 쪽으로 다가가며 다른 직원에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무더기로 이랬던 적 있지 않았나? 왜, 회사에서 나섰다가 철수했던 케이스 말이야.』

『아, 그때요?』

『그때랑 무슨 연관 같은 건 없대?』

『글쎄요? 그때는 저희 쪽까지 일이 내려오지도 않았었잖아요. 위쪽에서 우르르 몰려갔다가 별거 아니었습니다~ 하고 빠졌던 거라서.』

정원은 팀장과 직원이 이야기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석주와 자신이 조사하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확인차 석주 쪽을 돌아보자 이번에도 평범하게 모른 척 무시할 줄 알았던 석주도 정원 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생각하며 묘한 눈으로 마주 보자 석주가 입을 열었다.

『존은 관심 꺼요.』

“…….”

또 영어. 게다가 존이라는 호칭까지. 대놓고 벽을 세우려는 모습에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그런다고 귀가 막히기라도 하나.

『이번 일은 그냥 백 퍼센트 의심의 여지 없이 자연발생인 것 같아요.』

『그런데 웬일로 이렇게 귀찮은 일을 맡았대? 주위에 인가도 많고 대피시켜야 할 인원도 많고, 원래 이렇게 딱히 굉장하지도 않은데 귀찮기만 한 일은 잘 안 받잖아. 우리 회사.』

『아니, 뭘 그런 말을 그렇게 대놓고 하세요.』

팀장의 심드렁한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직원뿐이었다. 정원도 석주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기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외국인 같지 않게 전원 충성도가 높아 보였던 테프트 직원이 저런 말을 하는 게 조금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뭐 어때? 어차피 데이비드도 이제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이런 얘기 정도는 들어도 되지~.』

『오늘은 다른 사람도 같이 있잖아요.』

그 말에 팀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겨우 입을 다물었다. 직원은 슬쩍 이쪽을 돌아본 뒤 소리를 낮춰 팀장에게 뭐라 속닥거렸다. 정원은 모른 척 표정 없는 얼굴로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석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저 사람 뭐라고 했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강석주 씨 귀면 들었을 거 아니에요.”

석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개발 1부와의 의리를 지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집요하게 한참 노려보았음에도 답이 없자, 정원은 결국 질문을 바꾸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요.』

자꾸만 영어로 튀어나오는 대답이 영 못마땅했다. 정원은 살짝 짜증스러운 투로 다시 물었다.

“한국어 까먹었습니까? 제대로 좀 대답해 주세요.”

“뭘 얘기하는지 알아야 제대로 대답하죠.”

여전히 성의 없고 삐딱한 대답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어로 돌아왔다는 것 자체만으로 전보다는 나았다. 정원은 작게 턱짓하며 직원들 쪽을 가리켰다. 에스퍼들은 저마다 괴물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당신을 가족이라고 해요. 뭐 얼마나 지났다고? 아주 상전이 따로 없으시던데요.”

“정원 씨는 본인이 부정행위를 좋아하셔서 그런가…….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 하나 봐요.”

놀림 섞인 말투에 정원이 이를 갈았다.

“이보세요……. 부정행위를 좋아하긴 누가 좋아한다는 건가요. 그 얘기로 물고 늘어지는 것 좀 그만하시죠.”

석주가 빙긋 웃어 보였다. 또 저렇게 웃는 걸 볼 때면 전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이 뒤에 익히 따라붙었을 ‘정원 씨 반응이 재미있어서 어쩔 수가 없네요.’ 같은 말이 없어 확실히 태도가 달라졌다는 실감이 들기는 했다.

“초능력으로 남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겠죠.”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것도 정원 쪽을 빤히 보면서 하니 더욱. 저런 눈으로 하필 자신을 보며 저런 말을 하면… 솔직히 ‘혹시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저렇게 퉁명스럽게 거리를 두고 있는데, 설마 정원을 겨냥하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과잉된 자의식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예 그로부터 눈을 돌렸다.

“그럼 그냥 순전히 인간적인 매력만으로 저 팀장님을 사로잡으신 건가요.”

“비꼬는 거예요? 말에 뼈가 있는데.”

석주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정원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직원들과 아주 잘 지내는 듯한 석주의 모습이 미묘하게 못마땅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더 비꼬았던 것 역시 사실이기는 했다.

그래 봤자 석주만큼 삐딱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대화를 멈추고 싸우고 있는 에스퍼들을 돌아보았다.

남들이 열심히 괴물과 싸우는 가운데 싸움도 대화도 아닌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으려니 왠지 기분이 머쓱했다. 원래도 에스퍼들 틈을 멀뚱히 지키는 게 가이드의 역할이기는 했지만, 그때라고 할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변을 통제하고, 중간에 나가떨어지는 에스퍼를 빠르게 가이딩해 돌려보내기도 하고, 정원 정도 되는 베테랑이면 현장 전체를 관리하기도 했다.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고 무시하는 에스퍼가 워낙 많아서 그렇지.

그러나 지금은 아무 역할도 없이 말 그대로 보호만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도 이렇게 머쓱한데, 항상 최전선에서 능력을 사용했던 석주는 아무렇지 않은 걸까.

궁금함에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살피려는 순간.

『데이비드! 피해!』

저편에서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싸움에 휘말려 부서진 건물의 파편이 정원과 석주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아, 늦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을 때, 석주가 빠르게 몸을 날려 정원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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