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60화 (60/126)

60.

『데이비드 말인가요.』

정원의 입에서 겨우 나온 말은 그게 전부였다. 사장의 미소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잘못 들은 건 절대 아니었다. 분명히 지금 이름, 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지금의 이름 말고 다른 이름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뭔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정원의 탐색하는 시선에도 그저 여유 있게 웃으며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위압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거의 평범한 비각성자처럼 느껴지는 얼굴이 이상할 만큼 섬뜩했다.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을까?』

방금 전에 비해서는 한결 격식이 없어진 듯한 말투였다. 고개를 갸웃하기까지 하며 하는 말에 기가 찼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정원은 고민에 빠진 채로 우선 차분하게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네요.』

『정말로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테고.』

잡아떼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건가. 그러나 이왕 잡아뗀 마당에 곧바로 태세를 바꾸는 것도 우스웠다. 정원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름이라고 하셔도 잘 모르겠습니다. 데이비드와는 알고 지낸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아서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사장은 가볍게 웃으며 받아쳤다.

『지금 그게 먹힐 거라고 생각해서 계속 거짓말을 하는 건가? 표정 관리하는 법 하나는 확실해 보이지만… 굳이 애쓸 것 없어요. 알고 물어보는 거니까.』

『…….』

『신원을 아무리 잘 숨겨도, 내가 얼굴을 보고도 그 녀석을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 거면 크게 잘못 판단한 거지.』

느긋한 말투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사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석주를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석주가 나름대로 철저하게 조작해 온 신원도 소용이 없을 만큼, 그를 잘 안다는 듯이.

물론 석주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장과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는……. 말을 하지 않은 데에 뭔가 이유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자신을 속일 의도가 있었는지 순간 의문이 들었다. 정원은 의심을 일단 접어 두고 사장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나 말고는 다들 모르는 부분이지. 에단도 마찬가지고. 그쪽은 그냥 말 그대로 비각성자를 데리고 행사 놀음이나 할 생각뿐이니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안심하라는 듯 대답하기는 했지만, 정작 정원의 원래 질문이었던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는 말에 대한 대답이 되지는 못했다. 정원은 다시 한번 침착하게 물었다.

『저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석주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보다 그쪽이 더 중요했다. 자신의 소속과 목적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다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만나겠다 했던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그게 궁금해서 보고 싶었던 거지. 적어도 그 녀석이 끼고 다닐 정도면 꽤 유능한 가이드인 모양인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가. 정원이 고민하는 사이 다음 말이 이어졌다.

『제안을 하나 할까. 나하고 같이 일할 생각은 없나?』

만약 자신이 대한민국 소속의 가이드라는 걸 알고 있다면, 저런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 같기는 했다.

정원은 대외적으로 실종된 형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상태였다. 과거 예언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최고의 가이드’의 탄생을 예고한 이후, 말 그대로 최고의 능력을 가진 가이드였던 형이 태어나자 국가 기관에서는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리고 축하하며 입지를 과시했다. 형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국가 기관의 관리 소홀이라는 말을 들으며 비난당할 것이 뻔한 데다 입지가 위태로워질 가능성도 컸다.

따라서 정원은 마치 형이 사라진 일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를 대체한 상태로 살아왔다.

물론 사실이 들켜서는 곤란하니 국가 기관에서도 정원을 이용한 홍보를 하지는 않았고, 쉬쉬하며 ‘최고의 가이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아껴 왔다. 그러니 이제 정원에게 그렇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작정하고 숨겨온 부분은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얼굴을 공개하고 다니지 않았으니, 현재 타국에 있는 데다 한참을 폐관상태였다던 사장이 정원의 정체를 의심하지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그 ‘최고의 가이드’를 차지한 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건 자신이 그가 죽인 이의 가족이라는 사실도 안다는 뜻이 될 테니, 설마 그걸 알면서도 저런 제안을 한 거라면…….

그건 정말 미친놈이겠지만.

『같이 일하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 잘 모르겠네요. 어차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전 이미 테프트의 직원입니다.』

『이거 참 물건이네.』

침착하게 뱉은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랄 만큼 태연하게 들렸다. 사장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녀석 말인데…….』

하필이면 가장 의미심장한 타이밍에 말이 끊겼다.

거의 부서질 것처럼 격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것이었다. 설마 문밖에 있겠다던 에단 전무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오기라도 한 것인가. S급 에스퍼인 그가 지키고 서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거친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터였다.

…물론 상대가 강석주가 아니라면야.

『존.』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에단이 아니라 석주였고, 그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정원의 이름을 불렀다. 저렇게 심각하고 급박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이 와중에도 본명이 아니라 성의 없게 지은 듯한 가명을 부른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우스웠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다음으로 이어진 말은,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침착한 것 같기도 했다.

정원은 이번에도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사장에게 들은 말이 혼란스럽기도 했고, 형형하게 빛나는 석주의 노란색 눈동자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분명 얼굴에는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저 눈동자만은… 기이할 만큼 비슷하지 않나.

다만, 더 무섭게 느껴지는 쪽을 꼽으라면 강석주였다.

『하하…….』

등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잔뜩 화가 난 강석주와 크게 당황한 정원 사이에서 혼자서만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사장이었다.

『이런 걸 두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뭐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사장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석주를 향한 질문을 던졌다.

『데이비드라고 했죠? 마침 당신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직접 부르진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고 왔네요.』

정원의 앞에서 석주를 아주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완벽한 남을 대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석주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사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존. 무슨 일 없었어요?』

『예?』

사장을 향한 대답이 아니라 정원을 향한 질문이었나.

『무슨 헛소리 같은 걸 듣지는 않았고?』

『아니, 갑자기 또 무슨…….』

정원은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사장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진심으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품은 상태라, 표정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석주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사장은 알 수 없는 얼굴로 석주를 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석주가 성큼 정원 쪽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바로 정원의 팔을 당겨 일으켜 세우더니 시선을 돌려 사장 쪽을 노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원한으로 가득 찬 듯한 표정.

정원은 석주의 그 얼굴을 보자마자 그가 실은 사장과 잘 아는 사이이면서, 자신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모른 척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지웠다.

“가요.”

단호하게 중얼거린 석주를 엉겁결에 따라 나갈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등 뒤가 아니라 바로 귓가였다.

- 『오늘 한 말은 비밀에 부치는 편이 좋을 거야. 그 녀석 너무 믿지 말고.』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몰라도 석주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것도 그가 능력을 운용하는 방식의 하나일까.

석주는 아예 그대로 정원을 데리고 회사 밖까지 나왔다. 정원은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며 사장의 경고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믿지 말라……, 는 건가. 하지만 석주의 표정은 진심으로 보였다. 게다가 자신의 가족을 죽인 사람과 강석주 중 하나를 믿어야 한다면 답은 당연히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상황 때문에 어떻게든 억눌렀지만, 여전히 화는 속에서 끓고 있었다. 정원은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대뜸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강석주 씨. 그 사람이랑 아는 사이인가요? 저보고 당신 믿지 말고 자기랑 같이 일하자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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