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55화 (55/126)

55.

『존! 이게 얼마 만이에요. 기분 탓인가, 이렇게 얼굴 보는 건 되게 오랜만인 것 같은데요?』

제니는 사무실 입구에 선 정원의 모습을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 나왔다. 제니의 부서 사람들이 조금 떨떠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모르긴 몰라도 제니 또한 회사에서 상당히 눈칫밥을 많이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성의껏 대답했다.

『그러게요. 서로 바빠서 마주칠 겨를도 없었네요.』

『저번에 위험한 현장에 다녀왔다면서요? 얘기 듣고 걱정했어요. 부서 사람들이 도통 다른 데에 보내 주질 않아서 찾아가 보지는 못했지만요……. 다친 데는 없는 거죠?』

『네, 멀쩡해요.』

부서 사람들에 대해 투덜거리는 제니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자신이 속한 부서에서도 유독 열정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에스퍼의 존재가 떠올랐다. 약간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을 때, 제니가 여전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회사는 참, 어쩌자고 비각성자한테 그렇게 위험한 일을 시키는 건지 모르겠어요. 입사 시험 때부터 그러더니.』

『그러게 말입니다.』

『솔직히 저도 좀 걱정돼요. 그 행사라는 거. 대체 무슨 일을 시킬지도 모르겠고.』

적당히 대꾸하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정원이 바라던 쪽으로 화제가 돌아갔다. 정원은 속으로 반색했지만 겉으로는 차분하게 물었다.

『사장님 복귀 기념이라는 그 행사 말인가요.』

『네, 맞아요. 아직 알려지지는 않았을 줄 알았는데.』

살짝 놀란 듯한 제니를 보며 덤덤하게 설명했다.

『알렉스한테 들었습니다.』

『그분은 정말 소문에 빠르시더라구요.』

제니는 바로 납득했고, 정원은 잠시 고심했다. 어차피 할 말은 정해져 있었고, 지금 상황은 오히려 제니가 먼저 밑밥을 깔아준 셈이었다. 그래서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바꿔 드릴까요?』

『네? 뭘요?』

『행사, 제가 갈까요.』

정원의 제안에 제니는 곧장 양팔을 거세게 휘저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사실 그 행사를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정원의 제안이 자신을 배려한다고 생각해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 그렇게 신경 써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존은 이번에도 위험한 현장에 다녀왔잖아요? 제가 걱정된다고 존한테 떠넘길 수는 없죠.』

『사실… 오늘도 그 얘기를 하러 왔어요.』

정원은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자신이 나선 건 제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얘기요? 바꿔 주겠다는 얘기?』

『정확히는 바꿔 달라는 얘기죠. 제가 그 행사에 참석하고 싶어서요.』

의아하게 묻는 제니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원으로서는 드문 의사 표현이었다.

『오……. 그건 좀 의외네요. 존은 뭔가, 회사 일을 그렇게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은 아닌 줄 알았는데.』

제니가 바로 그 부분을 짚었다. 딱히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아닌데, 간파당한 기분에 살짝 머쓱해졌다. 격렬하게 손을 내젓던 제니는 참여하고 싶다는 정원의 말을 듣고 고민에 빠진 듯했다.

『아, 혹시 존도 사장님을 좋아해요? 존경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관심이 많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편이 제니를 설득하기에는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목표를 위해서라고 해도 자신의 입으로 테프트의 사장을 존경하고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정원을 보고 제니는 알아서 말을 이었다.

『여기 회사 사람들은 다 사장님을 좋아하더라고요. 그냥 좋아한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요. 다 같이 세뇌 교육이라도 당한 거 아닌가 싶을 만큼 충성심이 깊어서 신기할 정도예요.』

세뇌 교육이라……. 설마 정말로 직원들을 모아 놓고 세뇌를 시키는 짓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말을 들으니 찝찝하기는 했다. 테프트는 일전에 실제로 신입사원 설명회장에 온 비각성자를 세뇌하는 짓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직원 모두가 사장을 존경한다는 것은 확실히 신기한 일이었다. 정원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사실 그 사람은 사라진 지 제법 되지 않았나요. 젊은 사원들은 얼굴도 본 적 없을 텐데 존경한다는 게 신기하네요.』

『음, 맞아요. 존도 그런 거 아니었어요?』

『…뭐, 여기 사람들처럼 존경하는 것까지는…….』

그렇게 애매하게 말을 흐리는 것이 정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니는 그 애매한 설명에도 나름 납득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원은 약간 초조해진 기분으로 마저 제안했다.

『그 행사에 참여하면 보너스가 나오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받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에이, 누굴 돈에 미친 사람으로 보세요. 그거 한번 안 받는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닌데요.』

너무 조급하게 굴었나. 정원이 입을 다문 채 제니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존이 거기 참석하고 싶다는 거죠? 그럼 저는 좋아요. 저 때문에 싫은데 일부러 바꿔 주는 거면 미안하지만, 그런 게 아니면 저야 오히려 고맙죠.』

제니의 대답에 정원은 솔직하게 고마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니는 그 얼굴을 보더니 또다시 놀란 듯 ‘정말 가고 싶었던 모양이네.’ 중얼거리며 작게 웃었다.

자기 대신 제니를 세우는 얄팍한 수를 쓴다고 해결될 줄 알았나. 속으로 강석주를 향해 코웃음을 친 정원은 제니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안녕, 존?』

복도를 걷던 정원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방금 지나쳤을 텐데 조금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복도 벽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는 사람은 역시나 강석주였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굳이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비꼬는 듯 던진 ‘존.’이라는 부름만 봐도 뻔했다.

정원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좋은 점심입니다, 데이비드.』

『제니랑 벌써 교섭을 마친 것 같던데요.』

『네. 제니는 그런 행사 같은 건 참석하기 싫다고 하더라고요. 데이비드가 멋대로 밀어 넣지 않았으면 이런 수고스러운 일도 없었을 텐데. 안타깝죠.』

뻔뻔하게 비꼬는 말에 석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루기 까다로운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오늘은 그 모습이 기분 나쁘다기보다 왠지 그냥 재미있었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정말 사람 말을 안 듣네.』

『그건 데이비드도 마찬가지죠.』

『그거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석주는 착잡한 듯 고개를 돌린 채였다. 정원은 자신을 보지 않는 그의 얼굴을 한참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곱슬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손 아래, 그의 얼굴에서 묘한 초조함과 불안감이 읽혔다면 착각일까.

충동적인 고민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정원이 입을 열었다.

“강석주 씨.”

석주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제가 나름 당신 생명의 은인인데……. 그렇게 대해도 되는 건가요?”

그 말을 한 순간, 비로소 그의 고개가 정원 쪽으로 돌아왔다. 정원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자주 자신을 물러서게 했던 노란색 눈동자가 오늘은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석주는 헷갈려 보이는 기색이었다. 정원이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인지 탐색하는 듯했다.

얼마 전의 가이딩도 ‘내가 당신 목숨을 구했다.’라고 말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지만……. 정원의 생각이 맞는다면, 자신이 석주의 폭주를 막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므로.

떠보듯 덧붙였다.

“한 번도 아니고.”

“…….”

석주의 표정이 더욱 혼란스럽게 일그러졌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정원을 살피는 얼굴이 전에 없이 불안해 보였다.

정원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정원은 예전에 석주와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폭발 당시 자신이 막았던 에스퍼가 바로 강석주였다.

그렇다고 해도… 상상 이상의 반응이었다. 지금 강석주는 꼭 갈피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당장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정원은 그와 비슷하게 얼굴을 구긴 채로 고민에 빠졌다. 저런 모습을 언젠가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도 명확히 생각나지 않는다는 게 답답할 뿐이었다.

한참 만에 석주가 한마디를 꺼냈다. 방금 전에 비해서는 조금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기억을 전혀… 못 하는 줄 알았는데요.”

그러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원은 충동적으로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석주는 답지 않게 놀란 듯 흠칫했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지척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석주는 분명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조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그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이용하기 쉬운 상대처럼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받아줄 것 같아 보였다. 그를 이용해 뭐라도 하려면, 지금이 적기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순간. 어떤 부탁을 꺼내는 게 가장 적당할까.

설령 강석주를 이용해 먹는 꼴이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초조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원은 한참 만에 겨우 마음을 다잡고 말을 꺼냈다.

“강석주 씨. 빚 갚는 셈 치고…….”

“…….”

“나하고 각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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