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67화 (67/126)

67.

정원은 한참 침묵했다. 화면에 보이는 흰 손이 몇 번 까딱거리는 것으로 통신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음을 알렸다. 석주는 선고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알고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법 긴 시간이 지난 뒤, 마침내 입을 연 그가 차분하게 물었다. 그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사장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마 고개를 끄덕인 거겠지.

이제 정원은 뭐라고 말할까. 그걸 생각하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발밑이 깜깜했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헛웃음이 나왔다. 석주는 스스로가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정원으로 인해 처음 알았다.

그가 그 말을 믿을까?

사장이 내민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내밀려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석주는 정말로 몰랐으니까.

유 관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본인의, 그리고 본인이 몸담은 국가 기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 남에게는 전부가 될 수도 있는 사실을 태연하게 은폐할 수 있는 사람.

석주는 자신 또한 그의 장기 말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는 있었다.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기 때문에 나서서 묻지 않았을 뿐.

그러나 사장의 말대로 정원의 형은 살아 있고, 국가기관이 정원을 속였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어쨌거나 강석주는 명목상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있으며, 유 관장의 명령을 따르는 입장이었다. 강석주가 어떻게 해서 이번 일에 정원과 함께하게 된 건지, 그 과정을 정원은 정확히 모른다. 그러니 정원이 아는 범위 내에서 석주는 의심하기 딱 좋은 상대일 것이다.

그가 믿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는 석주를 떠날까. 함께했다고 표현할 만한 사이는 못 되기에 떠난다는 말도 적절하지 않지만.

그를 걱정해서라고는 하나, 어쨌든 그를 밀어냈던 건 강석주 자신이었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은… 아니길 바랐는데.

“만나게 해 주시죠.”

석주가 생각에 잠긴 사이, 화면 속에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석주는 퍼뜩 고개를 들었고, 사장은 큭큭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왜, 직접 만나서 변명이라도 듣고 싶은가?”

그가 자신을 만나 보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정원은 석주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려는 게 아닐까.

“말했을 텐데? 더는 그 녀석을 찾지 말라고. 이제와 정에 휘둘리려는 건 아니겠지.”

예상대로 사장의 대답은 건조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정원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힘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뭔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 변명이라니……. 그런 게 듣고 싶겠습니까?”

“흠?”

“솔직히 믿기 어렵지만. 아니, 믿고 싶지는 않지만……. 형이 살아있는 건 사실이지 않나요. 게다가 형은… 괜찮아 보였습니다.”

정원의 말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건강해 보였고, 심리적으로 압박을 당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는 건 형을 잘 대해주셨다는 거겠죠.”

석주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그는 결국 사장의 말을 믿어 버린 모양이었다. 정원은 단호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전 형이 바라는 대로 일할 겁니다.”

“흠……. 윤이 말했던 대로군.”

“이제까지 뭘 위해서 이렇게 살아온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걸까. 아니면 원망하려고? 그런 거라고 해도 상관없으니 우선 만나기만 한다면…….

…아니, 그를 만나 솔직하게 해명한다 해도 믿기 어려울 것이다. 결백을 입증할 증거가 없기로는 석주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농락당한 기분이겠군. 이해해.”

“네. 그래서 한 대 쳐주기라도 하고 싶어서요.”

화면 속에서 사장은 관대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저 남자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던가. 하지만 정원에게는 자신을 속인 국가 기관 쪽이 더 가증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사장은 정원의 가족을 앗아간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의 가족을 어떤 이유에서건 보호해준 사람이기도 하니까……. 또, 그의 형이 그러기를 바란다고 하니까.

사장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곤란해, 곤란해. 방금도 말했지 않나. 분명 다시는 찾지 말라는 조건으로 형을 보여줬을 텐데?”

“…….”

“그렇긴 하지만 뭐…….”

말을 흐린 사장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정원의 손이 당황한 듯 멈칫거렸다.

“반응이 볼 만하겠군.”

“…….”

“좋아. 딱 5분만 주지.”

자신을 정원과 만나게 해 주겠다는 걸까. 반겨야 할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 * *

다시 기절했었나.

눈을 떠 보니 손발은 의자 뒤로 묶인 채였고, 입은 재갈로 막혀 있었다.

이 정도를 풀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평소대로라면.

그런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역시 능력을 묶어 놓은 걸까. 속박을 풀려 하면 과부하가 올지 모른다. 성공하더라도 폭주 단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때… 연구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그 폭주를 막아줄 사람이 없다. 섣부른 시도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럴 의욕조차 들지 않았다. 온몸에서 능력만이 아니라 기력까지 함께 빠져나간 것처럼 멍했다. 머리가 일부러 깊이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듯했다.

곧 정원이 오는 걸까. 아니면 설마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이미 다녀간 것은 아닐까.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요.』

전무였다. 사장이 직접 오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저 전무에게 어디까지 알려준 걸까.

테프트라는 기업은 기본적으로 사장을 신처럼 믿고 따르는 구조이지만, 정작 사장은 자신의 계획이나 진짜 목표 같은 것을 남과 공유하지 않는 성정이었다.

가까이 둔 측근에게도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 것 같았고. 만약 말했더라면 그가 나타날 시기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여러모로 예상 밖의 일이 많았다. 단순히 지금 전무가 등장한 걸 넘어, 그 외의 많은 일들이 의외였다. 사장이 돌아올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그가 자신에게 아직 집착하고 있다는 것도 솔직히 예상 밖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원을 회유해 끌어들일 거라고는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정원이 얽혀 있다는 말에 너무 급하게 뛰어들었던 것이 문제였나.

한숨을 쉬며 기척을 가늠했다. 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정원이었다.

정원은 아마 주어진 5분 동안 자신을 본 뒤 떠날 것이다. 그렇다면 석주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를 구해내면서… 본래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을까.

정원의 걸음이 천천히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조용히 석주의 앞에 다가와 섰다. 단정하게 모인 발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원은 표정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눈까지 가려 놓지.’

내심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각오하고 있었지만 저 싸늘한 눈동자를 직접 보니 제법 타격이 컸다.

재갈을 채워 놓은 것은 석주로 하여금 변명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석주도 굳이 그걸 풀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정원의 싸늘한 얼굴을 보는 순간, 남은 모든 힘을 어떻게든 끌어내 이 재갈을 풀고 모든 걸 고백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해 볼 겨를도 없었다. 정원은 거침없이 석주에게로 다가서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진심을 담아 쳤다는 것이 느껴지는 타격이었다. 골이 울렸다. 에스퍼도 아닌, 완력은 비각성자와 다를 바 없는 가이드의 주먹에 맞고도 골이 울리는 것을 보면 자신이 퍽 쇠약해지기는 한 모양이었다.

실없는 웃음이 샜다. 이 웃음을 보면 정원은 더욱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과격하네요.』

전무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간 고개를 느릿느릿 원래대로 돌려놓자, 이번에는 정원의 양손이 다가와 거칠게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걸로 당신 마음이 편해지면 그건 그것대로 좋겠지만…….

눈빛만으로 생각이 전해진다면 좋을 텐데.

석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멱살을 잡힌 손으로부터 스멀스멀 흘러들어오는 기운이 있었다. 가이딩이다. 석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개 같은 새끼. 이딴 식으로 날 속여?”

반면 정원의 입은 격양된 말을 뱉고 있었다. 도무지 진심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진실 된 표정과 욕설이었지만, 평소의 정원을 아는 석주로서는 의아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멀찍이서 관망하고 있는 전무와… 목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생동감이 넘치는 기운.

정말로, 정원은 지금 자신을 가이딩하고 있었다.

대체 왜? …거짓말을 한 건가? 사장에게.

당황한 석주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때, 정원이 위협하듯 고개를 바짝 들이민 채 속삭였다.

“순간이동해요. 여기로부터 가능한 먼 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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