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61화 (61/126)

61.

“내 얘기를 했어요?”

석주가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던 것만큼 명확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정원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석주의 창백한 표정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정원이 의아함과 약간의 불안감에 얼굴을 굳힐 때, 석주의 표정 역시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정원 씨, 그건…….”

이상하게도, 살짝 불안한 듯 망가진 표정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정원은 그가 말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괴로운 듯 중얼거리던 석주는 거기서 문득 말을 멈췄다.

“…손이 왜 이래요.”

정원의 손에서 시선을 멈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원은 날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손이 어떻다는 건가요. 말을 돌릴 생각이면-.”

그러나 눈가를 찌푸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니, 그가 손을 지적한 이유를 바로 알 것 같았다.

정원의 손은 형편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상태로 차분하게 입을 열어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정원은 살짝 놀란 눈으로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던 걸까. 분명 감정을 잘 억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이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각하고 나니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그 남자의 얼굴과 표정 하나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원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깊이 한숨을 쉬는 것으로 상태가 나아진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토록 오래 증오했던 남자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멀쩡할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오랜 시간 매여 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석주는 착잡해 보이는 얼굴로 정원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원은 차분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거 때문에 또 그만두라고 할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문득 그가 또 자신의 상태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밀어낼까 걱정이 되어서, 날카롭게 당부했다. 석주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안 그래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제까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원은 잠시 멈칫했다. 자각도 하지 못한 긴장으로 떨리던 몸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겨우 저 한마디가 뭐라고, 그의 말에 이렇게 안정되는 건지 모르겠다. 잠시 멈칫한 정원을 향해 석주가 질문을 던져 왔다.

“내 얘기는… 어떤 걸 했어요?”

살짝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대답하기도 전 다음 질문이 나왔다.

“어땠어요? 만나 보니까.”

그다음 질문 역시도.

“나랑 닮은 것 같아 보여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이번 말은 너무 황당했던 탓에, 더 넋을 놓고 있는 대신 바로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닮았냐니? 지금 ‘석주와 테프트의 사장이 닮았느냐’는 질문을 한 게 맞나? 정원 기준에서는 그게 세상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이 될 것 같았다. 정원의 어이없어하는 되물음에 석주는 미묘하게 찌푸려진 얼굴로 대꾸했다.

“예전에 그랬잖아요.”

말문이 막혔다.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불퉁한 목소리였다. 정원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석주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제가 강석주 씨한테 그 사람이랑 닮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나요?”

미묘하게 죄책감이 섞인 말이었다. 석주는 대답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그의 눈을 보고 테프트의 사장을 떠올린 적이 있는 것은 맞았다. 그러니 아마 기억나지 않는 어릴 때라고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샛노란 색의 눈동자를 보고 그 남자를 겹쳐 보았다면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원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던데요.”

석주는 안심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표정에 크게 변화는 없었지만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안심할 건 또 뭐람. 정원이 머쓱함에 느릿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어릴 때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은 안 나지만,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뭘 모르고 했던 소리니까…….”

이렇게 변명할 이유가 있나 싶으면서도,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느꼈다. 강석주와 테프트의 사장 사이에 비슷한 면이 있다면 그건 딱 눈 색 하나뿐이라는 걸. 그 남자를 볼 때 느낀 불쾌하고 찝찝한 감각과 석주를 볼 때의 느낌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강석주는 위압감을 줄지언정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뭐라고 더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원은 석주가 앞서 한 질문에 뒤늦게 대답했다.

“무슨 얘기를 했냐면, 그냥……. 당신 이름이 데이비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리고요?”

“또… 방금도 말했지만, 강석주 씨를 너무 믿지 말라고도 했어요.”

“그 사람 말을 믿어요?”

정원은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랬으면 당신한테 일러바치지도 않았겠죠.”

“그럼 나 믿어요?”

석주의 말은 곧장 이어졌다. 묘하게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정원은 약간 기시감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친놈보다는 믿죠.”

“그 정도로는 안 돼요.”

“…….”

곧장 나온 말에 정원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제 보니 강석주는 묘하게 초조한 기색이었다.

얼마나 믿는다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백 퍼센트 믿는다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그가 너무 애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정원이 그 남자와 만난 것이 석주에게도 적잖은 동요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결국 석주는 정원의 대답을 듣지 않은 상태로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뭘 말인가요…….”

“날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그 남자가 석주를 알고 있다는 게 그 불안함의 원인인 것 같았다. 대체 그 남자가 강석주의 무엇이기에… 이런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걱정은 마세요.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뭘 어떻게든 할 건데요?”

“어떻게든… 정원 씨 다칠 일은 없게 하겠다고요.”

떠보려고 한 질문이 머쓱해질 만큼 진지한 대답이었다. 그 말을 마치고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석주는 곧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정원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잠시 멈칫했지만, 정원은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뺨에 닿은 손이 피부를 느리게 쓸어 내렸다. 석주는 정원의 얼굴을 눈에 새기려는 것처럼 꼼꼼히 훑어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정말 소중한 것을 다루는 것 같은 손길. 너무 아낀 나머지 장식장에 넣어 놓고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는 조각상을 난생 처음으로 꺼내 본 사람처럼 감회가 새로운 얼굴.

대체 이 남자는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자신을 이렇게 바라보게 된 걸까?

처음 만났을 때… 아니, 엄밀히 말해 처음은 아니겠지만. 이번 임무로 만났게 됐을 때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것은 그가 잘 숨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여유가 없어 알아보지 못했던 것뿐일까?

석주는 한참 만에 정원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각인……. 다시 생각 좀 해 볼게요.”

정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늘 강경하던 석주가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해보겠다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오늘의 사건이 정원에게는 격변을 일으킬 만한 상황이었던 건 맞았다. 평생 쫓던 사람을 만났고,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했던 순간은 새로운 악몽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석주가 마음을 바꿔 각인에 대해 고민하게 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정말로 자신을 걱정하는 거라면. 이젠 ‘그’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 거라면…….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직감적으로 그 질문을 던진다면 석주가 다시 발을 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원은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요.”

말을 마친 석주가 조용히 등을 돌렸다.

그건 정원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혼잣말처럼 들렸다.

결국 원하던 답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음에도 생각만큼 의심스럽고 불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석주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가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정신적인 피로가 누적된 탓에 정원은 대화를 마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정원이 일어났을 때, 석주는 이미 호텔 방을 떠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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