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57화 (57/126)

57.

정원은 잠시 고민했다. 원래의 정원이었다면 잘못 걸었다고 대답한 뒤 가차 없이 끊어 버렸을 테고, 애초에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왜인지 중요한 전화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했고, 또 석주와의 일로 마음이 복잡한 상태라 무심코 전화를 받아 버린 것이었는데……. 그게 잘못이었을까. 받자마자 자기소개도 없이 대뜸 나온 질문은 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음? 존 데논 씨 핸드폰 아닌가요?』

『맞습니다만…….』

정원이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잠시 당황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존 데논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가명을 알고 있는 걸 보면 테프트 쪽 사람인 것 같았다. 정원의 대답에 상대는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아, 놀랐네요. 그러고 보니 내가 자기소개를 안 했죠. 테프트 전무 에단 리입니다. 연락망 보고 전화했어요.』

전무였구나. 그제야 아귀가 맞았다. 정원은 날을 세우려던 것을 누그러뜨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쩐 일이신가요?』

알아보는 게 이상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말투를 깍듯이 했다. 에단 전무는 정원의 사과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행사에 참여하게 되셨다고 들어서 말이죠. 생각이 없다길래 아쉬웠는데, 마음이 바뀌었다니 잘됐네요.』

『네? 생각이 없다고 했다니…….』

-『음? 아니었나요? 존은 이번 행사에 별로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들은 적 없는 말에 얼떨떨하게 반응하자, 전무 역시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정원은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묻지 않아도 뻔했지만.

-『데이비드에게 들었죠.』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아마 ‘존은 행사에 끼기 싫다고 했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의 자리를 제니와 바꾸게 하려던 것이었으리라. 그렇다고 여기서 굳이 데이비드가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거라고 해명할 수는 없었다.

『그건……. 뭔가……. 착각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하자, 전무는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대꾸했다.

-『어쨌거나 싫었던 게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네요. 개인적으로 꼭 당신이 참여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말에 정원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 좋은 말임에도 경계가 됐다. 전무가 굳이 자신을 지목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하는 소리라기에도 이상했다. 테프트의 전무씩이나 되는 에스퍼가 일개 비각성자 사원으로 입사한 정원에게 굳이 전화까지 걸어 이런 말을 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상대에게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목소리에서 경계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지만.

『그건… 영광이네요. 특별히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라도 있을까요.』

-『음…… 관심이라고 해 둘까요?』

“…….”

-『하하.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사람을 좋게 보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요?』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인 시간이나, 그 말에 섞인 묘한 기색이 거슬린다면 착각일까. 정원이 침묵하자 전무는 수습하려는 듯 살짝 성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사람 좋은 척 이야기해도 에스퍼는 에스퍼. 특히나 상대는 언뜻 보기에도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해 보였다.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을 변덕이겠거니, 하고 납득하려 해도 묘한 찝찝함이 남았다.

『그러시다면 감사하지만…….』

-『그러고 보니, 혹시 데이비드랑은 연락해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합니다. 그런 건 왜 물어보시나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다소 날카롭게 반응했음에도 전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태연한 태도를 보니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명색이 회사 전무인데, 너무 날 선 반응을 보여 버린 걸까.

하지만 여러모로 찝찝한 사람이었다.

전무가 작게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그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 친구는 유난히 당신을 싸고도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존한테 할 말이 있으면 자기가 전달하겠다고 굳이 나서더라고요. 덕분에 연락하려고 직접 사내 연락망 뒤지는 수고까지 했네요.』

유난히 싸고돈다……. 그 말에 저절로 멈칫하게 됐다. 석주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얼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남의 입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니 기분이 묘해진 것이었다.

대충 얼버무린 뒤 넘어가야 하는데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이 길어지면.

일부러 더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석주가 자신을 상상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정원에게 좋은 일이었다. 결국에는 자신의 말을 들어줄 가능성이 커지고, 그러면 정원이 바라는 복수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 이외의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곤란했다. 신기함이든, 고마움이든, 미안함이든…….

‘…참 나, 수상해 보이기 딱 좋은 짓을 하고 다니셨네.’

애써 묘한 기분을 털어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걱정이라는 건 알겠지만, 연락도 자신을 통해서 하라는 말까지 했을 줄이야. 마음이야 어찌 됐건 정원은 일단 뻔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나요? 그 사람이 원래 좀 사서 일을 늘리는 편인 것 같던데, 그래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네요.』

-『흠……. 그런가요. 난 또 존에게 전화하려면 데이비드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 줄 알았죠.』

애매한 탄성과 애매한 농담이었다. 묘하게 날이 서 있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는 오히려 전무 쪽에서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누구를? 자신을? 아니면 석주를?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정원이 살짝 딱딱하지만 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전무 역시 태연하게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겨우 연락이 닿았으니 하는 말인데, 시간이 괜찮다면…….』

“통화 중이었어요?”

바로 그때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은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멀찌감치 떼며 마이크가 있는 방향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언제 들어온……!”

당황스럽게 중얼거리던 말은 그마저도 도중에 끊겼다. 태연하다 못해 심드렁하게까지 느껴지는 표정으로 정원의 손을 쳐다본 석주가 곧장 팔을 뻗어 핸드폰을 빼앗아 간 것이었다. 잡으려고 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석주는 크게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았는데, 정원은 어른을 상대로 팔씨름을 하는 어린이처럼 속수무책이었다.

석주는 화면에 뜬 번호를 눈으로 읽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돌려줄 것처럼 핸드폰을 내밀다 말고 손을 뒤로 물렸다.

“이거 주면 다시 걸 거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언제 들어온 거고, 남의 전화는 왜…….”

따져 묻던 정원이 곧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강석주인 이상 기척이야 숨기려고 하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을 테고, 일부러 통화를 막았던 사람이 상대가 누구인지 알면서 넋 놓고 정원을 구경할 리도 없었으니까. 물어봤자 다 소용없는 부분이었다.

“…안 걸게요. 안 걸 테니까 돌려주시죠.”

정원이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손을 내밀었다. 석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괜히 으음, 하는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깊이 한숨을 쉰 정원이 재촉하듯 손짓하며 덧붙였다.

“제가 언제 거짓말한 적이라도 있었나요. 전 약속도 잘 지킵니다.”

“뭐, 정원 씨 자의로 그런 적은 없긴 하죠.”

혼잣말처럼 뱉은 석주의 말에 정원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자의로는 그러지 않았다는 건… 자의는 아니었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어긴 적이 있었다는 뜻인가?

자신이 그에게 무슨 약속을, 혹은 무슨 거짓말을 했던 걸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 생각하며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석주는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싱긋 웃어 보이기만 했다.

더 이상 실랑이는 없었다. 석주가 약속한 거라며 당부한 뒤 핸드폰을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정원은 곧장 핸드폰을 받아 들고 메시지 함을 열었다.

“안 걸 거라면서요.”

“전화는 안 걸 겁니다. 실수로 끊었다고 말이라도 해야죠.”

“실수는 무슨……. 다시 전화 와도 받지 마세요.”

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전무와 알쏭달쏭하고 찝찝한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어차피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석주는 메시지까지 막을 생각은 없었는지 정원이 사과를 건네는 걸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애초에 정원에게는 전무보다 석주가 훨씬 더 큰 고민거리였다. 분명 그가 돌아오면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꽤 있었는데, 정작 지금 할 수 있는 건 핸드폰을 단속당하는 초등학생처럼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으므로.

연결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전무에게 메시지로 사과하자, 답장이 곧장 도착했다. 정원의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를 들은 석주가 덤덤하게 물었다.

“뭐래요?”

“그냥……. 알겠다고 하는데요.”

정원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조금 전까지 하던 모든 생각이 정지된 상태였다.

[그랬군요. 아까 하려던 말 말인데, 시간 괜찮으면 주말에 회사 나와 보지 않을래요? 행사 전에 사장님 얼굴 한 번 정도는 봐 둬야죠, 존도.]

메시지를 보자마자 머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석주에게 들키지 않게 표정을 관리하는 것만이, 정원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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