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석주의 표정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정원은 살짝 당황했다. 반응이 좋지 않을 거란 건 이미 예상했기에 거절당한다 해도 놀라거나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놀란 이유는 석주가 생각보다 심각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인상을 쓰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게 정원 씨 ‘소원’이에요?”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 그가 이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정원은 살짝 당황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소원이라는 말이 중요한 것 같았다. 그것도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일부분일까.
그 순간 그렇다고만 대답하면 들어줄 것 같았지만, 머뭇거리는 사이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그는 금세 일그러트렸던 표정을 수습하고 차분한 얼굴을 했다.
“다 기억하는 건 아니죠?”
석주는 정원이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사실이었기에 괜히 반박하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석주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기억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심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과거에 뭐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이라도 했던 걸까……. 답답함이 밀려왔다.
말없이 정원을 마주 보던 석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다 들켰네…….”
“뭘 들켰다는 건가요.”
석주는 망설이거나 민망해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잖아요. 내 기분이요.”
정원은 부정하는 대신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마 석주가 ‘정원이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이며, ‘정원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실은 정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정원을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과거와 연관이 있을 것이고……. 기억나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정원의 표정을 보고 조금 공허하게 웃은 석주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들킨 거 솔직하게 얘기할까요.”
“…….”
“각인은 해주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정원 씨라도……. 아니, 정원 씨니까.”
거절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기에 의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유는 물어보았다.
“이유가 뭔가요? 위험해서?”
“정원 씨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서.”
정원의 질문과 언뜻 결이 비슷한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대답이었다. 침착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잘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정원은 잠시 낯선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한 석주가 훨씬 더 태연한 표정이었다. 한참 만에 정원이 대꾸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각인이라도 하면… 내가 죽어야만 할 가능성은 좀 줄어드는 거 아닌가.”
석주는 갑갑한 표정으로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정원은 드물게 석주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떠보듯 묻자 그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나는 강석주 씨가 날 해고하는 대신에 나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한 걸로 기억하는데……. 아닌가요?”
“비슷하죠. 내가 정원 씨를 해고한 건 아니지만.”
그 때문에 실직자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는데, 그게 해고가 아니라고 해 봤자 의미가 없었다.
“날 못 믿어요?”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내가 못 이길 것 같아요?”
“그런 문제도…….”
정원이 한숨을 쉬며 말을 멈추었다. 물론 상대는 세계에서 최강이라고 불리는 에스퍼였기에, 그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아무리 석주라도 말이다.
하나, 그렇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정원은 완곡하게 대답했다.
“이기는 거고 뭐고……. 가이드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상대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죠.”
“못 믿는 거 맞네요.”
좋게 말했으나 속내를 다 들킨 모양이었다. 정원은 눈을 돌리며 짐짓 딴전을 피우다 대답했다.
“만약에 각인을 해서 강석주 씨가 정말로 그 사람을 이겨 주기라도 하면……. 그럼 제가 죽을 이유는 없겠네요.”
그 말에 석주는 오묘하게 표정을 굳힌 채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건 좀 과했나. 자신의 목숨을 빌미로 그를 도발한 건. 그것도 강석주가 자신을 정말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면서.
화를 낼까. 아니면 슬퍼하려나. 도무지 그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요.”
한참 말없이 정원을 바라보던 석주가 제안을 건넸다.
“정원 씨가 다 기억해내면 그때 다시 얘기하는 거예요.”
“그때 각인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때 다시 대화를 해 주겠다고요?”
예상에 없던 반응에, 정원이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석주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잠시 그를 마주 보다가, 곧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까요.”
완전히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수확은 있었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이대로 석주를 보낼 생각은 아니었다. 정원은 그대로 돌아서려는 석주를 붙들었다.
“대신 오늘 끝나고 같이 돌아가요.”
석주의 얼굴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정원은 태연한 얼굴로 설득했다.
“가까이 있어야 기억이 잘 날 거 아니에요.”
“정원 씨가 기억이 돌아오면 나한테 손해 아니에요?”
석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예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심한 정원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각인해 주기 싫어서 손해라는 거예요? 그렇다고 평생 기억 못 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 않나요. 사실 기억해 줬으면 하죠?”
다시 짧은 웃음이 이어졌다.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석주를 향해 정원이 한 술 더 떠 덧붙였다.
“이왕이면 숙소도 다시 합치는 건 어떨까요.”
“정원 씨…….”
석주가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정원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슬슬 숙소 때문에 부담이 되던 참이거든요. 이러다 기껏 모아 둔 돈이 다 증발되겠다 싶고.”
그 말에 석주가 티 나게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내내 어떻게 거절할지를 고민하는 것 같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살짝 찌푸린 얼굴로 그가 다시 정원을 바라보았다.
“…호텔, 사비로 대고 있어요?”
“그럼요. 강석주 씨가 절 자르시는 바람에 전 지금 본부에서 지원도 못 받는 상태인데요.”
“…….”
태연하게 대답하자, 석주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도 더 굳어졌다. 조금이라도 그의 양심을 자극해 보려고 한 말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결국 석주는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말이죠?”
“나 때문에 정원 씨 전재산 버리게 둘 수는 없잖아요.”
전재산까지는 아닐뿐더러, 설령 여기서 전재산을 날린다고 해도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정원이었지만 물론 석주의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기쁜 기색을 슬쩍 감추고 회사가 끝난 뒤 보자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 * *
“여전히 좋은 방에서 지내고 있었네요.”
석주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정원이 한 말이었다. 그와 함께 묵던 호텔과는 다른 곳이었지만 룸 컨디션은 엇비슷했다. 혼자 쓰기에는 너무 크지 않나 싶은 방이 하나도 아니고 둘에, 방마다 커다란 침대가 있고 거실은 또 따로 있었다.
딱히 찔리라고 한 말은 아니고, 놀리려고 한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석주는 상당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부분은… 생각을 못 했어요.”
미안하다는 말이 이어졌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난감해하는 석주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이런 표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꼭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하라고 한 말은 아닌데…….”
겨우 머쓱하게 대답하자 석주의 시선이 따라왔다. 자신을 보는 오묘한 눈이 신경 쓰여서, 정원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원래 묵던 호텔에 잠깐 들러야 할 것 같습니다. 짐을 가져와야 해서.”
“어딘지 말해줘요. 제가 다녀올게요.”
석주가 곧장 대답했다. 만류해도 들을 기세가 아니어서, 어쩔 수 없이 원래 호텔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가 정원을 대신해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가지러 간 사이, 정원은 어색하게 빈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다 기억해 내면 각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겠다… 라.
그럴 만큼 굉장한 추억이 있는 걸까.
정말 그런 거라면 자신은 제대로 기억도 하지 못하는 그 과거를 석주 혼자 기억하면서 이제껏 지내 왔다는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감상적인 기분이 됐다. 이런 기분은 썩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정원이 한숨을 푹 쉬며 잡념을 털어내려 했을 때,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에서 긴 진동음이 들렸다.
『여보세요?』
-『아, 존? 받았네요. 나 기억하죠?』
정원이 찡그린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