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기대라. 기대를 했던가. 정원이 자신을 찾아줄지도 모른다고, 그런 기대 비슷한 것을 했나.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헛된 희망 때문이 아니라, 그저 생각을 하려고 하든 하려고 하지 않든, 강석주의 모든 생각이 그로 시작해 그로 끝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상대의 말은 석주에게 그리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보다는 앞에 있는 상대 자체가 문제라고 해야 할까.
정원의 형이라니.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눈이 가려진 것 자체는 불편하지 않았으나 상대의 얼굴이 궁금하기는 했다. 정원을 닮은 얼굴일까.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석주의 복잡한 기분과는 별개로, 그는 즐거운 듯 웃으며 덧붙였다.
“포기해. 네가 걔한테 뭔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건 그냥 착각이야.”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서 웃는 걸까. 자신은 여태껏 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 삼아 꺼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정작 정원이 가장 깊이 생각하고 신경 쓰는 사람은 가벼운 흥밋거리를 대하듯 그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대체 이자에게 정원은 어떤 존재였을까.
왜 그는 이런 사람을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생각해야만 했을까.
좀 더 깊이 생각하다 보면 정원을 향한 책망이 될 것만 같아서, 석주는 거기서 멈추었다. 대신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이곳에 오기 전 무슨 일이 있었더라.
어렴풋하던 기억이 겨우 선명해졌다. 분명 자신은 그 남자를, 테프트의 사장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있는 건 그가 아니라 정원의 형이었다. 의문을 표할수록 상대는 즐거워할 게 뻔하니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대체 그 남자와 정원의 형 사이에 정확히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묻는다면 대답할까. 그러나 지금 자신은 어떤 걸로도 딜을 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생각하던 석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을…….”
“…….”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네.”
자신이 그에게 뭔가가, 그러니까 어떤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물론 있었다. 뭔가가 될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결론짓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상대의 말에서 거슬린 부분은 그 결론을 짓뭉개버리는 단언이 아니었다.
마치 정원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저 태도. 그게 거슬렸다.
“그럴 수밖에 없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 자신이 정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석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이 아니라 그저 실제로 재미있어서 뱉는 웃음에 가까웠다.
“난 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좀 신기해.”
첫마디부터 반말을 들어서인지, 입에서는 오래 알았던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격식 없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정작 내용은 전혀 친밀하지 못하다는 게 우스운 지점이었지만. 석주는 담백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피가 이어졌다는 게 뭐길래,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
“알았던 시간보다 몰랐던 시간이 더 길면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신기할 만큼 정원과 비슷했기에 의심할 수는 없었다. 물론 석주는 아무리 비슷하다고 해도 정원의 목소리를 분간해낼 자신이 있었기에, 비슷한 동시에 다른 사람이라는 걸 잘 알 수 있었지만.
어쨌거나, 정원이 그의 형과 헤어진 것은 이미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었다. 그는 형이 죽었다고 생각한 채로 아주 긴 시간을 살아왔다. 그동안 떨어져 지냈던 이가 잘 안다고 자부하기에 석주가 아는 정원의 머릿속은 너무나 복잡했다.
그러나 석주의 웃음 섞인 말을 듣고도 상대는 전혀 동요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가볍게 따라 웃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냐.”
“그럼 뭐가 중요한데.”
석주는 날이 서지 않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동안 내가 죽은 줄 알고 지냈든 아니든, 뭐가 달라지지는 않는다구.”
처음으로 살짝 표정이 찌푸려졌다. 저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더 묻지 않아도 알아서 알 수 없는 설명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요즘 이런저런 사람들을 참 많이 보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게 있어. 사람은 정말로 세뇌에 약하구나. 정신이라는 건 정말 쉽게 조종당하는구나.”
“…….”
“실제로는 세뇌당해서 스스로 사고하지도 못하는 상태면서, 모든 걸 자기가 선택한 거라고 생각하지. 어리석고 불쌍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행복하다는데.”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말을 듣던 석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이야기하고는 있었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지금 그가,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이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세뇌’와 관련 있는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는 것.
그날 입사 설명회를 빙자해 벌이려 했던 짓처럼.
석주는 차분하게 생각했다. 이 남자는 테프트의 사장 밑에 있다. 정원이 그날 보았다는 것도 이 남자, 그러니까 정원의 형 본인이 맞을 테고.
어쩌면 형이 인질로 잡혀 있을 거라는 정원의 생각과 달리, 그는 테프트의 사장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일하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는 내용만 들어 봐도 할 수 있는 예측이었다.
그럼에도 추측일 뿐이었고, 분명 정원이 원하지 않는 사실일 테니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연설하듯 말을 늘어놓던 상대가 문득 말을 멈췄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침묵이 길어지니 대체 그가 무슨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는 조금 궁금해졌다.
한참 만에 다음 말이 나왔다.
“어릴수록 효과가 좋아. 어릴 때 당한 세뇌는 뭘 해도 좀처럼 풀리지가 않지……. 멍청하고 착할수록 그게 심하고.”
멍청하고 착하다. 누가 감히 정원을 그런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 냉랭하지만 누구보다 섬세하고, 누구보다 연약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을.
표정을 곧이곧대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 석주는 그저 이를 악물기만 했다. 이곳에서 눈을 뜬 뒤로 한 최대의 감정 표현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상대는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내 동생이 딱 그래. 멍청하고 착하고 순진했지. 그 상태에서 가족들이 다 죽어 버렸으니까, 걔는 사실상 몸만 큰 거나 마찬가지야. 아직도 그때 믿던 게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그런 거지같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복수 같은 걸 하겠다고 설치고 있는 거고…….”
“다 알았다는 거네.”
석주가 단언했다.
그렇구나. 모든 걸 알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왜 정원을 찾지 않았던 걸까.
당연한 의문이 이어졌다. 정원의 몫이어야 할 테지만, 그는 듣지 못했을 테니 자신이 대신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그의 옆에 형이 있었다면, 아니 적어도 형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정원은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지금처럼 자신을 몰아세우지도, 세상에 믿을 게 하나 없다는 듯 딱딱한 표정을 짓고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정원이라는 사람에게 자신이 파고들 틈은 조금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지금보다는 그가 더 편하고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석주가 가장 바라는 바였다. 자신이 그의 옆에 머무르는 것보다도 더.
왜 찾지 않았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제 와서 그 사람을 찾는 이유가 뭐야.”
그러나 상대는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맑게 소리 내어 웃기만 했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야.”
“…….”
“지켜보기나 해.”
뭘 지켜보라는 건지, 그 답은 금세 나왔다.
제 할 말만 실컷 떠든 뒤, 정원의 형은 그대로 방에 석주를 남겨 둔 채 자리를 떠났다. 눈을 가린 것과 몸을 묶은 것을 풀어 주지는 않은 상태였기에, 다른 감각들이 막혀 듣는 것에 더욱 예민해졌다. 그렇게 혼자 남겨져 있다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을 무렵 다른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정원의 형이 들어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소리였다. 더 묵직하고 투박한 소리.
그리고 다가온 손이 안대를 풀어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마 테프트의 사장이나, 아니면 정원의 형의 경호원쯤 되지 않을까. 석주는 갇혀 있던 사람답지 않게 평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은 이대로 둘 거예요?』
그러면서 대충 질문을 던졌다. 피로한 눈가를 마른 세수로라도 달래고 싶었건만, 물론 손을 풀어줄 리는 없었다. 알면서도 의미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눈이 보이게 되었는데도 상태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묶인 손끝을 움직여 봐도 능력을 쓸 수가 없었다. 몸에서 이능력이라는 게 차단된 것 같은 감각. 에스퍼를 위한 구속구라도 채워 놓은 것인가. 자신을 묶어 둘 만큼 강한 구속구는 없었지만 상대가 테프트의 사장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단순히 구속구를 채워 놓은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빼앗긴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지. 그때랑은 느낌이 달라…….’
속으로 위안인지 사실적시인지 모를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화면이 밝아지고 있었다. 경호원이 화면을 조정하자, 그 속에서 정원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과거의 영상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현재를 찍고 있는 것이라는 걸. 화면 속의 정원은 저를 비추는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 무방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아까 목소리로만 만났던, 정원의 형이었다.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얼굴을 보지 못했고 화면 속에서도 뒷모습만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정원이 짓고 있는 표정 때문이었다.
너무 그립고, 너무 괴롭고, 너무 감격한 것 같은 표정.
“…….”
강석주의 얼굴이 오늘 처음으로 형편없이 일그러지며 흐트러졌다. 심장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