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어떻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불안정한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전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정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뱉는 말을 들으니 더욱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몸은 괜찮은 거야? 다친 데는 없어? 협박당하지는 않았어?”
“…….”
“부당한,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거나.”
“…….”
“형…….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정원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하는 것처럼 들린다. 대체 저 목소리를 들으면서 저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저렇게 간절하고 안타까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어떻게 평정을 유지할 수가 있는 걸까. 정원의 얼굴은 점점 더 불안하게 보였다.
“괜찮은 거야? 혹시 말을 못 하는 상황이야?”
“…….”
“아예 말을 못 하게 된 거라든가…….”
“…….”
“제발, 맞으면 그렇다고 고개라도 끄덕여 줘.”
“……”
“형……. 괜찮아?”
화면 속에서 뒷모습만 보이는 정원의 형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마네킹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뒷모습이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석주는 본인의 표정이 얼마나 망가졌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화면을 노려보았다. 빳빳한 뒷모습을 보는 기분은 점점 더 형편없어졌다.
자신의 앞에서는 잘만 떠들더니, 왜 정작 저기서는 과묵한 척을 하고 있는 건가. 사장에게 말을 하지 말라는 압박이라도 당한 건가.
아니, 그것보다는… 그런 압박을 당한 척하고 있는 쪽에 가깝겠지.
그럴수록 정원은 더 불안하고 절박해질 테니까. 더욱 형이라는 존재에게 매달리게 될 테니까…….
석주는 한숨조차 내쉬지 못한 채 가만히, 그리고 멍하니 화면 속을 바라보았다.
괜찮다는 대답을 듣고 확연히 안도한 것 같은 정원의 얼굴이 보인다. 언제나 감정이 없는 척하며 무미건조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급변했다. 울 것처럼 글썽였다가, 안도해 웃었다가, 불안하게 흔들리기를 반복했다.
결코 강석주의 것은 아닌 얼굴이다.
그게 아쉽다거나, 그 표정을 갖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 지낸 지 너무나 오래된, 얼굴조차 희미했을 형이 뭐길래 그가 저런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왜 저 남자는 저토록 정원의 걱정을 받으면서도 저런 반응밖에 보이지 못하는 건지. 그게 알고 싶을 뿐이다.
조금 전 이 방 안에서, 그 남자에게 들었던 목소리가 화면을 통해 흘러나왔다. 방금 전과는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형이랑 같이 가지 않을래?”
정원의 표정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석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이후로 들리는 목소리는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겨우 다시 눈을 떴을 때, 화면에는 더는 아무것도 비치고 있지 않았다. 정원의 얼굴도, 형의 뒷모습도.
그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형을 따라가려 할까. 그토록 기다린 사람이었으니까. 이제 테프트 사장을 향한 증오도 의미가 없어졌을까. 가족을 앗아갔다고 하지만, 형을 돌려준 것 역시 그 남자니까.
그렇다고 해서 정원의 해묵은 분노가 완전히 사라졌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지만, 화면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정원의 표정에서는 미움이 아닌 기쁨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떠나는 걸까.
자신을 버려두고.
아니다. 애초에 정원은 강석주를 가지고자 한 적이 없으니, 버려두고 떠난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다. 그는 그저 자신이 있고자 했던 곳으로 돌아갈 뿐이다. 석주의 일방적인 기억만이 남은 과거를 제대로 떠올리지도 못했고, 설령 기억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원에게 있어서 석주만큼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니, 형을 따라 가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견딜 수가 없었다.
정원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를 걱정해서이기도 하고, 테프트에게 그를 넘겨주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그저 그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서이기도 하다. 그건 석주의 오랜, 그리고 드러낼 수 없는 바람이었다.
지금 정원이 눈앞에 있다고 해도 이런 복잡한 감정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안 된다. 그들은 분명 정원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겨우 형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취해 있는 그 티 없는 사람을…….
문득 무력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어두컴컴하게 죽어 있던 화면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그래……. 지금 기분은 좀 어떤가?”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분한 한국어. 목소리의 주인은 화면에 비치지 않았지만, 석주는 첫마디를 듣는 순간 바로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렸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 헷갈릴 리 없는 그, 사장의 음성이었다.
“대답하기 힘든가 보군.”
다음 말 역시 그의 입에서 나왔다. 아마 저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원이리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자네 형에게 아무 위해도 끼치지 않았어. 그러니 그런 표정으로 볼 것 없네.”
“…….”
“오히려 아주 극진하게 대접했지. 그가 하고 싶다는 건 뭐든지 다 하게 해줬고. 아,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했어도 들어주지 않았겠지만. 자네에게 자네 형이 중요하듯이, 내게도 마찬가지였거든.”
노래하는 것처럼 경쾌하고 여유롭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화면 속에 보이는 것은 무늬 없는 흰색 책상과 그 위에 놓인 정원의 손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디마디가 희게 질린 손만 봐도 그가 어떤 기분일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정원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볼 수만 있다면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본다면 더 괴로워질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참 동안 정원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석주였다. 화면 속의 사장이 아니라.
정원의 대답은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형을 죽이기 위해 찾아왔던 게 아니었나요.”
“음?”
“오래전에 그런 예언이 있었죠. 최고의 가이드가 최강의 에스퍼를 무너뜨릴 거라는…….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게 두려워서 형을 찾아왔던 게 아닌가요.”
석주조차 정원이 저 말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침착한 말투로 저런 말을 꺼낼 수 있다니.
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원은 방금 전에 비해 조금 더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형을 살려둔 거죠?”
“형이 살아있어서 기쁘지 않나?”
사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형이 살아있다는 건 제게는 정말로… 그 무엇보다 잘된 일이지만…….”
“그렇다면 날 탓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정원의 손이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망설이는 듯하던 손의 떨림이 멎고, 정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뭐라고?”
“감사합니다……. 형을 살려주셔서.”
그는 대체 어떤 기분으로 저 말을 뱉고 있을까. 가족을 모두 죽였다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비록 형은 살아있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원수인 남자 앞에서.
석주는 가만히 그의 손을 들여다봤다. 하얗게 질려 움직이지 않는 손은 복잡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의 것 같지 않은 사장의 목소리는 잠시 후에 다시 이어졌다.
“내가 왜 그를 살려뒀는지, 그것만 궁금한가?”
“…예?”
“왜 자네를 속인 걸까……. 그런 의문은 안 들어?”
정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석주는 듣지 않고도 사장에게서 나올 다음 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명색이 국가기관이면서, 왜 있지도 않은 시체를 확인했다고 하면서 자네를 속였을까?”
“…….”
“자네는 이용당한 거야.”
예상했던 말. 사장은 사람의 마음을 나쁜 쪽으로 움직이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저런 말을 듣고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원은 나름대로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형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든 형을 찾으려고 했을 거예요."
“흠.”
“형은……. 형이 있었다면 저보다 더 도움이 됐을 테니까.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떨리는 목소리. 침착하게 대답하려고 하지만 스스로도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말 그랬던 거라고 해도, 자네를 이용하기 위해 속였단 사실은 변하지 않아.”
“…….”
정원의 불안한 숨소리를 들으며, 석주는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무엇보다 자네 관장은 모르지 않았어. 그가 살아 있다는 걸.”
누구나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자네가 유 관장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든 말든 관심이 없네. 그저 자네 형이 이러기를 원해서 들어줬을 뿐이야.”
정원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형, 그도 정원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 그 말에 과연 정원이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석주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다시 한번 무력감이 그를 덮쳤다. 사장이 쐐기를 박듯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피할 수 없는 그 말을.
“자네의 데이비드는 내가 못 본 새 유 관장의 개가 됐더군.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