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54화 (54/126)

54.

- 정원 군? 듣고 있는 거야? 정원 군?

전화기에서는 관장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원은 맨바닥에 주저앉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관장의 말을 한참 못 들은 척하다가, 머릿속이 조금 정리된 다음에야 다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잠깐 놀라서, 생각 좀 하느라.”

- 무슨 일 생긴 줄 알았네. 뭐가 그렇게 놀라웠어. 석주가 그때 거기 있었단 게 중요해? 생각해 보니까 거기 있을 때 만난 적이라도 있어?

관장의 호기심 어린 질문을 들으며 정원은 재차 생각에 빠졌다. 이렇게 묻는 걸 보아 유 관장은 그때의 일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듯했다. 하긴 훈련 센터는 순전히 그곳 센터장의 관할이었으니 관장이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원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제가 그때 상태가 좀 안 좋았지 않습니까.”

- 뭐……. 그럴 만한 때이긴 했지. 정신적으로 충격이 컸을 테니까.

“그래서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네요.”

다소 뭉뚱그려 말하자 관장은 난감한 듯 대답이 없었다. 당시 정신적 충격이 컸다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상황을 캐묻기는 머쓱한 모양이었다.

“강석주 씨가 절 예전에 만났다는 듯이 얘기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제 기억에는 없고……. 그래서 혹시 그때, 거기 있는 동안 마주쳤나 짐작만 했던 겁니다.”

- 그래서, 정말 그랬던 것 같아?

“그때 강석주 씨가 거기서 지낸 적이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관장은 말이 없었다. 정원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때 일… 뭔가 알고 계세요?”

- 아니, 나야 센터 쪽 일은 원래 잘 모르기도 하고……. 그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전 센터장이 나한테도 제대로 얘기를 안 해 줬거든.

- 그랬나요. 일단 알겠습니다.

그 길로 전화를 끊었다. 관장은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황당해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이상 정원을 붙잡지는 않았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채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 정원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훈련 센터에서 지냈던 동안의 기억이 희미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당시 정원은 매일같이 우울했고,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관장에게는 그때의 일이나 석주와의 만남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호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씻겨 내려가지 않고 남아있는 기억이 있기야 있었다.

그때 정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빼앗겨 공허한 상태였다.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다.

정원의 형은 명실공히 최고의 가이드였다. 과거 전설적인 예언가 에스퍼가 ‘최고의 가이드가 탄생할 거’라는 예언을 남긴 적이 있었다는데, 정원의 형이 태어난 순간 그 예언이 이뤄졌다고 대대적인 보도가 났을 정도였다. 형은 대외적으로 얼굴과 거처를 알리지 않은 채 가이딩 훈련에 몰두했고, 그 하나를 위해 가족 모두가 외진 곳에 숨어 살았다.

그 남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 외진 곳까지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정원의 가족들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원은 홀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형이 소속되어 있던 국가 기관에 거두어졌다.

정원이 그 형의 자리를 대체하게 된 것은 센터장과 관장이 논의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주요한 전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리면 타격이 있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원이 누구인지, 어떤 사정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형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그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에 정원이 그 형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정원은 한동안 가이딩 자체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걱정을 샀다. 형의 자리를 대체한다는 것이 정원에게 막중한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시체를 찾지 못했으니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그 자리를 메우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 국가에서 형의 죽음을 확인시켜 주었고…….

그 이후로는 복수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국가 기관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장 충성스러운… ‘최고의 가이드’ 노릇을 하며 살아왔던 것이었다.

신체적인 한계인 건지 재능의 한계인 건지 몰라도, 완벽한 S급 가이드였던 형을 완전히 따라잡을 수는 없었지만.

그 가운데 석주를 언제 만났는지를 고민해 보면, 한 가지 떠오르는 부분이 있었다. 여태 이것을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 기억 또한 악몽의 일부인지, 아니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별다른 의심 없이 꿈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었다.

실은 복수를 다짐한 뒤로도 한참 가이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을 때쯤 어떤 꿈을 꾸었다.

정원은 공중을 부유하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 속에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주위를 온통 장악한 에스퍼의 기운에 눌려 죽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기가 무거웠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괴로운 신음을 들었다. 정원은 뭔가에 홀린 듯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한 에스퍼가 폭주하려는 듯 위험하게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치는 중이었지만, 정원은 머릿속을 점령한 기묘한 불안감 때문에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오히려 뛰듯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폭주 직전의 에스퍼와 눈이 마주쳤고……. 그 눈이 섬뜩한 노란색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이성을 잃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었다. 이성을 잃은 나머지 악을 쓰며 난동을 피웠던 것 같다. 꿈속의 자신이 뭐라고 했더라.

‘내가 죽일 거야. 혼자 멋대로 죽지 마.’

그런 말을 하면서… 결국에는 놈에게 닿았던 것 같은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일까. 트라우마 반응이라도 되는 걸까. 떠올리려고 하니 미묘하게 속이 거북하고 불쾌한 것이, 이 이상 헤집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정원은 찝찝한 마음으로 회상을 멈췄다.

그 꿈을 꿨던 이후로 뭔가에 막힌 것처럼 할 수 없었던 가이딩을 다시 어떻게든 할 수 있게 됐던 기억이 있다. 혹시 꿈이 아니었던 걸까 싶어 연구원들에게 몇 차례 질문을 던졌지만, 하나같이 입을 모아 무슨 일을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하기에 꿈이었거니 넘겼던 것이었다.

사실 자신이 잠들어 있었던 동안 연구소에 폭발 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된 건 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만약 그게 꿈이 아니었고, 정말로 당시 강석주를 만났던 거라면… 그리고 꿈이라고 생각했던 내용이 폭발 사건과 연관이 있는 거라면, 그가 말한 만남도 그때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기억하는 꿈의 내용대로라면 다소 과격한 방식이었겠지만, 어쨌든 추측하기로는 그때 노란 눈의 에스퍼에게 덤벼든 정원이 그의 폭주를 막았던 것 같았다. 석주는 그 일로 일종의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죽음을 우려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죽지 말라고 말했다는 건 무슨 뜻이지.’

기억하는 대로라면, 노란 눈을 가진 그를 자신의 원수로 착각하고 ‘내가 죽이기 전까지 혼자 죽지 마라.’ 같은 말을 한 건 오히려 정원 쪽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뭔가가 더 있는 걸까.

어쨌거나, 석주가 자신을 적잖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했다. 이번 일로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물쭈물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물러서지 않아도 된다.

설령 강석주의 감정을 이용하는 꼴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소식 들었어요? 사장님이 돌아온다는 거?』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로비에서 알렉스를 마주쳤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말을 끊고 자리를 빠져나갔겠지만 오늘은 그가 하는 말에 흥미가 있었기에 호응을 해 줬다.

『정말일까요. 입사는 했지만 아마 앞으로도 절대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이것저것 소문이 워낙 많았잖아요? 사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거나. 물론 저는 그렇게 세다는 에스퍼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요. 실물을 볼 수 있다니 신기하네요. 아, 나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는데! 제니랑 데이비드가 부러워요.』

『제니랑 데이비드요?』

알렉스의 말에서 영양가 없는 소리는 한 귀로 흘려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도중 귀에 걸리는 이름이 있었기에 정원은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 알렉스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몰랐죠? 제니랑 데이비드가 사장 복귀하는 행사에 참석하게 됐나 봐요. 들러리 비슷한 역할을 맡았다던데, 비각성자 직원을 뽑은 기념이라나 뭐라나? 우리 둘도 있는데 왜 하필 그 둘인 걸까요? 남녀 한 쌍이라 그런가.』

정원이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강석주가 기어이 무슨 짓을 하기는 해 놓은 모양이었다. 자신 대신 제니를 그 자리에 끼워 넣었나 본데.

『제니, 벌써 출근했을까요?』

『아마도요? 늘 굉장히 일찍 나오는 편이니까.』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정원은 알렉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제니가 일하는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석주에게, 본인 외엔 길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는 걸 알려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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