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방 안으로 들어서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전등이 켜졌다. 정원은 깜빡이는 조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원래 저런 식으로 불안하게 깜빡였던가.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 이 순간엔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깜빡이던 불이 완전히 나가 버렸다. 당연히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야겠지만 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 상태였다. 정원은 침대 위에 힘없이 드러누웠다. 단정하게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잊었다. 지금은 그저 생각 아닌 생각에 집중하고 싶을 뿐이었다.
불이 꺼진 방 안엔 강석주가 돌아오지 않은 뒤로 쭉 정원 혼자뿐이었다.
같이 있던 사람이 없어져서일까. 아니면 불이 나가 버렸다는 상황 때문일까. 오늘따라 넓은 침대가 어쩐지 너무 허전하게 느껴졌다.
석주가 있을 때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방을 같이 쓴 것도 아니었고,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 한 먼저 찾아가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와 다시 같은 숙소를 쓰게 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쩐지 쓸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쓸쓸함이라는 건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이었다. 더군다나 강석주가 상대라면 더더욱.
정원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그대로 한참을 더 누워 있었다.
물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오늘 본 사장과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석주가 연이어 떠올랐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형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거를 되짚어 보게 됐다.
형만이 아니었다. 과거 자체가 정원에게는 아득한 기억이었다. 석주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한 과거를 떠올리려 하면 여전히 갑갑하기만 했다.
그는 정원이 과거의 일을 완전히 기억해 내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과연 자신이 그때를 기억해냈다며 그에게 당당하게 각인을 요구할 날이 오기는 할까.
묘한 회의감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한참을 고민하던 정원은 결국 고민하던 부분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억지로 눈을 감아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 * *
『형을 만나게 해 주시죠.』
사장을 마주한 정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했다. 사장은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벌써 마음을 정한 모양이지?』
대화를 나눈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이상 미룰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형이 무사한 거라면 하루라도 더 빨리 그걸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드니 신기한 것 보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살며시 얼굴을 구기는 것 정도로 겨우 표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정원은 차게 식은 웃음소리를 냈다. 여러 번 곱씹어 봐도 그의 말은 조금 우습게 들렸다.
『의외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제법 가까워진 줄 알았으니까.』
사장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어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석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정원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고민한 부분은 처음부터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디 말해 보게.』
『말하라고 하셔도……. 너무 당연한 얘기죠. 처음부터 비교할 것도 없는 일 아닌가요.』
정원은 정말로 당연한 것을 말한다는 듯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로 강석주라는 사람 따위는 자신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는 듯 덤덤한 태도였다. 과연 이게 상대의 눈을 얼마나 속여 넘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시든, 단단히 정이 붙었다고 오해하시든 상관없습니다만……. 형이 무사하기만 하다면, 그건 저울에 재볼 일도 못 되죠.』
『그러니까 자네 말은, 처음부터 형을 선택할지 그 녀석을 선택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그런 건가?』
자신의 말을 믿으면서도 별생각 없이 던지는 말인지, 아니면 의심해 떠보려고 하는 것인지 이번에도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정원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그런 셈이죠. 제 선택은 당연히 형입니다. 그걸로 고민할 리가 없죠.』
그 말에 사장은 재미있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뭐 때문에 고민한 거지?』
『당신 말이 거짓말일지 아닐지를 생각했습니다.』
꽤 도발적인 대꾸였다. 표정과 말투를 최대한 불손하게 만들어 보였으니 더 뻔뻔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사장은 한참 동안 뻔뻔한 정원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래. 만나게 해 주지.』
『…….』
한참 만에 나온 말이었다.
정원이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 쉽게 나온 수락 때문에 그간의 시간이 얼떨떨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쉽게 그를 만날 수 있을 거였다면, 또 이렇게 쉽게 형의 생사를 확인하고, 나아가 관여까지 할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살짝 오싹해졌다. 머리를 머쓱하게 건드리는 정원을 보며 사장이 웃어 보였다.
『내가 이 이상 직접 나서야 할 일이 없어서 다행이군. 앞으로도 없게 하는 편이 좋을 거야.』
충분히 많이 나섰다고 생각했는데, 이 이상도 있을 수 있다는 건가. 괜히 소름이 끼쳤다.
『확실히 알려주기만 한다면……. 절 속인 게 아니란 것만 확신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겁니다.
애써 의연하게 대답하자 사장은 다시 덤덤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그럼 바로 출발하지.』
지금 당장? 정원이 얼떨떨한 얼굴로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장은 정말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나설 채비를 할 뿐이었다.
정원은 표정 없는 얼굴로 사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무색무취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자연스럽고 단호했던 대답이 무색하게도 폭풍 직전 같은 고요함이 감돌았다.
* * *
좁은 방 안에서는 묘한 냄새가 났다. 곰팡이가 슨 것 같기도 하고, 시멘트가 덜 마른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냄새였다. 평소라면 그 정확한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그 이상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없는 걸 보니 감각이 마비된 상태인 것 같았다.
희미한 감각에 집중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느릿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안녕? 상태는 좀 괜찮아?”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보아도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석주는 그제야 제 얼굴이 무언가로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도 평소답지 않은 일이었다.
무슨 짓을 당한 걸까……. 너무 방심한 건가.
방심하지 않았더라도, 최근 강석주 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보면 이런 꼴이 된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곧장 의아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웃어? 뭐가 재미있어서 웃어?”
석주는 보이지 않는 상대의 위치를 대강 가늠하며 대꾸했다.
“자기소개부터 하지?”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새 어디론가 사라졌다기에는 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그대로였다.
왜 말이 없냐고 한 번쯤 물어볼까 하다가, 밀려오는 무료함에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가려진 눈앞까지 다가온 손이 두어 번 흔들렸다. 제대로 시야가 차단된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걸까.
실제로 보인 것이 아니라 기척으로 알아낸 것이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모른 척 앉아 있었더니, 그걸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안심한 듯 다음 말이 이어졌다.
“알아서 뭐에 쓰게? 애초에 별로 알고 싶은 것도 아니잖아?”
정확한 말이었다. 어차피 자신을 여기 이렇게 가둬 놓은 이상 그 남자는 머지않아 석주를 찾아올 터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아니, 조금은 알 것 같은 상대에게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던질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으면서 질문은 하겠다는 건가. 그 남자의 하수인인지, 파트너인지 모를 상대라서 그런지 뻔뻔함이 상당히 비슷했다. 석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는 알아서 좋을 대로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끼어든 거야?”
“무슨 생각이라니.”
“새삼스럽게 당신이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보통 그런 일을 겪었으면 다시는 얼굴 비칠 생각도 없이 조용히 죽어 살지 않나……. 에스퍼는 생각하는 게 좀 다른 건가?”
이 남자는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석주는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듯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그렇게 해 봤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뭐 찾아? 혹시 내 동생?”
재미있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료하게 풀려 있던 석주의 입매가 처음으로 굳어졌다. 남자의 말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계속해서 이어졌다.
“설마 찾아와 주길 기다리는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