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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62화 (62/126)

62.

잠에서 깬 정원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분명 지나치게 생생한 꿈을 꾼 탓에 식은땀을 흘리며 깼는데, 정작 꿈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정원은 앳된 얼굴의 소년을 봤다. 헝클어진 곱슬머리에 완벽한 미형의 얼굴이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분명 강석주의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한 가지는 아니었다. 우선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에스퍼의 기운이 소년에게는 느껴지지 않았고, 인상적인 샛노란 눈동자가 아니라 밋밋한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꿈에서 무슨 말을 했더라…….

머리를 감싸자 끊어진 장면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꿈속의 어린 석주는 어딘가에 묶인 채 공허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은 그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정원 자신의 기척을 눈치채던 현실의 석주와 달리 꿈속의 어린 그는 깨어나기 직전까지도 정원이 서 있는 위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을 담은 개꿈인지, 아니면 정말로 과거의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전자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왜 눈 색이 실제와 달랐던 걸까. 설마… 그게 정원 자신이 바라는 석주의 모습이기라도 한 건가? 그런 걸 바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계속해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불길함에, 정원은 결국 석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이후 음성 사서함으로…….

길게 이어진 신호음 끝에 건조한 기계 음성이 들려 왔다. 그 뒤로 두 번을 더 걸었으나 석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뭘까. 이 기분은.

정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석주는 곧 돌아올 것이다. 그때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은 건 별일 아닐 것이다. 어쩌면 꿈에서 그를 봤다고 하면 기억이 돌아온 게 아니라고 해도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석주는 하루가 다 지나도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문을 열어젖힌 정원은 인사조차 하지 않고 성큼성큼 데스크를 향해 다가갔다. 직원은 당황한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본부 연결 부탁드립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꺼내자 말을 걸려던 직원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곧 쭈뼛거리며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정원을 안내했다. 정원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유 관장과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 아이고……. 또 무슨 일이야?

기다림 끝에 조금 성가셔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은 반사적으로 전화기 쪽으로 한껏 몸을 기울였다.

“큰일입니다.”

- 뭐길래 그래.

정원답지 않은 화법이었다. 헛숨을 삼키자 심각한 반응에 관장 역시 당황한 듯했다. 귀찮아하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강석주 씨가…….”

- 또 석주 얘기야?

“돌아오질 않아요.”

관장은 황당하다는 목소리였지만, 정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오늘로 사흘째였다. 강석주가 돌아오지 않은 지.

하루는 용건이 길어지나 보다 했고, 이틀째는 심각한 일을 처리하고 있나 보다 했다. 그러나 사흘째가 되니 더는 기다리기 힘들어졌다. 그렇게 강한 능력을 가진 S급 에스퍼가 며칠 돌아오지 않는다고 초조해하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얽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도무지 마음을 놓고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었다.

- 뭐, 안 돌아온다고? 얼마나 지났는데?

“사흘 됐습니다.”

- 허…….

정원의 심각한 대답에 관장은 조금 어이없어하는 듯한 탄성을 흘렸다.

- 난 또 뭐 얼마나 됐다고.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뭔가 일이 있는 게…….”

- 그 녀석 그거, 자주 그래.

도무지 진지하게 들을 기색이 아니었다. 관장의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에 정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 원래 사람이 좀 멋대로거든. 에스퍼들 다 그렇잖아. 석주는 S급인데 오죽하겠어?

“…….”

- 임무 하다가 한참 연락두절 돼서 걱정했는데 며칠 뒤에 보면 다 해결했다고 돌아오고, 이런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석주다운 일이었다. 분명 정원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해하지 않았을 터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지금 관장이 한 말로 충분히 납득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테프트의 사장, ‘그’를 만난 시점이다. 아무런 사정없이 잠수를 탈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관장에게 그걸 설명할 수도 없었다. 독단적으로 행동하던 석주가 자신의 앞에서는 그러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민망했고, 테프트 사장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사장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듣는다면 기관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정원이 절대 다른 사기업 등으로 옮겨 갈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원을 잡아 놓기 위해 갖은 수를 써 왔던 기관이었다. 테프트의 사장이 정원에게 함께 일하자는 말을 했다는 보고를 들으면 혹시라도 정원이 그곳으로 넘어갈 상황에 대비하겠다며 정원을 강제 송환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석주의 상황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석주를 생각한다면 구구절절 설명해서라도 도움을 청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제가 과민했던 것 같아요.”

그 길로 실없이 전화를 끊었다. 정원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국가 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석주를 찾는 것은 전적으로 정원의 몫이었다. 석주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라도 꼭 제가 상황을 해결해 주어야만 했다.

물론……. 짐작이 가는 바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정원은 사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다시 본 순간 완벽하게 기억해 냈다고 생각한 얼굴이지만,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시간이 워낙 길기 때문인지 떠올리려 하면 여전히 막연한 인상으로 그려지는 얼굴이었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 보아야 했다.

* * *

만남은 정원이 생각했던 것처럼 어렵지 않았다. 정원이 한 것은 에단 전무를 찾아가 사장님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 것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전무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정원을 사장실로 올려 보냈다.

설마 회사 건물에 있었을 줄이야. 정말로 폐관 수련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끝낸 모양이었다.

『또 보는군.』

느긋한 인사에 치가 떨릴 것 같았다. 정원은 일전 그랬던 것처럼 겨우 평정을 유지한 채 바로 인사를 꺼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연락도 없이 실례했습니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장은 부드럽게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우연인걸. 나도 마침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전에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격의 없어진 말투. 뭘 했다고 이렇게 친근한 듯한 말투를 쓰는 것인가 싶어 우스웠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데이비드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데이비드?』

사장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원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워낙 태연한 반응 탓에 자신이 정말로 뭔가를 잘못 짚은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외엔 달리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그런 대화를 한 바로 다음날 사라졌는데, 사장과 연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했다.

『생각보다 그 녀석이랑 가까웠던 모양이야.』

『제가 그의 가이드니까요.』

『각인을 맺은 것도 아니지 않나?』

『어쨌거나 제가 담당하는 에스퍼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사장의 얼굴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가족의 원수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복수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간신히 눌러 참았던 분노였다. 그러나 지금 정원은 또다시 그에게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기분을 느꼈다. 중첩된 화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었다.

반면 사장은 정원과는 반대로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는 정원의 심각한 표정을 빤히 보다가 곧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했던 말은 생각해 봤나?』

『…또 그 소리를 하시려는 겁니까?』

석주를 너무 믿지 말고, 자신 편에서 일하라는 이야기?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사장을 바라보자, 그는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얼굴로 다시 웃어 보였다.

『너무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죄송하지만 제 질문에 먼저 대답해 주시죠. 데이비드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신 겁니까?』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어깨를 으쓱한 사장이 정원을 자극하듯 묘한 말을 꺼냈다.

『아무렴 내가 그 녀석을 자네보다 모르겠나?』

마음 같아서는 아는 척하지 말라고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결국 이어지지 못했다. 정원이 참은 탓도 있었지만, 사장의 다음 말 탓이기도 했다.

『자네를 찾는 사람이 있어. 아마 자네도… 반가워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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