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겁니까?”
정원이 잔뜩 성난 태도로 석주의 뒤를 따랐다. 거의 뛰듯이 걸어 겨우 석주의 앞을 막아설 수 있었다.
“이게 생각까지 필요한 일인가요?”
“좋은 기회잖아요. 아니, 좋은 기회 수준이 아니죠. 나한테는 일생일대의 기회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까요. 그걸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어떡해요?”
답지 않게 격양된 어조였다. 이성을 잃은 나머지 거의 석주의 멱살을 잡다시피 한 상태였다. 석주는 차분한 얼굴로 대꾸했다.
“보는 눈이 많아요.”
“많기는 뭐가 많아요? 우리밖에 없는데!”
석주가 조용히 손을 뻗어 천장에 달린 CCTV를 가리켰다. 정원은 겨우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석주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목을 낚아채 질질 끌었다.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던 석주는 곧 작은 한숨과 함께 정원이 끄는 대로 그의 뒤를 따랐다.
걸음이 멈춘 곳은 남자 화장실 앞이었다. 화장실 안으로 석주를 밀어 넣은 정원은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낱낱이 확인한 뒤에야 석주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상관없죠? 여긴 보는 눈도 CCTV도 없으니까.”
“거절한 것도 아니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에요?”
석주는 표정 없는 얼굴에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임원의 제안에다가 ‘조금 더 생각이 필요한 문제 같네요.’라고 말했으니까.
“그전에 할 수 있는 말은 다 하지 않았나요. 내가 눈앞에서 멀쩡히 듣고 있는데 꼭 두 명이나 필요하냐, 거나. 꼭 나까지 끼워야 하냐, 거나.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던데요.”
전무가 제안한 것은 간단했다. 사장은 원래 비각성자에게도 호의적이고, 모두를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가치관을 내세우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마침 비각성자 신입사원을 모집한 김에, 공개 행사에 그들을 내세워 기업 이미지를 고취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행사 전이든 행사 당일이든 사장을 만날 일이 한 번은 생길 터였다.
그냥 영광스럽다며 받아들이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난색을 표하다, 끝내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물러난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막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어째서.
정원은 깊이 한숨을 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쪼그려 앉은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상태로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고, 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 자식이 잠적 끝낼 거라는 얘기를 듣고 당신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알아요? 파트너로 복귀시켜달란 얘길 또 하려고 했습니다. 멍청하게요.”
“…….”
“이런 건 가이딩이 필요한 일도 아니고, 그냥 행사에서 웃고 떠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내 몸이 망가질까 봐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면 이건 받아들일 줄 알았죠. 기껏 운 좋게 저쪽에서 먼저 머리를 들이밀어 준다고 하는데. 고생해서 찾아다닐 필요도 없이 알아서 만나게 해 주겠다는데. 설마 그것까지 훼방 놓을 줄은 몰랐습니다.”
석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마주 보았다.
노란 눈동자.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것 같은 무기질의 눈빛.
지금 이 순간 유난히 끔찍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눈길이었다. 저 눈을 자신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테프트의 사장과 겹쳐 본 적도 있었고, 그랬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 중 어느 쪽이라고도 표현하기 힘들었다.
정원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왜 그렇게까지 날 방해를 못 해서 안달이에요? 내가 그 남자를 만나서 뭘 하든, 무슨 수로 복수를 하든.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냥 내버려 두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까지 방해를 하는 거냐고요.”
정원의 침잠한 목소리를 석주는 한참이나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슬슬 침묵이 답답하고 짜증스럽게 느껴질 때쯤,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원 씨. 지금 이성이 흐려졌어요. 다시 잘 생각해 봐요.”
정원의 입장에서는 안 하는 것만도 못한 말이었다. 정원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뭘 다시 생각해요? 여기 다시 생각해야 할 부분이 어디 있습니까?”
“…….”
아예 강석주의 멱살을 붙들고 물었다. 그는 이번에도 얼마든지 정원을 밀어낼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지도 않았고, 비웃는 것처럼 웃음을 띠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상할 만큼 길게 느껴진 침묵 끝에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난 지금 정원 씨가 어떤 면에서 이성이 흐려졌는지, 또 어떤 면에서 내 말이 합리적인지 이유를 열 개도 더 댈 수 있어요.”
“그럼…….”
“그런데 그냥 이 말만 할게요.”
“…….”
어째서인지, 그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석주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무겁고, 어둡게 일렁이는 감정을 읽어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표정.
분명 그날 밤……. 가이딩을 위한 섹스를 마친 뒤, 기절하듯 잠들기 직전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음산해 보일 만큼 열정적이던 시선은 금세 거두어졌다. 잘못 본 건가 싶을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자,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당신, 죽으려는 거지?”
그대로 정원의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응했어야 하건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슨 반응을 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석주는 이미 확신을 가진 상태인 것 같았다. 방금 전 정원이 했던 것처럼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성마르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상식적으로……. 정원 씨가 복수를 한다는 게 말이 돼요? 상대가 그 인간인데?”
“…….”
“정원 씨가 나 때문에 몸이 망가지는 거… 당연히 문제지.”
차분하게 이어지는 말을 뻔히 들으면서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각인하다 망가지는 것도 당연히 문제고.”
“저는 아무 말도…….”
겨우 꺼낸 말은 석주의 말에 순식간에 가로막혔다.
“근데 정말 그게 다겠어요? 그것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거죠. 당신이 망가지거나 말거나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이렇게 나한테 집요하게 구는 이유가 다 뭐겠어?”
“…….”
“어차피 죽을 거니까.”
그가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정말로 그만큼 주의 깊게 보아서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줄줄 흘렸던 것일까.
“정확히 뭐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 목숨 담보로 어떻게든 복수하겠다는 생각이구나, 이것밖에는. 근데 정원 씨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난 당신이 그 사람을 어떻게든 만나 보려고 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밖에 없다고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인지를 물어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은 충격이 적잖이 컸다.
석주는 굳어 있는 정원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마지막 순간, 지나가듯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뭘 해도 죽지는 말라고……. 그때도 말했잖아요.”
그때도?
그 말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묻지 못했다. 정원은 멀어지는 석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자리를 비웠던 사장이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과,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자리에 노른 지부 두 명의 비각성자 신입사원이 함께하게 될 거라는 소식이 알려진 것은 며칠 뒤의 일이었다.
지목을 당한 것은 비각성자임에도 회사에서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 데이비드 베톰. 그리고 제니 하퍼였다.
* * *
“관장님을 연결해 주세요.”
“네? 이번에야말로 현지는 시간이 정말 늦었는데요. 새벽 세 시일 거예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책임은 제가 질 테니까 연결만 해 주세요.”
지부에 갑작스럽게 뛰어든 정원이 거두절미하고 꺼낸 말이었다.
직원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정원의 모습이 너무 절박해 보였던 탓인지 결국 망설이면서도 한국 본부 쪽으로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관장이 겨우 전화를 받았다.
- …하아. 또 정원 군이야? 이번엔 또 뭐냐. 어찌어찌 잘 풀리고 있는 거 아니었어? 테프트에 입사까지 하셨다면서. 거긴 좀 어때? 이러다 정원 군 아예 이직해 버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
“관장님.”
- 어어. 목소리가 왜 그래? 하긴 뭐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연락했겠지만…….
“제가 처음 본부에서 지내기 시작했을 때 말입니다. 훈련 센터에서 지냈었잖아요.”
- 그랬었지?
정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죽지는 말라고 했잖아요.’ 그 말이 귓가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시기에 강석주가 센터에서 머물렀습니까? 머물렀던 게 아니면 들렀던 적은요? 들렀던 것도 아니면, 아주 잠깐 얼굴을 비췄던 적은요? 있습니까?”
- 잠깐, 잠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관장은 얼떨떨한 듯 말을 끊었다. 정원은 초조한 심정으로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 있기야 했지, 그놈도 그때부터 우리 소속이었으니까.
“…….”
설마 정말이었을 줄이야.
-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수화기에서 관장의 목소리만 무게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원은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